관촉사는 고려 전기, 승려 혜명이 창건한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사찰이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관촉사 사적비에서 창건 경위와 중수 내력, 그리고 석조 미륵보살 입상의 조성에 대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논산 지역은 지리적·경제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광종은 이 지역 지배를 강화하고자 관촉사를 창건하였다. 관촉사는 조선 후기까지 개수가 이어졌으며, 지역 노인들이 직접 개수하기도 하였다. 국보로 지정된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과 보물인 석등 등 많은 국가유산이 남아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고려 광종의 명에 따라 승려 혜명(慧明)이 창건한 사찰이다. 조선 후기에 주1 관촉사 사적(灌燭寺事跡)(1743)에는 사찰 창건 경위와 당시 조성한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일명 은진미륵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969년 기사년(己巳年)에 한 여인이 주2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 보았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바위로 불상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혜명에게 그 일을 맡겼다. 혜명은 100여 명의 공장과 함께 970년(광종 21)에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 불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걱정하던 어느날, 사제총에서 동자 두 명이 삼등분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혜명은 돌아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불상을 세웠다. 그런데 그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주3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상서로운 기운이 21일 동안 서렸으며, 미간의 주4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좇아와 예배하였는데, “ 가주(嘉州)에 큰 불상이 있어 역시 동쪽을 향해 서 있는데 빛이 같은 때에 서로 응하였다.”라고 하여 관촉(灌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불상에 얽힌 많은 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중국에 난이 있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주5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치자 쓰고 있던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졌다고 하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불상에 기도하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문(正門)과 법당은 1386년(우왕 12)에 처음 지어졌고, 1581년(선조 14)에 거사(居士) 백지(白只)가 중수하였으며, 1674년(현종 15)에 승려 지능(智能), 1735년(영조 11)에 승려 성능(性能)이 개수하는 등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주6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40년(영조 16)에는 마을의 노인들이 석축을 고쳐 세우고 겸하여 주7도 모두 새롭게 했다고 한다. 1743년에 세워진 관촉사 사적비는 이 개수를 기념하여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현존하는 주8로는 미륵전과 대광명전, 삼성각, 명부전, 반야루, 사천왕문, 일주문 등이 있다. 국가유산으로는 국보로 지정된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과 보물인 논산 관촉사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인 관촉사 배례석,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인 석문(石門) 등이 있다.
관촉사 배례석은 길이 204㎝, 너비 103㎝, 높이 40㎝의 주9 화강암 위에 팔엽(八葉) 연꽃 3개를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 연꽃 2송이가 연꽃 줄기에 달려 있는 듯이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다. 또 해탈문인 석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으로,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널찍한 판석을 올려 놓아 4각의 모습을 띤다. 창건 때 쇄도하는 참배객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고 동 · 서 · 남 · 북 사방에 문을 내었던 것인데 그중 동문에 해당하는 이 문만 남아 있다.
고려 광종은 지리적 · 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인 논산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관촉사를 창건하였으므로, 고려 초기 사원의 창건을 통한 지방 지배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또한 관촉사는 조선 후기까지 개수가 지속되었고, 지역 노인들이 직접 절을 수리하는 등 조선 후기 지역민과 사찰의 관계도 엿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배례석은 너비 40㎝, 길이 150㎝의 장방형 화강암 위에 팔엽(八葉) 연화 3개가 연지(蓮枝)에 달려 있는 듯이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