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의미로는 부처[如來]의 존상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의 상은 물론 보살상(菩薩像) · 천왕상(天王像) · 명왕상(明王像) · 나한상(羅漢像) 등을 모두 포함한다.
불타란 출가하여 수행을 거듭한 뒤 자기 스스로 진리, 즉 보리(菩提)를 얻은 각자(覺者)라는 의미이다. 대승 불교(大乘佛敎)에서는 모든 중생(衆生)이 수행하면 불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부처는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로, ‘석가족(釋迦族)의 성자(聖者)’로 불리던 석가모니(釋迦牟尼), 즉 석존(釋尊)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석존 이전의 과거에도 부처가 있어 연등불(燃燈佛) · 다보불(多寶佛) 등이 있다. 혹은 석가를 포함한 과거칠불(過去七佛 : 毘婆尸佛 · 尸棄佛 · 毘舍浮佛 · 拘留孫佛 · 拘那含佛 · 迦葉佛 · 釋迦牟尼佛)이 있다고 한다. 또한 여러 정토 세계(淨土世界)에도 많은 부처가 있으며 시방(十方)에 걸쳐 무수한 부처가 있다고 믿는다.
불교의 교리가 발달함에 따라 부처의 성격도 구체화되어, 인간 세계에 태어나 불법의 진리를 몸소 체험하여 증명한 석존은 응신불(應身佛), 여러 불국토(佛國土)에 나타난 부처는 보신불(報身佛) 그리고 불법의 진리 자체를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집합체로서 인식된 부처인 법신불(法身佛)의 삼신불(三身佛) 사상이 등장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의 많은 부처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예배의 대상으로서 우리 나라에서 널리 숭상된 불상으로는 석가불 · 아미타불(阿彌陀佛) · 약사불(藥師佛) ·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등이 많이 만들어졌다.
대승 불교가 발달함에 따라 차츰 보살의 개념이 등장하였다. 보살은 성도(成道) 또는 성불(成佛)의 뜻을 품고 보리를 구하고 있으나, 현재는 중생을 교화 제도(敎化濟度)하기 위하여 부처를 도와 오랫동안 보살행(菩薩行)을 하는 분이다. 보살은 대개 부처를 보좌하여 수행하는데 이를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이라고 부른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은 현재 도솔천(兜率天)에서 보살행을 하지만 56억7천만년 후에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으로써 석존의 업적을 계승할 미래의 부처이다. 관음(觀音)과 대세지(大勢至)는 아미타불의 보처보살이며,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은 석가모니 또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의 보처보살, 일광(日光)과 월광(月光)은 약사여래의 보처보살이다.
보살은 상으로 표현될 때에는 단독으로 예배되는 경우도 있으나 불상의 양쪽 협시(脇侍)로 표현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보살상의 표현에 있어서 옷 입는 형태는 불상과는 달리 법의(法衣 :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가 없다. 상체는 나신(裸身)으로 천의(天衣 : 천인(天人)이나 선녀의 옷)라고 부르는 숄 같은 것을 어깨에 걸쳐서 몸에 두르며 치마와 같은 상의(裳衣)를 입는다.
불상과 달리 몸에 화려한 장식을 하여 목걸이나 팔찌 등을 걸치고 있는데 몸체에 걸쳐진 구슬 장식은 영락(瓔珞)이라 부른다. 머리에는 보관(寶冠) · 목걸이 · 팔찌 등으로 장식하였다. 이것은 싯다르타가 성도하기 전 귀인(貴人)으로서 수행하는 과정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보살상 중에 보관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으면 관음보살, 불탑(佛塔)이 있으면 미륵보살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이러한 표현에 의해서만이 특정 보살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보살상이 손에 연꽃이나 정병(淨甁) · 보주(寶珠) 같은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경우도 흔히 보이나 명문이 없는 경우 정확한 보살명을 확인하기 어렵다.
넓은 의미로 불상의 범위에는 불상과 보살상 이외에도 인도의 불교 성립 이전부터 있었던 브라만교나 민간 신앙의 여러 신들이 불교 세계를 수호하는 신으로 포섭되어 예배되는 많은 제상(諸像)이 있다.
즉, 천부(天部)에 속하는 범천(梵天) · 제석천(帝釋天), 불국토를 사방에서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 성역(聖域)의 입구를 지키는 인왕(仁王) 그리고 원래는 인도의 토착 신앙의 신이었으나 불법에 교화된 팔부신중(八部神衆), 불법을 받들고 불국토를 장엄(莊嚴)하는 비천(飛天) 등 불교에 관계되는 모든 신상(神像)들을 넓은 의미의 불상이라는 용어에 포함하여 부르기도 한다.
또한 부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전수(傳授)하는 나한상이라든지 조사상(祖師像), 밀교(密敎)의 명왕상들까지도 불상에 포함된다. 천부상 중에서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도깨비를 밟고 서 있다. 각기 사방을 수호하며 북에는 다문천(多聞天), 동에는 지국천(持國天), 서에는 광목천(廣目天), 남에는 증장천(增長天)이 있다.
각기 들고 있는 무기들이나 얼굴 표정이 다르다. 한편 절의 입구나 탑문에 조각되어 있는 인왕상은 좌우에 하나씩 쌍을 이루고 있어 성스러운 지역을 지키는 문지기와 같은 수호신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한 석가의 권속 중 불법 수호를 목적으로 하는 팔부신중에는 천(天) · 용(龍) · 야차(夜叉) · 건달바(乾闥婆) · 아수라(阿修羅) · 가루라(迦樓羅) · 긴나라(緊那羅) · 마후라가(摩睺羅伽)가 있다. 조각으로 표현될 때에는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불상은 대부분 대좌(臺座) 위에 놓이며 상 뒤에는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가 있어 장엄의 효과를 더해 준다. 광배는 머리에 있는 두광(頭光)이나 몸 뒤에 있는 신광(身光)으로 구성되고, 주변이 화염문(火焰文 : 불꽃무늬)으로 장식되어 부처의 신성함을 강조하여 준다. 또한 광배에는 조그마한 화불(化佛)이 있어 여러 형태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영겁의 불타 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불상은 인간의 형체를 빌려서 표현하지만, 그 부처가 상징하는 여러 초인간적인 성격이 신체적인 특징으로 나타난다. 머리에는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있으며 머리카락은 짧고 꼬부라져서 나발(螺髮 :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형이다.
귀는 길며, 이마의 한가운데에는 백호(白毫)라는 긴 털이 있어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비쳐서 볼 수 있는 초월적인 능력이 있다. 이러한 부처 표현의 초인간적인 성격이 신체적으로 표현될 때에 크게는 32상(三十二相) 80종호(八十種好)의 특징이 있어 보통의 인간의 표현과 구별이 된다고 한다.
부처의 법의는 대개 두 어깨를 덮는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 형식과 한쪽만을 덮는 편단우견(偏袒右肩 : 왼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 형식으로 구분된다. 자세, 손의 모습(手印), 지물에 따라서도 그 불상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상 표현의 도상적(圖像的) 규범은 경전상의 의궤(儀軌)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으로 인도에서 성립되어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와 불교 미술이 서역과 중국을 거쳐서 우리 나라에 들어오는 동안 새로운 의미의 도상이 첨가되거나 지역적인 특성이 반영되어 약간씩 변모된 불상들이 유행하게 되었다.
불상이나 보살상의 표현에는 그 상의 성격과 의미에 따라 여러 형태의 손 모습을 보여 준다. 이를 수인 혹은 인상(印相)이라 한다. 오른손을 위로 올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두려워 말라는 의미의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왼손을 밑으로 하여 소원을 받아들인다는 여원인(與願印)이 있다.
또한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지신(地神)에게 부처가 마군(魔軍)을 물리쳤음을 증명하는 자세로서 깨달음의 순간을 상징하는 의미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불법을 설하는 의미의 설법인(說法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일체라는 뜻을 나타낸 지권인(智拳印), 아미타극락정토의 9등급을 나타내는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등이 가장 대표적인 수인이다.
불 · 보살상의 표현에는 자세에 따라서도 그 상징하는 의미가 달라질 수가 있다. 보통은 두 다리를 포개어 앉은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좌상이나 입상(立像)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내리는 의상(倚像), 의자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얹어 놓은 반가상(半跏像), 두 다리를 교차하고 앉은 교각상(交脚像),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왼발은 직각으로 구부리거나 대좌 밑으로 내려뜨리는 유희좌상(遊戱坐像), 누워 있는 와상(臥像) 등이 있다.
인도에서는 석존의 입멸 이후 약 500년 동안 불상이라는 예배 대상이 조성되지 않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석존이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서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에게 설법을 하였는데 이때에 열렬한 신자였던 스라바스티성(舍衛城)의 프라스트나지왕(波斯匿王)과 코삼비성(憍賞彌城)의 우다야나왕(優塡王)은 각각 금과 향목(香木)으로 5척의 불상을 만들어서 이 세상에 잠시라도 석존이 없는 허전함을 달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유물상으로 보면 불상이 처음 조성된 시기는 1세기경인 인도의 쿠샨 왕조(Kushan王朝) 시대였다. 그 이전 수세기 동안에는 부처의 전생의 선행을 이야기한 본생담(本生譚)을 묘사한 본생도(本生圖), 또는 일생의 중요한 사건이나 가르침의 내용을 묘사한 불전도(佛傳圖)가 회화나 부조 등 여러 가지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숭앙되었다. 불상 표현의 이러한 단계를 무불상(無佛像) 표현 시대라고 한다.
예를 들어 청정(淸淨)한 연화는 석존의 탄생을, 보리수(菩提樹)는 해탈을, 법륜(法輪)은 불법(佛法)을 설하여 바퀴가 굴러가듯 사방에 영원히 전파된다는 의미로, 불탑은 열반(涅槃)의 상징으로서 신앙되었다. 그리고 부처 자신의 존재는 불족적(佛足跡)이나 빈 의자로써 표현되었고 부처의 사리(舍利)나 불아(佛牙)는 부처 자신의 진신 그 자체로서 숭앙되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 시대에 이르러 불상의 표현이 인체의 형상을 빌려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인도 서북부 간다라(Gandhara) 지방은 헬레니즘(Hellenism)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서방의 고전 문화의 영향을 입은 곳이다. 불상이라는 신격(神格)이 인체의 형상을 빌려서 표현되는 것은 그리스의 신상 표현의 전통이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인도 중북부의 마투라(Mathura) 지방은 이전부터 전해 오는 인도 고유의 전통을 이어 약간 늦게 불상 표현이 등장하였다고 추측된다.
간다라 조각은 소조상이나 회색의 편마암 조상이 많으며 서구적인 불안(佛顔)에 사실적인 표현이 강조되는 데 비하여, 마투라 조각은 붉은 색에 흰 반점이 있는 사암질(砂巖質) 조상이며, 신체 묘사는 상징적이고 엄격함이 강조되어 인도적인 예배 대상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인도의 불상은 굽타(Gupta) 시대에 이르러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불상 표현이 이루어졌다. 굽타 조각의 대표적인 제작지는 쿠샨조부터 불상 조성이 활발했던 마투라 지방과 녹야원(鹿野園)이 있는 베나레스 근처의 사르나스(Sarnath) 지방이다. 건장한 체구에 균형 잡힌 신체 비례 그리고 몸에 꼭 달라붙은 법의 밑에 팽팽하고 긴장감이 도는 불신의 표현은 마치 불법 자체가 불상에 응결되어진 것같이 신성한 감을 보여 준다.
굽타 이후 팔라(Pala) 시대에는 힌두교의 융성으로 불상의 조성은 인도 동북부 벵골 지방에 치중되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인도에서 불교 문화가 거의 자취를 감춘 대신 남으로는 해로(海路)로 실론과 동남아 지역으로 퍼져 갔다. 북으로는 육로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동전(東傳)하면서 발전하였다.
특히 서역은 동서 무역의 길목으로도 중요하였으며 타크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천산 남로(天山南路)인 코탄 · 미란을 지나거나 천산 북로(天山北路)인 키질 · 쿠챠 · 투르판 등지의 여러 불교 문화의 중심지를 지나 중국의 돈황(燉煌)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서역의 불상은 여러 지역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형성되었다. 즉 인도 · 티베트 · 이란의 요소에 서역의 지역적인 특성이 가미되었다. 그리고 중국으로 접근할수록 중국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는 다양하고 복잡한 도상과 양식이 혼재, 절충되어 발전하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1세기경의 후한시대로 생각된다. 그러나 유물상으로는 최근 장쑤성(江蘇省)에서 발견된 후한 말기의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 이외에는 대부분 3, 4세기경 동경(銅鏡) 뒷면의 부조나 소형의 도제불(陶製佛) 혹은 고식(古式)의 청동불(靑銅佛) 등에 보이듯이 본격적인 독립된 예배 대상으로 인식되어 제작된 것 같지는 않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에 이르러 북방 호족(胡族)들의 적극적인 불교 수용 태세에 따라 불상 제작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후조(後趙)의 건무4년명(建武四年銘, 334년)의 금동불좌상은 현존하는 최고의 명문이 있는 불상이다. 대체로 5세기 후반까지의 북위시대의 불상에는 서역이나 간다라의 영향이 강하였으며, 6세기에 들어서서부터는 좀더 중국화된 불상 조각이 발달하였다. 이것은 불교 자체가 점점 토착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규모의 석굴 사원의 조영이 시작되었다. 돈황의 천불동(天佛洞)을 비롯하여 병령사(炳靈寺) · 맥적산 석굴(麥積山石窟) · 운강 석굴(雲岡石窟) · 용문 석굴(龍門石窟) · 천룡산 석굴(天龍山石窟) 등 남북조시대에서 당대(唐代)까지 많은 사원과 불교 벽화와 불상이 조성되었다. 이와 같은 석굴 사원은 중국 북방에 치중되었다.
이민족 통치의 북조는 불교를 국교로 신봉하며 적극적인 신앙 생활과 조상 활동을 편 데 비하여, 남조는 한문화(漢文化)의 전통을 이어 좀더 학문적인 태세로 불교를 수용하고 개인적인 신앙 위주로 발전하였다. 현존하는 남조계의 불상은 예도 많지 않거니와 소규모이며 부드럽고 환미감이 강조되어 온화한 느낌을 주는 데 비하여, 북조의 불상은 강직하고 예리한 조각 수법에 엄숙하고 위압하는 듯한 조형감이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수나라의 중국 통일과 더불어 다양한 요소가 혼합되고, 당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불상 조각의 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용문(龍門)봉선사(奉先寺)의 비로자나본존과 주변의 보살 · 나한 · 신장상이 7세기 후반의 긴장감이 있으면서 단정한 조각 양식을 대표한다. 8세기 초의 장안 보경사(寶慶寺)의 부조상은 고전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룬 완숙기의 당대 불상 양식을 보여 준다.
천룡산 석굴의 불상은 풍만하고 유연하며 약간 세속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8세기 중엽 이후의 중국 불상 양식을 예견할 수 있다. 많은 석조상과 금동상들이 당대의 불상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전통은 이후 오대 · 요 · 금 및 송대의 불상 양식 조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체로 금동 · 목조 혹은 도제 불상이 많으며 당의 양식에서 출발하여 좀더 표현이 과장되거나 장식적인 요소가 첨가되면서 변모되었다.
불교가 처음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이다.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의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와 불상 · 경문(經文)을 보냄으로써 비롯되었다. 이어서 백제에도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 동진(東晉)에서 마라난타(摩羅難陀)라는 승려에 의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다.
새로운 종교의 전파와 함께 전해졌을 불상은 절에 안치되거나 승려들에 의하여 예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곧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이며 초기에는 대체로 중국식 불상 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서울 근교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은 현존하는 초기의 불상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중국의 북위 초인 5세기 초나 중엽경의 불상 양식과 유사하여 중국의 전래품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뚝섬상과 같이 네모난 대좌 위에 두 손을 앞에 모은 선정인(禪定印)의 모습을 한 불좌상은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불상 중 가장 초기의 형식을 대표하는 것이다. 즉, 옛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 원오리(元五里) 절터에서 나온 소조(塑造) 불좌상이나, 옛 백제의 도읍인 부여의 규암면 신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그리고 역시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에서 출토된 납석제(蠟石製) 불좌상들은 대체로 6세기의 삼국시대 초기 불상을 대표하는 예들이다.
앞서 언급된 뚝섬 불상 형식을 계승하거나 혹은 약간 발전시킨 것이다. 이들 불상들의 양식적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에서 찾을 수 있으며 다시 서역을 거슬러서 인도의 불상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4세기 말에 전래는 되었으나 현존하는 삼국의 불상 중에서 6세기 이전으로 올라간다고 보이는 확실한 예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명문이 있는 불상 중에는 “연가7년(延嘉七年) 기미년의 고(구)려국……”의 기록이 있는 금동불입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연가’라는 연호는 역사 기록상에 발견되지는 않으나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된다. 또한 ‘기미년’이라는 간지(干支)는 불상의 양식에서 그 연대를 대략 추정할 수 있다. 이 상의 가늘고 긴 얼굴형이나 법의의 주름이 양옆으로 뻗쳐 약간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모습 등이 북위시대의 6세기 초 불상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서 대체로 539년에 해당되는 기미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상은 현존하는 삼국시대 불상 중에 명문으로써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또한 출토지는 경상남도 의령이었으나 명문 내용으로 고구려의 상임이 밝혀진 중요한 예이다.
신라에서도 불교에 관한 기록이 이미 5세기 초부터 나타나나 528년(법흥왕 15년)에 불교가 공인된 이후 기록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절은 흥륜사(興輪寺)로서 544년에 완성되었다. 당시 이 절에는 예배 대상으로서 불상이 안치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절터만 겨우 알 수 있으며 불상의 자취는 흔적조차 없어졌다.
그 뒤 황룡사(皇龍寺)라는 거대한 사찰이 지어져서 566년에 완성되었다. 지금도 이 절터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이듯이 인도에서 보내진 모형에 따라 주조되었다는 장륙(丈六)의 금동삼존불상의 커다란 석조대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러한 유적을 통하여 이미 6세기 후반에는 신라에서도 대규모의 불상 조성이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6세기 후반의 삼국시대의 불상 중에는 삼존 형식이 많으며 그중에는 명문이 있는 작품도 여럿 포함되고 있다. 즉,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의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국보, 1962년 지정)과 김동현(金東鉉) 소장의 황해도 곡산(谷山) 출토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1962년 지정)을 들 수 있다.
그 표현 양식이 중국의 북위 말기 및 동위시대의 조각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각기 564년 및 571년에 해당되는 일광삼존상(一光三尊像)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 불 · 보살상의 세부 표현이나 광배의 화염문 혹은 연화대좌의 표현 양식에서 보면 중국의 상들보다 좀더 단순화되었다. 그리고 기법 면에서도 세부 묘사가 생략되고 투박한 감이 있다. 이러한 요소는 우리 나라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조형성의 한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시대의 석조 불상으로서 환조(丸彫 : 한 덩어리의 재료에서 물체의 모양 전부를 조각해 내는 일)로 된 예는 별로 많지 않으며, 대부분 암벽에 부조(浮彫 : 돋을새김)로 표현된 조각이 많다. 그중에서도 옛 백제 지역인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의 태안마애삼존불(보물, 1966년 지정)은 보살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불상이 표현된 특이한 형태이다.
서산시 운산면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1962년 지정)은 조각 수법이 우수할 뿐 아니라 얼굴 표정에 보이는 밝고 티 없이 웃는 자비의 미소는 ‘백제의 미소’라 불릴 만큼 특징적이다. 이 서산마애불은 불상의 왼편에 반가사유보살상(半跏思惟菩薩像)을, 오른편에는 보주(寶珠)를 두 손에 마주 잡은 보살입상을 협시로 거느린 삼존불로서 두 보살상 모두 삼국시대에 유행했던 보살상 형식이다.
또한 삼존불 형식으로서 보살입상과 반가사유상을 양협시로 거느린 도상(圖像) 역시 특이한 배치로서 한국적인 수용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보주를 양쪽 손에 마주 들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협시상과 같은 형식은 백제 지역에서 많이 나타난다. 중국에서도 북조의 북위시대 불상보다는 오히려 남조 지역 출토의 불비상(佛碑像)에서 발견되고 있어 백제와 중국 남조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이미 백제의 전축분(塼築墳)이나 연화문전(蓮花文塼)의 표현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불교 미술과도 관련이 깊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백제의 불상은 대체로 부드럽고 온화한 조형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보주를 든 보살상 형식이 일본 초기 불상 조각으로 대표적인 호류사(法隆寺)의 몽전관음상(夢殿觀音像)이나 금동48체불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 외에도 기록상으로나 유물상으로 많은 연관성이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은 백제의 성왕 때인 552년에 불교를 전해 준 이래 많은 불상과 경전이 보내어지고, 승려의 왕복뿐만 아니라 많은 공장(工匠)과 와공(瓦工) · 화공(畫工) 등이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시대(飛鳥時代) 불교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호류사에 있는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은 같은 절에 있는 몽전관음상에 비하여 매우 이국적인 특색을 보여 준다. 이 점이 바로 한국적인, 아마도 백제적인 특징으로 지목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불상 중에는 특히 반가사유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반가사유상이란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오른손을 뺨에 살짝 대고 사색하는 자세의 보살상을 일컫는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흔히 미륵보살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시초는 싯타르타 태자가 출가하여 중생 구제의 큰 뜻을 품고 사색하는 태자사유상에서 점차 발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서산마애삼존불의 좌측 협시는 백제의 반가상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경주 근교의 단석산 신선사에 있는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 중의 반가사유보살상은 신라 초기에 속하는 중요한 예이다. 고구려시대의 반가사유보살상으로는 평양의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보살상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2구의 거대한 금동반가사유보살상(국보, 1962-1 지정) 및 금동반가사유보살상(국보, 1962-2 지정)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금동불 20여 구가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경상북도 봉화 출토의 석조반가사유보살상은 현재 하반부만 남아 있는데도 크기가 1.6m이다. 만약 완전하였더라면 현존하는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석조상으로, 그 형태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1962-2 지정)과 같은 양식 계보임을 알 수 있다.
반가사유보살상의 제작 역시 일본 불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1962-2 지정)과는 거의 같은 형태의 목조반가사유상이 일본의 고류사(廣隆寺)에 있어 흥미롭다. 이 상은 우리 나라에 많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절의 창건 연혁이나 불교 교류의 기록으로 보아 우리 나라, 아마도 신라에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정치 · 사회적으로 중요시되던 화랑 제도는 불교의 미륵 신앙과 관련지어져 불교사상적 · 역사적인 면에서 반가사유보살상의 신앙 및 그 의미에 한국적인 독특한 수용태세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말기, 즉 7세기 중엽에 가까워지면 불상의 표현에는 얼굴이나 불신의 묘사에 입체감이 강조되고 법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진다. 그리고 상의 전면뿐 아니라 측면이나 뒷면의 묘사에도 관심을 두는 그야말로 입체 조각으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7세기의 석조상으로서는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이나 경주남산삼화령석조삼존불상 ·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을 비롯하여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 경주인왕동석불좌상 등이 이 시대 양식을 잘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7세기의 석조 불상들은 대체로 신라 지역에 많이 남아 있어 비록 삼국 중 불교가 뒤늦게 공인되긴 하였으나 그 조상 활동은 7세기 전반경부터 활발히 성행한 것을 알 수 있다.
7세기에 제작된 우수한 금동불상 중에 특히 관음상이 많이 전하고 있다. 백제 규암리사지에서 나온 2구의 금동보살입상을 비롯하여 공주 근교인 의당면 송정리 출토의 금동관음보살입상,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1968년 지정) 그리고 경상북도 선산(지금의 구미) 출토의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1976-1 지정) 및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1976-2 지정)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우수한 상들이다. 보관 중앙에 아미타불이 있어 관음상임을 도상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당시의 관음 신앙의 유행을 아울러 추측할 수 있다.
이들 금동관음보살상에서 보듯이 7세기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보살상 표현에서는 신체의 비례가 균형이 잡히고 세부 묘사가 구체적이다. 그리고 서 있는 자세와 늘어진 천의의 자연스러운 표현은 조형적으로 균형 잡힌 불상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규암리 출토의 보살상과 약간 시대가 늦은 선산 출토의 보살상과 비교하여 보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조형상의 변화는 석조상보다는 소규모의 금동상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며 주조 기술적인 면에서도 많은 진전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말기의 불 · 보살상의 표현에 있어서는 중국의 수나라에서 당나라 초기에 이르는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불상 표현 원칙에 있어서도 점차로 신체의 균형 잡힌 비례감, 날씬한 몸매에 조화되는 영락 장식 그리고 정면뿐 아니라 측면 · 뒷면의 입체적인 표현에 더욱 관심을 둠으로써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불 · 보살상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 이상적 형태의 예배 대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두드러지고 우리 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표현에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우리 나라 불교 문화의 전성기라 부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숭상되어 오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정신적인 기틀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의 사원 건축이나 불상 조성 등에 큰 영향을 미치었다. 통일신라의 불상 조성의 배경에는 우선 토착적인 고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이 기반이 되었으며 그 위에 백제와 고구려와의 통합에 따른 새로운 자극과 변화가 불교 미술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통일을 전후하여 빈번해진 당과의 정치적 · 문화적 교류와 승려들의 대당 유학(對唐留學)에 따라 새로운 불교 경전의 전래와 교리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져서 율종(律宗) · 화엄종(華嚴宗) · 법상종(法相宗) 등의 종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불상의 종류나 표현도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나아가서 중국을 넘어 서역과 인도로 이어지는 불교 문화의 국제적인 요소 또한 신라의 불교 미술에도 반영되어 신라의 불교 미술은 다양한 외래 양식의 수용과 새로운 변형 그리고 토착적인 요소가 합하여져 독특한 통일신라의 불상 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현존하는 통일신라의 불상들 중에는 역사 기록과 부합되거나, 명문에 의하여 연대를 알 수 있는 예가 많은 편이다. 따라서 불상 양식의 시대 구분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대체로 통일 초부터 670년대까지는 보수적 경향이 짙은 전대의 양식 계승 및 새로운 요소의 모색기, 680년 이후 8세기 후반 초인 석굴암의 완성기(751∼774년)까지는 중국의 당 양식의 수용 및 신라의 이상적인 불상형의 완성기, 8세기 말 이후로는 불상 양식의 토착화와 쇠퇴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표현의 형식을 보면 입상에는 여원인과 시무외인의 통인(通印)을 보여 주는 불상이 많고 약함(藥函)을 든 경우도 많이 눈에 뜨인다. 법의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국보, 1962년 지정)과 같이 법의가 양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주름이 가슴 앞으로 여러 겹의 U자형의 곡선을 형성하면서 늘어져 있다.
또 다른 형식은 경상북도 선산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이나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1962년 지정)과 같이 통견의 법의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내려오다가 허리 밑에서 Y자형으로 갈라져서 각기 양다리 위에서 U자형의 주름을 형성하면서 좌우 대칭을 이루는 형식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들 두 가지 불입상의 직접적인 모형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역이나 인도에서 원류를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불상 양식은 넓은 지역과 긴 시간에 걸쳐 발전하며 변천하였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이 두 가지 형식이 주류를 이룰 만큼 대다수를 차지하며, 상의를 입는 방식에 따라 각기 몇 종류의 유형을 형성하여 토착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좌상 형식은 대부분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수인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한 금동삼존판불과 같이 설법인을 하거나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국보, 1962년 지정)과 같이 시무외인과 촉지인이 결합된 손 모양을 한 예도 있다.
7세기 말부터 나타나서 유행하기 시작한 불상 중에는 촉지인의 예가 많이 보인다. 경상북도 군위팔공산(八公山)에 있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1962년 지정)의 본존불이나 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보물, 1963년 지정)의 본존상 그리고 석굴암의 본존불상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원래 촉지인은 싯다르타가 해탈하여 성도한 순간을 상징하는 수인이다. 원칙적으로는 석가모니불을 의미하나 후대에 와서는 널리 수용되어 아미타불이나 약사불에서도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는 석굴암의 조성 이후의 불좌상에 이 촉지인이 널리 유행하였다. 대체로 촉지인의 불상에는 석굴암의 본존과 같이 편단 우견의 상이 많다. 그러나 군위삼존불이나 경주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같이 통견의 법의가 약간씩 변형된 형태의 상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보살상은 삼국시대 말기의 양식에서 좀더 화려한 영락 장식을 하고 몸의 자세도 정면성 위주에서 탈피하고 있다. 허리를 약간 비틀면서 한쪽 다리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서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동적인 자세로 바뀐다. 이러한 변화는 경주 안압지 출토의 삼존판불의 협시보살이나 경주 남산 칠불암의 협시에서 현저히 보인다.
또한 천의도 가슴에서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걸쳐 있고 영락 장식도 화려하게 변한다. 719년명이 있는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1962년 지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신라의 보살상 표현은 전체적인 양식의 흐름에서 보면 중국 당의 7세기 말과 8세기 초의 보살상 표현과 공통된 요소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넓적하고 부드러운 얼굴 모습이나 약간 투박한 감이 있는 조형성은 역시 한국적인 특성이 반영되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은 형식이나 도상적인 면에서는 국제적인 흐름과 연관이 되고 그 표현이나 기법에서는 한국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신라 양식이 형성되어 갔다.
예를 들어 경주 안압지 출토의 삼존판불과 같은 상은 도상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당의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돈황 천불동의 벽화와도 비교되며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호류사 소장의 아미타 압출불좌상(押出佛坐像) 혹은 금당벽화(金堂壁畫)의 아미타정토변(阿彌陀淨土變)과도 비교되며 한편 신라인 특유의 불안(佛顔)과 조각 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불상 조각 중 가장 우수하며 또한 대표적인 예는 경주 토함산 위에 위치한 석굴암의 조상들이라 하겠다. 마치 불국토를 재현하듯 본존과 보살 · 천(天) · 나한 등 여러 권속들이 모두 모여 있으며 여러 개의 다듬어진 돌로 쌓아서 축조한 궁륭 천정의 석굴 사원은 중국에서도 그 유례가 드물다.
특히 개개의 조상 표현의 조각 기술의 세련도나 상의 알맞은 비례, 부드러운 조형성 위에 불상 전체에 흐르는 숭고한 종교성이 조화되어 종교 예술로서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이 돋보인다. 1995년 말 석굴암이 세계적으로 보존해야 하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유네스코에 의해 지정되었다.
석굴암이 조성된 신라의 경덕왕 때는 불교 문화의 전성기로서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이는 분황사의 거대한 금동불이나 봉덕사의 동종(銅鐘) 등이 만들어지는 등 국가 사업으로서 이루어지는 대규모의 불사(佛事)가 가장 활발하였던 때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의 후기, 즉 8세기 말에서 9세기에 이르면 불상 조성에 있어서는 금동상이 많이 줄어드는 반면 석조상이나 철불상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좌상(毘盧遮那佛坐像)이 많이 만들어진다. 9세기 중엽경의 명문이 있는 철원의 도피안사(到彼岸寺)나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등은 신라 말기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중요한 예이다.
이 불상은 원래 밀교 종파에 있어 금강계(金剛界)의 법신불로 숭상되는 보살형 대일여래상(大日如來像)과 같은 성격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후기에는 이와 관련되는 다른 밀교 조상은 별로 등장하지 않고 지권인의 비로자나불만이 선종 사찰(禪宗寺刹)에 많이 봉안되어 있다. 이는 통일신라 후기의 선종계의 불교가 화엄 사상 교리의 영향을 받아 화엄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을 예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대체로 통일신라 말기에서부터 유행하던 촉지인의 불좌상이 계속 조성되었다. 그리고 우견 편단이나 통견의 법의는 약간씩의 변형을 이루면서 고려적인 독특한 불상 양식을 이루어 나갔다. 대체로 고려시대 전기에는 지방에 따라 몇 가지의 특징 있는 불상군이 제작되었다.
그중에는 강원도 강릉 주변의 월정사 · 한송사지 · 신복사지의 석조나 대리석 보살상을 들 수 있다. 이 상들은 신라 말기의 불상 양식을 이어 주는 것 같으면서도 통통하고 풍만한 조형성은 중국의 송이나 요시대의 불상 양식이 어느 정도 반영된 듯하다.
또한 다른 한 유형은 강원도 원주나 경기도 광주, 충청남도 충주 지역에서 출토된 거대한 철불들로 신라 말기의 양식이 부분적으로 이어지면서도 지방색이 강한 특이한 불상 양식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점은 고려 초 이 지역에서 활약하던 호족들의 적극적인 불사의 후원과도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충청남도의 석조불 · 보살상,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에 많이 보이는 기둥같이 큰 몸체에 관을 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1963년 지정) ·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1984년 지정) ·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1963년 지정)이다. 이들은 토착적인 혹은 지방색이 강한 불상 형태가 많이 보인다.
민간 신앙적인 면과도 밀착되어 신앙된 것으로 생각된다. 거대한 불상의 조성은 또한 고려 왕실의 지방적 기반을 강화하는 의미도 반영되었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불상 조성의 의욕은 크나 기술면에서 뒤떨어진 조형 감각을 보여 주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 황실과의 관계에 따라 라마 불교가 전해져서 현존하는 불상 중에는 티베트 · 네팔 계통의 이국적인 요소가 보이는 특이한 불상 양식이 혼재하고는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고려 초기에 형성된 조각 양식이 좀더 큰 영향력을 지니면서 부드럽고 온화한 조상 양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과 문수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들 수 있다. 더욱이, 이 두 상은 1346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명문이 있어 고려 후기 불교 조각의 편년 설정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 예이다.
또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금동불감(金銅佛龕) 몇 예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소형의 전각(殿閣) 내부 벽에 불상을 부조(浮彫)하고 또 금동불을 안치하여 개인의 원불(願佛)로서 혹은 여행하면서 예배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억불 숭유(抑佛崇儒)의 정책에 따라 조선시대의 불교는 중앙 집권층의 관심에서 떠나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며 고려 말까지 형성된 조각 양식의 답습과 형식화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 이후 수용, 발전되어오던 불교 조상은 표현의 창의성과 종교 조각으로서의 숭고성이 감퇴하고 실제 제작 기술에서도 퇴보를 가져왔다.
조선시대의 불상은 아직 연구 조사의 단계로서 그 체계를 잡기가 매우 어려우나 대체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전후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기는 아직도 고려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 반면 후기는 불신의 비례나 조각 수법에서 형식에 흐르고 답습적이어서 불상에서 풍기는 정신성이 결여되었다. 그리고 중국 등지에서의 영향이 거의 보이지 않는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되었다. 또한 제작 과정의 편의를 위하여서 그 형태가 거의 비슷한 개성이 없는 불상으로 표현되었다.
조선시대 전기의 상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목조아미타불좌상에는 성화 18년(1482년)명의 복장(腹藏) 기록이 있는 우수한 상이 있다. 또 경기도 수종사탑(水鍾寺塔)에서 나온 불감(佛龕) 및 금동불좌상에는 복장 주서(腹藏朱書)로 1493년 명에 해당되는 기록이 있어 왕실의 빈(嬪)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기림사건칠보살좌상(보물, 1965년 지정) 역시 대좌에 1501년 명이 있다.
후기에 해당되는 불상 중에는 역시 수종사의 탑에서 나온 20여 구의 소형 금동불상들 중에 1628년에 봉안된 상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무량사(無量寺)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좌상의 복장에도 1633년에 해당되는 명문이 있어 17세기 전반기 불상 양식의 대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양식적 특징은 대부분 불신의 비례에서 머리 부분이 크고 신체의 묘사도 형식적이다. 그리고 조각 기법도 뒤떨어져 투박한 조형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밖에 우수한 목각불탱(木刻佛幀)도 몇 예가 남아 있어 불전(佛殿)의 불화 대신 벽에 걸고 예배한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남장사 보광전 목각탱(보물, 1987년 지정)과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1987년 지정) ·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관계문서(보물, 1973년 지정)을 들 수 있다. 1682년작 용문사 목각탱과 1782년작 실상사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1965년 지정)는 제작 연대가 밝혀진 예로서 주목된다.
조선시대는 불상의 양식이 전대에 비하여 조형적인 아름다움, 종교적 정신성의 표현 등이 훨씬 뒤떨어져 예술성에서는 퇴보되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특징 있는 조선시대의 불상 양식이 형성되어서 현대에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