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굴불사지 석조 사면불상 ( )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서면 불상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서면 불상
조각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 굴불사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면석 불상. 보물.
내용 요약

경주 굴불사지 석조 사면불상은 경상북도 경주시 굴불사 터에 있는 통일신라의 사면불상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커다란 바위 4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서쪽 면의 아미타삼존불을 중심으로 동쪽 면은 약사불이 새겨져 있다. 남쪽 면은 보살입상과 불상이, 북쪽 면은 2개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 조각군 중에서 서쪽 면의 삼존불상이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동서남북에 불상을 조각한 것은 사방정토를 상징한 것으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이다. 이 사면불상은 사면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굴불사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면석 불상. 보물.
개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3.5m의 커다란 바위 사면(四面)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사면불상이다. 이 사면불상은 서쪽 면은 아미타삼존불, 동쪽 면은 약사불, 남쪽 면은 양각의 보살입상과 음각의 불입상, 북쪽 면은 양각의 불입상 2구가 새겨져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조(四佛山掘佛山萬佛山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재위 742∼765년)이 백률사(柏栗寺)에 행차하여 산 밑에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하였더니 큰 돌이 나왔다. 그 돌 사면에는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어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掘佛寺)라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굴석사라 한다.” 이 상이 바로 굴불사의 불상이다.

내용 및 특징

이 사면불상은 서면의 삼존상을 중심으로 사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서쪽 면의 상은 양협시보살은 별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본존은 머리 부분만 따로 조성하여 바위 면에 조각된 몸 위에 얹어 놓았다. 몇몇 상들의 두부가 파손되었으며, 북쪽 면의 향 좌측상은 있었던 흔적만 남아있고, 상 자체는 결실된 상태이다.

동쪽 면의 불상은 보주를 들고 있으며, 북쪽 면의 우측상은 그 도상을 명확하게 볼 수 없으나 다면다비(多面多臂)의 보살상이 얕게 선각되어 있으며, 그 옆은 존명을 확인할 수 없는 불입상이 위치한다.

남쪽 면은 불입상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보살상이 있었던 삼존불로 추정되나 우측 보살상이 결실되어 있다. 현재는 두부가 모두 파손된 여래입상 한 구와, 보살입상 한 구가 위치한다.

동서남북 4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四方淨土)를 상징한 것으로, 대승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로 보인다. 불교 경전이나 불상에 나타나는 사방불의 명칭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이 불상의 경우 어느 특정 경전에 의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당시의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모시던 불상들을 배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면석불의 서면은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두부가 파손되었지만, 왼쪽의 보살입상의 보관에서 화불(化佛)이 확인되고 있어 서방(西方) 극락세계(極樂世界)를 관장하는 아미타삼존불로 여겨진다. 또한 동쪽 면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약사불, 남쪽 면의 불상은 석가삼존불로 추정된다.

북면에는 두 개의 보살상이 있는데, 왼쪽에는 선각(線刻)으로 표현된 십일면의 얼굴과 여섯 개의 손이 달린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의 관음보살이 있다. 오른쪽에는 부조(浮彫)로 표현된 보살상이 있는데, 형태상의 특징은 없으나 보살 중 장차 부처가 될 미륵보살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들 사면불상들의 표현 양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서면의 아미타불상은 다른 불상들보다 크며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리는 별개의 돌로 조각하여 얹었으며, 오른손은 떨어져 나갔다. 법의는 양어깨에 걸쳤고, 앞에는 U자형의 주름이 계단식으로 조각되었는데, 표현이 조금 딱딱하게 되어 있다.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둘 다 독립된 돌에 둥글게 조각하였다. 오른쪽 보살의 윗부분은 파괴되었고, 왼쪽 보살은 삼곡(三曲)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유행하며, 불상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나타내고, 균형이 잡힌 신체 비례를 보여 준다.

삼곡 자세의 원류는 인도 굽타시대의 불상에서 시작하는데, 그 양식이 중국의 수(隋)와 당(唐)나라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보살의 몸에는 목걸이와 X자형으로 교차된 달개장식이 있으며, 천의(天衣)나 치마의 표현은 매우 자연스럽고, 본존인 아미타불상보다 더욱 세련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나 2009년 국보로 지정된 칠불암 마애불상군과 비교하여 옷주름이 더 자연스럽고, 손동작이나 삼곡의 자세가 더 유연하게 나타나고 있어 더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 면에 현재 남아 있는 보살상과 불상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형태의 균형도 잘 잡혀 있고 주름이나 몸체의 굴곡 표현이 자연스러우며, 세련된 조각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 두 개의 불상이 모두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었는데 머리 부분과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보살상은 오른손 부분이 없어졌다.

불상의 모습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과 비슷한 형식의 옷주름을 하고 있다. 가는 허리와 도드라진 다리의 윤곽이 더 강조되었고, 주름의 처리가 감산사불상보다는 더욱 간략히 처리되면서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사실감이 더해지면서 신체와 법의가 밀착되어 조화 있게 표현된 것은 8세기 전반기의 통일신라 조각 양식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보살상 또한 넓은 어깨, 가는 허리 등 팔다리의 윤곽선이 강조되고, 천의는 부드러운 주름을 이루면서 늘어졌는데, 좀 투박하고 도식적인 느낌이 있으나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1962년 지정)에 비하면 훨씬 진전된 조각 양식이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를 사선으로 묶은 낙액(絡腋)이 표현되어 있고 천의가 2단으로 감겨 있는 것은 석굴암(8세기 중엽) 감실 보살상에서 보이며, 목걸이의 표현 등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동쪽 면의 약사불상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그릇을 상징하는 보주를 들고 있다. 오른손은 약간 파손되었으나 주1을 취하고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은 수인은 칠불암 사방불 동면과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 광배 뒷면 상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8세기 중반 이후의 대부분의 약사불상들은 대부분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오른손을 무릎위로 올리고 있어서 시무외인을 결한 형식의 약사불상은 초기 형식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북쪽 면의 돋을새김으로 된 보살입상은 높이 틀어 올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손을 든 자세나 천의를 두른 모습이 남면의 보살상과 매우 비슷한 형식이지만, 보존 상태는 별로 좋지 않다. 그 왼쪽에 선각으로 된 보살상은 여섯 개의 손이 있는데, 두 개는 양어깨 위로 올리고, 두 개는 가슴 앞에 모으며, 두 개는 양옆으로 내려진 것이 확인된다.

양쪽 귀 옆으로 보살 2면이 있고, 머리 위에 5면, 그 위에 2면, 맨 위에 1면이 있어, 모두 11면의 얼굴을 가진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을 표현하였다. 이는 관음상의 변화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능력을 발휘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 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사면석불은 대체로 719 · 720년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보다는 더욱 진전된 조각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경덕왕대와 부합됨을 알 수 있다. 발견 당시부터 조각이 이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조각 양식 면에서 보면 경덕왕대, 즉 742∼765년 사이나 그보다 약간 올라가는 시기에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사면 중에서 서쪽 면의 아미타삼존상은 이들 조각군 중에서는 가장 먼저 제작된 불상으로 판단된다. 이 삼존불상은 8세기 후반 일본 불상에서도 나타나는데, 나라현(奈良縣)의 도쇼다이사(唐招提寺)의 목조불상들과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1981년 가을에 이 사면석불의 주위를 발굴하였는데, 이때 서쪽 면과 남쪽 면의 불상대좌가 노출되었다. 서쪽 면의 대좌는 팔각의 내림연꽃받침이 있고, 남면대좌는 이중으로 된 연화대좌가 팔각의 중대(中臺)로 연결된다.

윗부분은 앙련(仰蓮)에 홑꽃잎이고, 밑부분은 복련(覆蓮)에 겹꽃잎의 받침으로 서쪽 면의 불상보다는 복잡하고 장식적이었다.

의의와 평가

기록이 전하는 사면불상으로 사면불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 면의 상들은 인도 굽타시기 조각의 영향을 받은 중국 성당(盛唐) 시기의 사실적인 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8세기 통일신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사면석불의 북쪽 면에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모시던 불상 중에 밀교적 성격을 띠는 불상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참고문헌

「경주굴불사지사면석불(慶州掘佛寺址四面石佛)에 대하여」(김리나, 『진단학보(震檀學報)』 39, 1974)
주석
주1

부처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 주기 위하여 나타내는 형상. 팔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물건을 주는 시늉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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