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은 고려전기 제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49년∼975년이며, 정종이 친동생인 그에게 선위함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956년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했고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도 제정했다. 호족세력의 반발을 철저하게 제압하며 진행된 개혁조치들은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이었다. 특히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시위군졸은 문무 양면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다. 중국 여러 왕조와의 활발한 외교활동과 다양한 국방대책도 치적에 속한다. 불교에도 관심을 기울여 고려의 국사와 왕사 제도를 완성했다.
재위 949년∼975년. 이름은 왕소(王昭), 자는 일화(日華). 아버지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이며 어머니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이다. 정종(定宗)의 친동생으로 그의 선위(禪位)를 받아 왕이 되었다. 비(妃)로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皇甫氏)와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林氏)가 있다.
대목왕후는 광종에게 이복누이가 되는 인물이므로 이들의 혼인관계는 고려왕실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근친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생으로는 경종(景宗) · 효화태자(孝和太子) · 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 · 보화궁부인(寶華宮夫人) · 문덕왕후(文德王后)가 있다. 경화궁부인 역시 광종과는 숙질(叔姪)간이 된다. 부인의 아버지는 고려 제2대 혜종(惠宗)으로 광종과는 이복형제지간이 되기 때문이다.
광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끈기 있고 정력적으로 노력해 큰 성과를 거둔 왕이었다. 광종의 치세는 즉위년∼7년, 7년∼11년, 11년∼26년 등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기에는 왕권강화와 관련된 정책은 시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정세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종(成宗)대에 최승로(崔承老)가 “광종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三代: 중국의 하 · 은 · 주 3대)에 견줄 만하다.”고 격찬할 정도였다. 또한 중국 왕조와도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책을 통해 새 국왕으로서의 지위 및 그 정치기반을 닦아나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시기에는 호족세력의 제거와 왕권강화에 필요한 제도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956년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했고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公服)도 제정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호족세력의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으나 광종은 철저한 탄압을 통해 강행해나갔다. 956년부터 왕권강화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중국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등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쌍기는 후주에서 왕권강화책을 추진한 적이 있는데 이를 광종에게 제시함으로써 고려사회에서도 왕권강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쌍기를 중용한 해에 노비안검법을 세운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시기에 이르면 왕권강화책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호족세력에 대해 과감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960년에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보고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광종은 즉시 이들을 귀양 보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기회를 얻어 충직하고 어진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하는 행태가 벌어졌다고 하였다. 또한 감옥이 항상 가득차서 따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 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왕권안정에 대한 광종의 집념은 매우 강렬해 호족세력은 물론 골육(骨肉)과 친인척에 대한 경계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한번 의심이 가면 살육마저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혜종과 정종의 아들마저도 비명에 죽어 갔다. 958년부터 실시된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시위군졸(侍衛軍卒)은 문무(文武) 양면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반을 배경으로 정적(政敵)들에 대한 과감한 숙청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족세력 등 정치적 적대세력들의 반발도 더욱 거세져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광범위한 세력기반의 구축이 필요해졌다. 963년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해 각종 법회와 재회(齋會)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간 것은 이러한 필요성에서 나온 결과물들이었다. 즉 귀법사의 승려 균여(均如) · 탄문(坦文) 등을 통해 호족세력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을 포섭하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광종은 왕권강화책 외에도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밖으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국방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영역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 가지 시책을 펼쳤다. 968년에는 혜거(惠居)를 국사(國師)로 삼고, 탄문을 왕사(王師)로 삼음으로써 고려 국사 · 왕사제도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광종은 제2대 혜종, 제3대 정종과 여러 면에서 대비되고 있다. 우선 재위기간도 혜종의 2년, 정종의 4년보다도 훨씬 긴 26년이었다. 그리고 혜종과 정종이 각각 박술희(朴述熙)와 왕식렴(王式廉)으로 대표되는 측근의 세력기반에 의지해 왕권을 부지한 반면, 광종은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왕권을 확보하였다. 따라서 광종은 주변세력의 영향력 없이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 결과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왕권을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 광덕(光德)’ · ‘ 준풍(峻豐)’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명명하였으며 만년에 ‘황제(皇帝)’라는 호칭까지 사용하는 것은 모두 그 결과물들이라 할 수 있다.
광종의 노력으로 국가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왕권의 한계성도 함께 노출되었다. 왕권 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는 침투하지 못했고 호족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호족세력에 대한 왕권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었다. 광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한 이후에 나타난 대대적인 반광종운동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광종의 치적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시호는 대성(大成)이며, 능은 헌릉(憲陵: 현재 경기도 개풍군 적유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