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봉은사’라고도 한다. 951년(광종 2)에 태조의 원당(願堂)으로 창건한 국찰이다. 태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곳으로 고려시대의 절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창건 이후 1032년(덕종 1)과 1142년(인종 20)·1180년(명종 10) 등 세 차례에 걸쳐서 중수하였고, 1234년(고종 21)의 몽고병란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로 쓰다가 환도한 뒤 다시 중건하였다.
이 절의 태조 진영을 봉안한 곳은 효사관(孝思觀)이라 하였다가 1373년(공민왕 22)에는 경명전(景命殿)이라 개칭하였다.
태조의 진영을 둔 이 절은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를 올렸다. 1038년(정종 4)에는 정종이 연등행사 때 제일 먼저 이 절에 들렸으며, 1354년에는 천재가 심하였으므로 그 제액(除厄)을 태조 진전에 기도하였다.
1357년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을 때도 이곳에서 점을 쳤으며, 북원(北元)이 토도부카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할 때, 이인임(李仁任) 등 고려의 백관들이 태조 진전에서 반대의 뜻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1389년(공양왕 1)에 우왕과 그 소생 창왕 등을 신돈의 소생이라 하여 폐위시킬 때 고축문(告祝文)을 읽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 이 절에는 홍법(弘法)·도융(圖融)·혜소(慧炤)·지광(智光)·원경(元景)·담진(曇眞)·낙진(樂眞)·보우(普愚) 등 고려시대의 고승들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이름을 빛내었다.
그들은 이 절에서 국사·왕사의 직위를 받았으며, 이곳에 주석하면서 경을 설하고 선(禪)을 논하는 법회를 베품으로써, 이 절은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보우가 이곳에 머물 때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친히 행차하여 정례(頂禮: 이마를 땅에다 대고 가장 공경하는 뜻으로 하는 절)하고 승려 300여 명에게 백포(白布) 2필과 가사(袈裟) 1령씩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퇴락하여, 중기 이후에는 그 위치조차 어딘지 모르게 되었다. 또한 절의 건축구조나 가람 배치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