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는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었던 고려 태조의 원당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951년에 태조의 원당으로 아버지 태조를 위해 세웠다. 951년 무렵에 태조 진전에 태조 왕건 동상이 조성되어 안치되었다. 경내 효사관(공민왕 이후 경명전)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1234년(고종 21)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는 참정 차척의 집을 봉은사로 쓰다가 환도후 중건하였다. 2월 연등회 때와 태조의 기일을 전후로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국사와 왕사의 책봉이 있었으며 중요 고승이 주석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퇴락하였다.
951년(광종 2)에 태조의 원당(願堂)으로 아버지 태조를 위해 봉은사를, 어머니 신명순성왕태후 유씨를 위해 불일사를 세웠다. 951년(광종 2) 무렵에 개경 봉은사 태조 진전(眞殿)에 태조 왕건 동상이 조성되어 안치되었다. 봉은사 태조 진전 그리고 태조 왕건 동상은 고려시대 동안 태조를 상징하는 신성물로 숭배되었다.
창건 이후 1032년(덕종 1)과 1142년(인종 20), 1180년(명종 10)에 중수했다. 1234년(고종 21)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는 참정(參政)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로 쓰다가 환도후 중건하였다.
봉은사 효사관(孝思觀)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태조 진전은 서경의 성용전, 개경 궁궐 내의 경령전(景靈殿, 공민왕 이후 경명전(景命殿)) 궁궐 밖의 효사관이 매우 중요하였다. 고려의 역대 임금이 2월 연등회(燃燈會) 때와 태조의 기일인 5월 27일 전후로 봉은사에 행차하여 행향(行香)하였다. 1038년(정종 4) 2월 연등회 때에 왕이 행차하여 봉은사 태조 진전의 태조상을 알현하고, 연등하는 밤에는 몸소 진전에 분향하기를 상례(常例)로 삼았다. 상원 연등회가 봉은사에서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로 나뉘어 이틀간 설행(設行)되었다. 소회일의 중심 행사는 국왕이 태조 원찰(願刹)인 봉은사로 행차하여 태조 진전에 모셔진 태조 진영을 참배하였으며, 대회일의 중심 행사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베푸는 대연회 의식이었다.
광종대 이후 국사와 왕사의 책봉식은 봉은사 또는 내전(內殿)에서 이루어졌다. 봉은사에서 1032년(덕종 1) 8월에 법경(法鏡)을 국사로, 1047년(문종 1) 6월에 왕사 결응(決凝)을 국사로, 1058년(문종 12) 5월에 해린(海麟)을 국사, 난원(爛圓)을 왕사로, 1114년(예종 9) 3월에 담진(曇眞)을 국사, 낙진(樂眞)을 왕사로 책봉했었다. 그 밖에 중요 고승인 홍법(弘法) · 도융(圖融) · 혜소(慧炤) · 지광(智光) · 원경(元景) · 담진(曇眞) · 낙진(樂眞) · 보우(普愚) 등 봉은사에 주석하였다.
봉은사는 승과 실시나 정치적 현안 등을 처리하였다. 봉은사는 조선시대로 이르면서 점차 퇴락하여, 중기 이후에는 절 터조차 알 수 없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봉은사고태조진전문(奉恩寺告太祖眞前文)」과 「봉은사연등도량문(奉恩寺燃燈道場文)」이 『동국이상국집』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