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한 생애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1020년(현종 11) 왕사(王師), 1032년(덕종 원년) 국사(國師)에 각각 책봉된 사실이 전한다.
아울러 고려 현종(顯宗)이 창건한 개성 현화사(玄化寺) 비(碑)에 의하면, 그가 현화사 초대 주지로 부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1,000여 명의 학도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가 주지를 지냈던 북한산 삼천사(三川寺)에는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가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여러가지 자료로 보아 이 비는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웠던 것이 틀림없으며, 대지(大智)는 그의 시호로 판단된다.
이영간(李靈幹)이 지었다는 이 비는 적어도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는 시기까지 존재하였던 것 같으며, 지난 1964년 학술조사 과정에서 비편(碑片) 74개를 수습한 바 있다. 현화사 초대 주지를 지냈다는 점으로 볼 때 그는 유식학(唯識學)을 연구한 유가종(瑜伽宗) 소속 승려였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