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 ()

불교
인물
일제강점기 때, 친일승 강대련의 명고축출사건을 주도한 승려 · 독립운동가.
이칭
숙해(叔海)
청헌(淸軒), 동고(東皐)
본명
박문성(朴汶星)
이명
박문성(朴文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7년
사망 연도
1997년
본관
밀양
출생지
경상북도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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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친일승 강대련의 명고축출사건을 주도한 승려 · 독립운동가.
개설

대한불교 조계종 감찰원장과 원로회의 명예원로를 지냈다. 경상북도 경주 출생. 11세가 되던 1907년 부친과 함께 통도사 저녁 예불에 참여하였다가 홀연히 무상을 느끼고 이듬해 통도사로 출가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1년 4월 경상도 고성 옥천사(玉泉寺)에서 서응(瑞應)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1917년 양산 통도사(通度寺)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강원을 마친 이후 옥천사 선원에서 수행하다가 1919년 진주 호국사(護國寺)에서 호은(虎隱)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비구계를 받은 이후 그는 한동안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면모를 보여 주었다. 1920년 해인사(海印寺)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김천 수도암(修道庵)으로 피신하였으며, 1922년 친일승 강대련(姜大蓮)의 명고축출사건(鳴鼓逐出事件)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선고를 받았다.

명고축출사건은 강대련의 친일행각에 분노한 젊은 승려들이 강대련의 등에 북을 매달고 두드리며 종로 거리를 행진한 사건으로, 불교계의 항일 의지를 표현한 대표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형을 마치고 나온 이후 1925년 휘문고보를 졸업하였으며 1926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독립운동과 친일승 축출사건의 전력이 문제되어 곧 퇴학당하고 말았다. 이후 지방 사찰에 머물며 참선 수행에 열중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서옹 · 성철 · 청담 등과 함께 수행하였으며 1957년 종단 재무부장에 취임하면서 한동안 종단 행정에도 관여하였다.

특히 1962년 종단 정화대책의원으로 비상종회의원이 되어 정화불사에 앞장섰으며, 1974년 통합종단 감찰원장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1974년 이후부터 일체의 보직을 맡지 않았으며 종단의 공식행사조차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

부산 해운대구 관음정사(觀音精舍)에 있던 거처를 스스로 ‘은둔실(隱遁室)’이라고 하였다는 데서 그의 결연한 의지를 잘 살필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30여 년간 문 밖 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수행 가풍을 존경한 종도들이 1978년 조계종 초대 원로의원으로 추대하였으며, 1994년 원로회의 명예원로로 다시 추대하였다. 1997년 7월 10일, 30여 년간 수행하던 관음정사 은둔실에서 세속 나이 101세 법랍 84세로 입적하였다.

입적 직전에 “석가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어젯밤 꿈이요, 달마가 강을 건너 온 것은 꿈 속의 헛것을 보는 것이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참다운 소식을 묻는다면 금룡 은사가 사람을 죽이고 있는 중이라 하리라(釋迦降生昨夜夢 達磨渡江夢見空 若人問我眞消息 金龍銀蛇殺人中).”는 열반송을 남겼다. 한편 다비식에서는 사리 68과가 수습되어 현재 관음정사에 봉안되어 있다.

참고문헌

『불교신문』(1634호, 16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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