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성은 김(金)씨, 호는 남전(南泉). 휘(諱)는 한규(翰圭)이며 자호는 우두산인(牛頭山人), 백악산인(白岳山人)이다. 경상남도 합천 출생. 아버지는 김병용(金炳鎔),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다.
7세 때 경상북도 안동시 석적면 거문간동 사숙에서 서송재(徐松齋)의 문하생이 되어 사서(四書)와 ≪사략≫, ≪통감≫ 등을 12년간 수학하였는데, 이때 시(詩)와 서(書), 백가(百家) 등의 내용들을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16세 때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을 둘러보고 그를 추모하였다고 하며 1885년(고종 22)해인사신해(信海)에게 나아가 출가하였다. 출가 이후 해인사 백련암에 머무르며 정진하다가 완허 장섭(翫虛仗涉)의 법을 계승하게 되었다.
1887년(고종 24)에는 김천 청암사 세환(世煥)에게서 사집과를 마쳤고, 이듬해 역시 청암사에서 ≪능엄경≫, ≪기신론≫, ≪반야경≫ 등을 수학하였다.
1890년 동화사 내원에서 회응(晦應)에게 사교과를 배웠다. 계속해서 ≪화엄경≫, ≪선문염송≫, ≪전등록≫을 공부해 나가던 그는 이미 이 무렵부터 명필가로 이름을 떨쳤다.
1904년 해인사 주지로 취임한 이후 사찰을 정비해 나가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한편으로 범어사, 오대산 상원선원 등지에서 참선 수행에 몰두하였다.
1908년에는 해인사 금강계단에서 제산(霽山)으로부터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1911년 동래포교소의 포교사, 1912년 범어사 임제종 중앙포교소의 포교사를 각각 역임하였다.
1912년 5월 26일, 당시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에 반대한 불교계 인사들이 모여 ‘조선임제종중앙포교원’을 설립하였는데, 한달 만인 6월 26일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간판을 내리고 말았으며, 이후 새롭게 내건 것이 ‘범어사교당’이었다.
광언은 이 범어사교당에서 한용운(韓龍雲), 박한영(朴漢永),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선풍 진작을 위해 매진하였고, 1921년 10월 선학원을 창건하는 데 있어 도봉(道峰), 석두(石頭), 성월(惺月) 등의 도반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22년 해인사 주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2년여 정진하다가 직지사 조실을 거쳐 통도사 보광전에 머무르며 참선 수행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당대의 고승 경봉(鏡峰)과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다. 193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이 설립될 때 상임이사로 취임하였다.
이 법인의 이사장은 송만공(宋滿空), 부이사장은 방한암(方漢岩)이었다. 1936년 4월 28일 선학원에서 세속 나이 69세, 법랍 54년으로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