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수도 개경에는 원묘로서 경령전(景靈殿)과 효사관(孝思館)이 있었는데 서경에도 원묘를 두었다. 서경의 성용전은 태조의 진영을 봉안한 진전이자 태조의 원묘였다. 태조진전(太祖眞殿), 태조원묘(太祖原廟), 감진전(感眞殿), 어용전(御容殿), 예조묘(藝祖廟) 등으로도 불렸다. 태조에 대한 숭배 시설로서 그 위상에 걸맞게 서경의 궁궐인 장락궁(長樂宮) 내에 있었다.
건립 시기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처음 기록이 1018년(현종 9)에 보인다. 이해 정월에 사신을 서경에 파견하여 성용전에서 태조를 제사하였는데, 태조의 초상을 중신(重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조 초상을 ‘중신’한 것은 성용전이 중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총(鄭摠: 1358~1397)은 「성용전(聖容殿)」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비궁유혁단청고 유상여존곤면신(閟宮有侐丹靑古 遺像如存衮冕新)”이라고 하였다. 이 시에 따르면 성용전은 단청으로 장식한 건물이었으며, 태조의 영정은 곤룡포와 면류관을 쓴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1391년(공양왕 3)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성용전은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다.
고려는 왕실 조상의 숭배를 위해 태묘 이외에 진전사원과 원묘를 두었다. 개경 궁궐 내의 경령전은 태묘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닌 원묘였으며, 태조의 숭배 시설로 서경에 성용전을 두었다. 성용전의 위상과 중요성은 배알(拜謁) 의식에서 잘 드러난다. 고려의 국왕들은 서경에 자주 행차하였는데, 이때 성용전을 참배하였다. 또 서경에서는 개경과 마찬가지로 연등회와 팔관회가 열렸는데, 이때 역시 성용전 참배 의식이 행해졌다. 명종의 경우 1190년(명종 20) 10월에 사신을 서경에 보내 예조묘(藝祖廟)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섭행(攝行)의 경우 국왕은 3품관 이상에 해당하는 고위관료를 보내 의식을 거행토록 했다. 성용전은 개경의 경령전과 같은 위상을 지닌 원묘였다.
성용전은 장락궁 안에 있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서경성 안의 성용전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인종의 명을 받고 파견된 윤첨이 태조의 진영을 서경성 밖으로 가져나오다 죽음을 당하였다. 난을 진압한 김부식은 서경성 경창문으로 들어가 관풍전에서 축하를 받고, 인종에게 전승 보고를 올렸다. 이 글에서 김부식은, “이궁(離宮)의 먼지를 청소하고 원묘의 의관을 우러러보니, 보좌는 완연하고 잉궤(仍几)도 여전하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김부식이 말한 이궁은 곧 장락궁을, 원묘는 성용전을 의미한다. 즉 성용전은 장락궁 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태조 진영은 정총의 시에서 보듯 곤룡포와 면류관의 복식을 한 모습으로 옥좌에 앉은 형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의 서경은 태조 때부터 중시되어 개경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서경에는 태조의 원묘인 성용전이 있었다. 태조 진영을 모신 성용전은 태조 숭배를 위한 매우 중요한 시설로서 국왕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참배하였고,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