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옛 도읍지 평양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
이칭
이칭
서도(西都)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고려 태조 대
공포 시기
고려 태조 대
시행 시기
고려시대
폐지 시기
고려 말
시행처
고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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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서경은 고려시대 옛 도읍지 평양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이다. 태조 때 황폐해진 평양을 복구하고 서경을 설치하였다. 근본의 땅으로 인식되면서 개경과 함께 양경(兩京)을 구성하였다. 역대 국왕이 자주 순행(巡幸)하였으며, 이곳에서 정사를 볼 수 있도록 분사(分司)가 설치되었다. 인종 때 서경의 반란이 진압된 후 그 위상이 하락하여 지방 도시로 정착하였다.

정의
고려시대, 옛 도읍지 평양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
제정 목적

고려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수립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은 고려의 옛 도읍지로서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고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나라를 새운 곳으로 간주되어 그의 궁궐과 무덤, 사당이 수립되었다. 태조(太祖) 왕건은 그 중요성을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강조하였다. 곧 서경이 동국지맥(東國地脈)의 근본임을 말하고 1년에 100일 동안 그곳에 가서 정사를 보도록 한 것이다. 실제 고려 국왕은 수시로 서경에 행차하였고, 서경에는 왕의 정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요 관청의 분사(分司)가 설치되었다.

내용

서경은 고려의 옛 도읍지로서 지방 제도와 권력 구조, 그리고 도참사상(圖讖思想)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태조는 즉위 초부터 서경 경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평양이 황폐한 지 오래되자 이곳에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켰고, 곧이어 서경으로 승격시켰다.

922년(태조 5)에는 행정 기구를 본격적으로 설치하였다. 이 해에 서경의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 관부로 낭관(廊官)을 설치하고, 시중(侍中) 1인, 시랑(侍郎) 2인, 낭중(郎中) 2인, 상사(上舍) 1인, 사(史) 10인의 원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아관(衙官) · 병부(兵府) · 납화부(納貨府) · 진각성(珍閣省) · 내천부(內泉府) 등 서경의 행정 실무를 분담하는 기관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설치된 행정 기구는 고려 분사제도(分司制度)의 시초로 평가될 수 있다.

926년(태조 9)에는 국천부(國泉部)의 관원의 수를 늘렸고, 934년(태조 17)에는 빈객을 접대하는 관택사(官宅司)와 선박 업무를 담당한 도항사(都航司), 마필을 관리하는 대어부(大馭府)를 추가로 두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서경의 관제가 개편되어,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 1인, 부유수(副留守) 1인, 판관(判官) 2인,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 2인, 장서기(掌書記) 1인, 법조(法曹) 1인을 두었다. 이와 같은 서경의 관제는 태조 때에 비해 외견상 뚜렷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으나, 제도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998년(목종 1)에 '호경(鎬京)'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062년(문종 16)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칭하고 경기4도(京畿四道)를 설치하였다. 1116년(예종 11) 분사제도를 한층 더 강화하여 그 체제를 개경(開京)과 같게 하였다. 서경은 이러한 단계를 거쳐 발전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변천 사항

인종(仁宗) 때,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하자, 반란이 진압된 이후 서경은 그 지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 사건으로 서경은 근본지지(根本之地)로서 위상은 줄어들고 반역지지(反逆之地)라는 인식이 부각되었다. 이에 유수(留守) · 감군(監軍) · 분사어사대(分司御史臺)만 그대로 두되 다른 관반(官班)은 모두 없앴다.

1138년(인종 16)에는 서경의 속관으로 의조(儀曹) · 병조(兵曹) · 호조(戶曹) · 창조(倉曹) · 보조(寶曹) · 공조(工曹)를 설치하였고, 팔관도감(八關都監) · 동남면서북면도감(東南面西北面都監) · 제학원(諸學院) · 성용전(聖容殿)에 관원을 두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이전의 분사를 대신하여 토관(土官)을 두는 제도로 전환되는 추세를 반영한다.

또한 서경기(西京畿) 4도는 강동현(江東縣) · 강서현(江西縣) · 중화현(中和縣) · 순화현(順和縣) · 삼화현(三和縣) · 삼등현(三登縣) 등 6개 현령관으로 분리되었다. 이 중 강동 · 강서 · 중화 · 순화는 얼마 후 다시 서경의 속현이 되었다.

이후, 무신정권(武臣政權) 초기,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 타도를 내걸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 다시 한 번 서경에 대한 개편 조치가 있었다. 개편의 핵심은 서경의 행정 기구를 중앙의 직접 통제 아래 두도록 한 것이었다. 이 때 앞서 서경의 속현이 되었던 4현도 모두 현령관으로 독립하였다. 아울러 서경의 팔관회(八關會)는 대신(大臣)을 보내 거행했으나 파견되는 관원의 격도 점차 낮아졌고, 서경은 옛 도읍지로서의 위상을 상당 부분 잃고 지방 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서경은 몽골의 침입으로 해도(海島)에 입보(入保)하였는데, 그 사이 필현보(畢賢甫)홍복원(洪福源)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고, 서경은 황폐한 채 방치되었다.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영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 삼화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여러 관리들을 죽이고 서경 및 그 소관의 여러 성을 가지고 원에 투항하였다. 이에 원은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고 관리를 두어 직접 다스렸다.

1290년(충렬왕 16)에 원은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기고 그 땅을 고려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다시 서경유수관이 설치되었으나 옛날의 지위를 되찾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만호부(萬戶府)를 두었고, 그 뒤 다시 평양부(平壤府)로 개편되었다.

의의 및 평가

서경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로 출발한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었고, 지리도참에서 근본의 땅으로 중시되었다. 또한 고구려 옛 땅의 수복을 내세운 북방 개척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개경과 함께 도읍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점차 지위가 하락하였고, 인종 때와 명종 때 연이은 서경 반란 이후에는 지방 도시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서경의 연혁은 고려에서 북방 개척이 마무리되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약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단행본

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을유문화사, 1948)
하현강, 『한국중세사연구』(일조각, 1988)

논문

김창현, 「고려 서경의 성곽과 궁궐」(『역사와 현실』 41, 한국역사연구회, 2001)
김창현, 「고려 서경의 사원과 불교신앙」(『한국사학보』 20, 고려사학회, 2005)
김창현 「고려 서경의 행정체계와 도시구조」(『한국사연구』 137, 한국사연구회, 2007)
박종덕, 「고려 인종대 서경천도론과 풍수지리사상」(『역사와 세계』 54, 효원사학회, 2018)
윤경진, 「고려 예종대 서경 용언궁 경영과 역사계승의식」(『사림』 76, 수선사학회, 2021)
윤경진 「고려시대 서경기의 형성과 재편: 《고려사》 지리지 연혁의 보정을 중심으로」(『동방학지』 14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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