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건국된 918년(태조 1)에 광평성 · 내봉성(內奉省) · 백서성(白書省) · 창부(倉部) · 병부 · 순군부(徇軍部) 등의 중앙 관부를 두었는데, 이 관부에 낭중이 있었다. 또한 922년(태조 5), 조설(曹設)이라고 하던 서경의 낭관에는 시중(侍中) · 시랑과 더불어 낭중을 두었고, 923년(태조 6)에는 복부경(福府卿)이 재직하고 있었다.
933년(태조 16)에는 병금관(兵禁官)을 두면서 낭중과 사(史)를 각 1인씩 두었고 940년(태조 23) 건립된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江陵普賢寺朗圓大師塔碑)에는 건립의 참여자로 집사낭중(執事郎中) 관육(官育)이 포함되었다.
고려 태조 대의 관제는 태봉에서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적지 않았다. 이 시기에 관서명은 우리 고유 것을 쓰면서도 소속 관직은 시중, 경, 시랑, 낭중, 원외랑 등 당나라 제도의 명칭을 사용하는 등 고려와 중국의 제도를 혼용하였다.
각 관서에 낭중은 있지만 장관은 시중이 되기도 하고 경이 되기도 하는 등 체계적이지 않았다. 이후 성종 초에 이르러 중국 당제를 도입하면서 6부를 대신하여 선관(選官), 병관(兵官), 민관(民官), 예관(禮官), 형관(刑官), 공관(工官) 등 6관에 어사(御事), 시랑 등과 더불어 낭중을 두었다. 백관지는 국초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종 말부터는 6관이 이부 · 병부 · 호부 · 형부 · 예부 · 공부 등의 6부로 바뀌고 장관은 상서가 되었지만 낭중은 그대로였다. 문종 대 관제에서 6부에 각 2인의 낭중을 두었고, 품계는 정5품 참상직이었으며, 녹봉액은 문종록제와 인종록제에서 모두 120석이었다.
낭중이 맡은 임무는 6부의 상관인 상서와 시랑을 보좌하는 일이었다. 한편, 이부에 소속된 고공사(考功司)와 형부의 아래에 있던 도관(都官)에도 낭중이 2인 있었는데, 품계는 정5품이었으나 관서의 장관이었다.
한편 낭중은 무반의 중랑장과 더불어 5품 이상에게 음서 특혜를 주는 기준 관직으로 기능하였다. 6부 등에 소속된 낭중은 1275년(충렬왕 1)에 관제가 격하되었다. 부(部)가 사(司)로 바뀌고 낭중은 정랑으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 문종 대의 관제를 회복하자, 다시 낭중이 되었으며 1369년(공민왕 19)에는 직랑(直郞)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낭중은 고려 초에 태봉의 관제를 계승하여 중앙과 서경의 여러 관서에 설치되었다. 관서의 명칭은 고유한 것인데 반해, 소속 관직명인 시중 · 경 · 시랑 등 중국의 것을 사용한 것은 고려와 중국의 제도가 혼합되어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성종 대 이후 당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관제를 운용하기 시작하면서 6부와 고공사 · 도관 등은 관서명뿐만 아니라 소속 관직명도 거의 그대로 사용하였다. 다만, 낭중이 문반 관인 음서의 최하 기준이 되었던 것은 고려의 독자적인 운영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