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중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광평성 · 병부 · 서경 낭관(廊官) ·6부 · 고공사 등에 설치된 정5품 관직.
이칭
이칭
정랑, 직랑
제도/관직
설치 시기
고려 전기
폐지 시기
고려 말기
소속
육부, 고공사, 도관
내용 요약

낭중은 고려시대에 광평성 · 병부 · 서경 낭관(廊官) · 6부 · 고공사 등에 설치된 정5품 관직이다. 고려 초에 태봉을 계승한 관제로서 중앙과 서경의 여러 관서에 설치되었다. 성종 대 이후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관제를 운용하기 시작하였는데, 6부와 고공사 · 도관 등은 관서명뿐만 아니라 소속 관직명도 거의 그대로 사용하였다. 다만, 낭중이 문반 관인 음서의 최하 기준이 되었던 것은 고려의 독자적인 운영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의
고려시대, 광평성 · 병부 · 서경 낭관(廊官) ·6부 · 고공사 등에 설치된 정5품 관직.
설치 목적

고려시대에 중앙 관서와 서경 주5에 설치된 광평성(廣評省) · 병부(兵部) · 서경 낭관(廊官) · 6부 · 고공사 등에 장관과 차관 다음 가는 관직으로 설치되었다.

임무와 직능

중국의 관제에서 유래한 관직명으로, 고려 초부터 수용되어 문종 대에 관제에 포함되었다. 이 관직은 각 관서에서 시랑(侍郞) · 원외랑 등과 함께 소위 낭관층(郎官層)을 이루었으며, 장관의 일을 보좌하며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고공사와 도관에 소속된 낭중은 관서의 최고 관직이어서 장관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변천사항

고려가 건국된 918년(태조 1)에 광평성 · 주1 · 주2 · 창부(倉部) · 병부 · 순군부(徇軍部) 등의 중앙 관부를 두었는데, 이 관부에 낭중이 있었다. 또한 922년(태조 5), 조설(曹設)이라고 하던 서경의 낭관에는 시중(侍中) · 시랑과 더불어 낭중을 두었고, 923년(태조 6)에는 복부경(福府卿)이 재직하고 있었다.

933년(태조 16)에는 주6을 두면서 낭중과 사(史)를 각 1인씩 두었고 940년(태조 23) 건립된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江陵普賢寺朗圓大師塔碑)에는 건립의 참여자로 집사낭중(執事郎中) 관육(官育)이 포함되었다.

고려 태조 대의 관제는 태봉에서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적지 않았다. 이 시기에 관서명은 우리 고유 것을 쓰면서도 소속 관직은 시중, 경, 시랑, 낭중, 원외랑 등 당나라 제도의 명칭을 사용하는 등 고려와 중국의 제도를 혼용하였다.

각 관서에 낭중은 있지만 장관은 시중이 되기도 하고 이 되기도 하는 등 체계적이지 않았다. 이후 성종 초에 이르러 중국 당제를 도입하면서 6부를 대신하여 선관(選官), 병관(兵官), 민관(民官), 예관(禮官), 형관(刑官), 공관(工官) 등 6관에 어사(御事), 시랑 등과 더불어 낭중을 두었다. 백관지는 국초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종 말부터는 6관이 이부 · 병부 · 호부 · 형부 · 예부 · 공부 등의 6부로 바뀌고 장관은 상서가 되었지만 낭중은 그대로였다. 문종 대 관제에서 6부에 각 2인의 낭중을 두었고, 품계는 정5품 참상직이었으며, 녹봉액은 문종록제와 인종록제에서 모두 120석이었다.

낭중이 맡은 임무는 6부의 상관인 상서와 시랑을 보좌하는 일이었다. 한편, 이부에 소속된 고공사(考功司)와 형부의 아래에 있던 도관(都官)에도 낭중이 2인 있었는데, 품계는 정5품이었으나 관서의 장관이었다.

한편 낭중은 무반의 중랑장과 더불어 5품 이상에게 주3 특혜를 주는 기준 관직으로 기능하였다. 6부 등에 소속된 낭중은 1275년(충렬왕 1)에 관제가 격하되었다. 부(部)가 사(司)로 바뀌고 낭중은 정랑으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 문종 대의 관제를 회복하자, 다시 낭중이 되었으며 1369년(공민왕 19)에는 주4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의의 및 평가

낭중은 고려 초에 태봉의 관제를 계승하여 중앙과 서경의 여러 관서에 설치되었다. 관서의 명칭은 고유한 것인데 반해, 소속 관직명인 시중 · 경 · 시랑 등 중국의 것을 사용한 것은 고려와 중국의 제도가 혼합되어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성종 대 이후 당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관제를 운용하기 시작하면서 6부와 고공사 · 도관 등은 관서명뿐만 아니라 소속 관직명도 거의 그대로 사용하였다. 다만, 낭중이 문반 관인 음서의 최하 기준이 되었던 것은 고려의 독자적인 운영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박용운, 『고려사 백관지 역주』(신서원, 2009)
박용운, 『고려시대 상서성 연구』(경인문화사, 2000)

논문

김갑동, 「고려태조 초기의 중앙관부와 지배세력: 태조 원년 6월 신유 조를 중심으로」(『사학연구』 71, 한국사학회, 2003)
강옥엽, 「고려시대의 서경제도」(『국사관논총』 92, 국사편찬위원회, 2000)
하현강, 「고려서경의 행정구조」(『한국사연구』 5, 한국사연구회, 1970; 『한국중세사연구』, 일조각, 1988)
변태섭, 「고려초기의 정치제도」(『한우근정년기념 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1)
변태섭, 「고려시대 중앙정치기구의 행정체계: 상서성 기구를 중심으로」(『역사학보』 47, 역사학회, 1970; 『고려정치제도사연구』, 일조각, 1971)
주석
주1

태봉(泰封)에서, 내무(內務)와 백관(百官)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 고려의 상서도성에 해당한다.    우리말샘

주2

고려 초기에, 국가 문서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중앙 기관.    우리말샘

주3

고려ㆍ조선 시대에, 공신이나 전ㆍ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우리말샘

주4

고려 시대에, 선부(選部)ㆍ총부(摠部)ㆍ민부(民部)ㆍ언부(讞部)에 둔 정오품 벼슬. 충렬왕 34년(1308)에 낭중(郎中)을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5

고려 시대에, 기본 관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일정한 인원이나 기능을 분리하여 따로 둔 분관청. 개경의 관아를 서경에도 나누어 설치한 것이다.    바로가기

주6

고려 초기, 융사(戎事)를 맡아보던 관아. 태조(太祖) 16년(933)에 설치하여 관원으로 낭중(郞中)·사(史) 1인씩을 두었다가 뒤에 폐하였다.    바로가기

집필자
이진한(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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