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卿)은 고려 초부터 문종 대의 관제에 이르기까지 중앙과 서경의 주요 관서의 운영을 위해 설치하였다.
경은 고려시대 중앙과 서경 분사의 관직명이다. 중국 고대에 공(公)보다 낮고, 대부(大夫)보다 높은 신분의 명칭 또는 그에 드는 사람들을 의미하였으나, 후대에는 관직명으로 변화하여 당나라에서는 시(寺)의 장관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제도를 참용하여 관제를 만든 고려에서도 경은 여러 관서의 장관급 관직으로 배치되었다.
고려를 건국한 직후 918년(태조 1)에 시행한 인사에서 순군부경(徇軍部卿) · 내봉경(內奉卿) · 병부경(兵部卿) · 창부경(倉部卿) · 백서성경(白書省卿) · 도항사경(都航司卿) · 물장경(物藏卿) · 내군경(內軍卿) 등이 광평시중(廣評侍中) · 내봉령(內奉令) · 순군부령(徇軍部令) 다음에 열거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 관서의 경들은 광평시중과 같은 재상의 다음가는 관직이었으며, 이들에게 사무에 숙달하다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볼 때 중앙의 실무 부서를 책임지는 자들이었다고 추정된다.
한편, 922년(태조 5) 서경에 여러 관서와 관원을 두었는데, 아관(衙官) · 병부(兵部) · 납화부(納貨府) · 진각성(珍閣省) · 내천부(內泉府) 등에 장관 또는 차관으로 경이 1, 2인이 있었다. 그리고 960년(광종 11)에 정해진 공복(公服) 규정에서도 단삼(丹衫)은 중단경(中壇卿) 이상, 비삼(緋衫)은 도항경(都航卿) 이상이라고 하여 관인의 계층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으며, 이는 976년(경종 1)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에도 반영되었다.
성종 대 이후 국초의 관제를 대신하여 당의 관서 및 관직 명칭을 본받아 쓰게 되면서 경은 위위시 · 대복시(大僕寺) · 대부시(大府寺) 등 여러 시와 예빈성에 경을 두었다. 문종 대에 관질을 종3품으로 하였고, 각 관서의 정원은 1인이었으며, 문종록제와 인종록제에서 녹봉은 233석 5두였다. 경보다 상위에 정3품 판사가 있었으나 고려 전기에는 특별한 경우에 한정될 만큼 임명 사례가 적어서 사실상 경이 관서의 장관 역할을 하였다.
경은 의례에서 칠시 · 삼감 · 판사 · 경 · 감(七寺三監判事卿監)으로 통칭되는 바와 같이 품계 · 전시 · 녹봉액이 같은 비서성 · 전중성 등의 감(監)과 더불어 종3품 관직을 대표하였다. 경은 과거를 주관하는 동지공거에 보임될 수 있는 자리였으며, 때로는 추밀과 함께 제수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1275년(충렬왕 1)에 관제를 새로 정하면서 경의 명칭이 바뀌었는데, 태상경(太常卿)은 전의령(典儀令), 위위경은 위위윤(衛尉尹), 대복경은 사복정(司僕正)이 되어 관서 명칭의 변화와 더불어 영(令) · 윤(尹) · 정(正) 등으로 경의 명칭 분화가 일어났다. 이후 1356년(공민왕 5)에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책의 일환에 따라 문종 때의 관제로 되돌아가면서 경이 다시 사용되었으나 1362년 이후 다시 영 · 윤 · 정으로 환원되었다.
고려시대 관제는 국초에 당나라 태종의 정치제도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다가, 성종 대를 기점으로 당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제도로 바뀌고 문종 대에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진다. 경은 국초에는 중앙 관서와 서경 분사의 장차관급 관직으로, 문종 때에는 시(寺)의 장관으로 기능을 하였다.
전자는 관서의 명칭은 고유의 것이고, 그 소속 관직은 당제의 명칭을 썼는데, 문종 대 관제에서는 관서와 관직명이 모두 당제를 따랐다. 그러나 문종 대 관제에서도 관원의 품계와 문종록제의 녹봉액은 당제와 차이가 있으며, 관직의 반차를 녹봉액으로 나타내는 방식은 당제와 달랐다는 점에서 고유한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