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서문하성 낭사의 최고 관직인 좌우산기상시 등과 더불어 국왕의 정사에 대해 간언하는 간쟁(諫諍)과 부당한 조칙을 바로잡는 봉박(封駁), 신법의 제정과 관인의 임명에 동의하는 서경(署經) 등을 주요 임무로 하였다.
중서문하성의 전신인 내사문하성의 기거랑(起居郞) 등 낭사의 관원이 성종 대부터 보인다. 기거주는 현종 대에 임명한 사례가 있으나 998년(목종 1)에 제정된 개정전시과의 제10과 전지 55결, 시지 30결을 받는 관직에 기거사인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성종 대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종 대 관제에서 기거사인의 품계는 종5품으로 정해지고, 정원은 1인을 두었다. 기거사인은 청빈함이 요구되는 관직인 청요직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문종 대와 인종 대의 녹봉제도에서 정5품인 낭중과 같은 120석을 받을 정도로 우대를 받았다.
이후 1116년(예종 11)에 같은 관서의 같은 품계인 기거랑 · 기거주(起居注)가 본품항두가 되었는데, 기거사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충렬왕 대 이후 고려의 관제가 바뀌면서 기거사인은 기거주 · 기거랑과 더불어 폐지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문종 대 관제를 복구하면서 다시 설치되었고 품계를 정5품으로 높였다.
기거사인의 임무인 간쟁, 봉박, 서경 등은 모두 국왕의 권한을 견제하는 일이었으며, 간관은 위로부터 좌우산기상시, 직문하성, 좌우간의대부, 급사중, 중서사인, 기거랑, 기거사인, 기거주, 좌우보궐, 좌우습유 등 10명이 넘는 큰 규모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기거사인 등은 낭사에 속하는 다른 관원들과 함께 직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국왕권의 자의적 행사를 제약할 수 있었으며, 정치적 영향력도 컸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