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신은 고려시대 국왕을 보좌하여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했던 중서문하성의 재상이다. 중서문하성의 상급 관료인 중서령·문하시중·평장사·참지정사·정당문학·지문하성사를 말한다. 중서문하성은 재신과 낭사로 구별되어 재신의 공간은 재부(宰府), 낭사의 공간은 간원(諫院)으로 불렸다. 재신은 조직상 중서성 소속과 문하성 소속으로 구분되었으나 실제로는 중서문하성의 관료로 운영되었다. 신료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하며 6부 판사를 겸직하여 해당 관부의 업무를 관할했다. 업무를 수행한 대가로 전시과와 녹봉을 받았다.
재신(宰臣)은 국왕이 국정을 이끌어 가는 것을 보좌하는 신료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하며 6부(六部) 판사(判事)를 겸직하여 해당 관부의 업무를 관할하도록 할 목적으로 제정하였다.
재신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소속이므로 성재(省宰)라고도 했다. 중추원(中樞院)의 추밀(樞密)을 재신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중서문하성의 재신은 진재(眞宰)로 불러 추밀과 구분하였다.
중서문하성의 재신은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하며 6부 판사가 되어 해당 관부의 업무를 관할하는 기능을 하였다.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방식은 다양하였다. 국왕의 자문을 받아 국정을 논의하거나, 정사당(政事堂)에서 논의한 내용을 국왕에게 아뢰는 방식으로 국왕을 보좌하였다. 중추원의 추밀과 함께 재추(宰樞) 또는 양부재상(兩府宰相)으로 불리며 국왕의 자문을 받기도 하였고, 국왕이 다양한 범주의 군신(群臣)에게 국정을 자문하는 경우에도 재신은 추밀과 함께 회의를 이끌어 갔다. 또한 재신과 추밀은 대외적인 국방과 군사 문제를 논의하는 도병마사(都兵馬使)와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의 문제를 논의하는 식목도감(式目都監)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회의체들은 고려의 국정 운영이 합의제의 방식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재신은 회의와 합의의 중심에서 국왕을 보좌하는 존재였다.
재신은 상서6부(尙書六部)의 판사를 겸직하여 해당 관부의 업무를 관할하였다. 대체로 6부의 서열에 따라 수상(首相)인 문하시중이 이부(吏部), 아상(亞相)인 중서시랑평장사가 병부(兵部), 문하시랑평장사가 호부(戶部), 중서평장사가 형부(刑部), 문하평장사가 예부(禮部), 참지정사가 공부(工部)의 판사를 겸직하는 식이었다. 6부 판사 제도는 재신이 6부 판사를 겸하도록 만든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정당문학 · 지문하성사와 같이 6부 판사를 겸하지 않는 재신도 있어서 재신이 6부 판사를 모두 겸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형부와 공부의 판사는 임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6부 판사에 임명되면 해당 관부만 관할한 것이므로 재신이 6부 전체를 장악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재신의 관직 중에도 겸직으로 운영되는 것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중서령(中書令) · 문하시중(門下侍中)은 본직으로, 평장사(平章事)도 본직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의 형태로 운영되었던 반면, 참지정사(參知政事) · 정당문학(政堂文學) ·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는 복야(僕射)나 상서(尙書)의 겸직으로 운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재신은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전시과(田柴科)와 녹봉(祿俸)을 받았다. 문종(文宗) 30년(1076) 제도를 기준으로 전시과는 중서령 · 문하시중은 제1과 전(田) 100결(結), 시(柴) 50결, 문하시랑 · 중서시랑은 제2과 전 90결, 시 45결, 참지정사는 제3과 전 85결, 시 40결을 받았다. 녹봉은 중서령 · 문하시중은 400석, 중서시랑 · 문하시랑은 336석 10두, 참지정사는 353석 5두를 받았다. 이를 보면 재신 중에 중서령 · 문하시중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시랑(평장사) · 참지정사는 전시과와 녹봉을 받았는데, 정당문학 · 지문하성사는 받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는 건국 초에 광평시중(廣評侍中) · 내봉령(內奉令) · 내의령(內議令) 등의 재신을 두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일반적으로 운영된 재신은 982년(성종 1) 중국 제도를 수용하여 설치한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의 상급 관료인 내사령(內史令) · 문하시중 ·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 문하시랑평장사 · 참지정사 등이었다. 1061년(문종 15) 내사문하성을 중서문하성으로 개칭하고, 중서령(종1품) 1인, 문하시중(종1품) 1인, 문하시랑평장사(정2품) 1인, 중서시랑평장사(정2품) 1인, 참지정사(종2품) 1인, 정당문학(종2품) 1인, 지문하성사(종2품) 1인을 두었다.
중서문하성은 2품 이상의 상급 관료인 재신, 3품에서 6품까지의 중급 관료인 낭사(郎舍), 사무를 담당한 7품의 하급 관료로 구성되어 있었다. 재신과 낭사는 중서문하성의 관료로서 함께 업무를 보기도 했지만, 재신은 국정의 중대사에 대한 논의를, 낭사는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을 담당하여 기능의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재신의 공간을 재부(宰府), 낭사의 공간을 간원(諫院)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중서문하성의 재신은 중서성(中書省) 소속의 중서령, 중서시랑평장사와 문하성(門下省) 소속의 문하시중, 문하시랑평장사, 지문하성사, 그리고 양성(兩省)의 소속이 아닌 참지정사, 정당문학으로 구분되는데, 실제로는 중서성과 문하성의 구분 없이 이들 모두 중서문하성의 관료로 운영되었다.
재신 중에 중서령은 인신지극(人臣之極)으로 불리는 관직이지만 종실을 우대하기 위한 명예직으로 수여되거나 신료의 치사직(致仕職)이나 추증직(追贈職)으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문하시중이 실질적인 수상으로 활동하였다. 다만 지위가 높아 임명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평장사가 수상이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에 상서성(尙書省)을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개편하였다. 중서령은 폐지하고 문하시중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시랑평장사를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참지정사를 첨의참리(僉議參理)로, 정당문학을 참문학사(參文學事)로, 지문하성사를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고쳤다.
이후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쳐 1356년(공민왕 5) 다시 중서문하성을 설치하고 중서령 · 문하시중 · 수시중(守侍中)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시랑평장사 ·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 참지정사 · 정당문학 · 지문하성사를 두었다. 1362년(공민왕 11)에 중서문하성을 도첨의부(都僉議府)로 개편하고 영도첨의(領都僉議) · 첨의우정승(僉議右政丞) ·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 · 첨의찬성사 · 첨의평리(僉議平理) ·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로 바꾸었으며, 1369년(공민왕 18)에 도첨의부를 문하부(門下府)로 개편하고 판문하(判門下) ·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를 두었다.
재신은 중국 제도를 수용한 것이나 중서성과 문하성 소속의 구별 없이 중서문하성의 관료로 운영되었다. 중추원의 추밀이 재신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재신은 진재로 불려 추밀과 구별하였다. 신료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하며 6부 판사를 겸직하여 해당 관부의 업무를 관할함으로써 국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