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의 문하시중을 계승한 수상직(首相職)이다. 정원은 좌·우 각 1인이다.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고려의 관제가 격하될 때 중서문하성이 첨의부로 되면서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개칭된 것이다.
고려 전기 이래의 상좌(尙左) 원칙에 따라 좌중찬이 우중찬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1291년에 원나라의 제도에서 영향을 받아 상우(尙右)의 원칙이 채택되면서 우중찬이 상위직으로 수상이 되었다.
1293년에는 첨의부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승격됨에 따라서 도첨의중찬으로 바뀌었지만, 품질(品秩)과 정원은 달라지지 않았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할 때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개칭되었다가, 이 해에 곧 충선왕이 퇴위하고 충렬왕이 복위함에 따라 도첨의중찬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1303년에는 다시 상좌로 좌중찬이 상위직으로 되었다. 1308년에 충선왕이 복위하면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개칭되었으며, 정원도 1인으로 줄어들었다.
1330년(충숙왕 17)에도 충혜왕이 즉위하여 일시 도첨의중찬으로 개칭한 적이 있었지만, 곧 충숙왕이 복위하여 정승으로 환원시켰으며, 이때 정원이 좌·우 각 1인으로 늘어났다. 이후 다시는 중찬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고, 시중과 정승으로 번갈아 개칭되면서 고려 말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