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성종이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수용하면서 중앙과 지방 사이의 문서 전달을 담당하고 국가 행정의 중추 기능을 관장하도록 할 목적으로 상서성을 설치하였다.
상서도성은 중앙관청과 지방관청 사이의 문서 전달을 관장하여 중앙과 지방 사이의 문서 전달은 상서도성을 경유해야 하였다. 예부가 보내는 지방 노인의 연회 개최 공문도 상서도성에서 전달하였다. 상서도성은 문서 행정에서 지방관청에 대해 중앙관청을 대표하는 위상에 있었다. 도성의 청사가 넓었으므로 형벌 논의, 사신 영접, 재계(齋戒), 기우(祈雨), 과거시험 등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일시적으로 경기의 주현을 통할하기도 하였다.
상서육부는 국가 행정의 중추를 담당하였다. 상서이부는 문관의 선발과 공훈자의 책봉을 담당하였으며, 상서병부는 무관 선발 · 군사 행정 · 의장과 호위 · 우역(郵驛)을 담당하였다. 상서호부는 호구(戶口) · 공부(貢賦) · 전량(錢糧)을 관리하였으며, 상서형부는 법률 · 사송(詞訟) · 상언(詳讞)을 관장하였다. 상서예부는 각종 예의(禮儀) · 제향(祭享) · 조회 · 교빙(交聘) · 학교 · 과거를 관장하였으며, 상서공부는 산과 연못 · 공장(工匠) · 영조(營造) 등을 관할하였다.
상서성은 982년(성종 1)에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수용하여 어사도성(御事都省)과 어사육관(御事六官)을 설치한 데서 연원하여 995년(성종 14)에 상서도성과 상서육부의 상하 이중조직으로 개편하면서 성립하였다. 어사도성과 어사육관은 중국 제도를 수용한 것이지만 건국 초기의 관부를 개편한 것이기도 하였다.
『고려사』는 성종 대에 광평성을 어사도성으로 개편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내봉성을 도성으로 보는 『 삼국사기』에 따라 내봉성을 어사도성으로 개편하였다는 견해가 널리 수용되고 있다. 어사육관의 일부는 건국 초기의 병부가 병관으로, 의형대(義刑臺)가 형관으로 개편된 것도 있었으나 육전(六典)의 형식을 갖춘 것은 성종 대였다.
상서성은 당제를 수용한 것이나 고려의 필요에 맞게 운영되었다. 당제와 달리 상서도성은 궁성 내에, 상서육부는 광화문 밖에 위치하여 공간적으로 분리되었다. 상서도성은 좌우사(左右司)로 구성되었으나 아래에 상서육부가 좌우로 엄격하게 배치되지 않았다. 상서육부의 서열도 이부 · 병부 · 호부 · 형부 · 예부 · 공부로 구성되었으며, 속사(屬司)의 숫자도 이부에 고공사(考功司), 형부에 도관(都官)의 2개만 두었다.
관원으로는 문종 대에 상서도성은 상서령(尙書令, 종1품), 좌우 복야(左右僕射, 정2품), 지성사(知省事, 종2품), 좌우승(左右丞, 종3품),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 정5품),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정6품), 도사(都事, 종7품)를 두었고, 상서육부는 판사(判事, 재신겸직), 상서(尙書, 정3품), 지사(知事, 타관겸직), 시랑(侍郞, 정4품), 낭중(郞中, 정5품), 원외랑(員外郞, 정6품)을 두었다.
상서도성의 2품 이상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관원과 비교되었다. 고려의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은 당나라의 3성 제도를 수용한 것이나 이들은 병렬적인 조직이 아니라 상하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 관원의 지위와 위상이 달랐다. 중서문하성의 2품 이상 관원은 종실이나 치사 · 추증으로 지급한 중서령(中書令) 외에는 문하시중 · 평장사(平章事) · 참지정사 · 정당문학 · 지문하성사 등이 모두 재상으로 운영되었으나, 상서도성은 종실에게 지급된 상서령은 물론 실질적인 장관인 복야나 지도성사도 재상이 되지 못하였다.
좌우복야는 정3품인 6부의 상서와 함께 팔좌(八座)로 불리며 재상과는 달리 취급되었다. 복야는 백관의종(百官儀從)의 구사 숫자나 녹봉, 전시(田柴) 등의 특권과 지위로 보아 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양부로 불리며 국가 중대사를 논의한 재추와 달리 재상의 핵심 기능인 국정 논의에 참여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재상으로 보기 어렵다. 중서문하성에는 재상이 있었으나 상서도성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상서도성은 중서문하성보다 지위는 낮았으나 상서도성 아래에 상서육부가 있었다. 그러나 국정 운영에서 상서육부는 중서문하성이나 상서도성을 거치지 않고 국왕과 직접 연결되었다. 국왕이 국가 행정의 중추인 상서육부의 행정을 직접 관할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중서문하성의 재상이 6부판사를 겸직하였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6부판사 제도를 통해 재상이 6부를 장악하였고 왕권은 제약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서육부는 원래 판사가 없는 제도로 설치 · 운영되다가 현종 이후에 판사가 하나둘씩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 문반과 무반의 인사를 담당하던 이부와 병부의 판사는 차츰 수상과 아상(亞相)이 겸하는 관행이 성립하였으나 다른 판사는 설치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6부판사는 정치 행정적인 필요나 관행에 따라 임명된 것이며 재상이 6부를 장악하는 제도는 아니었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상서도성과 상서육부로 구성된 상서성은 몽골 복속기 이후에 크게 변화되었다. 1275년(충렬왕 1)에 상서도성은 중서문하성에 병합되어 첨의부가 되면서 폐지되었고, 상서육부의 행정 업무는 전리사 · 군부사 · 판도사 · 전법사의 4사(四司)로 개편되면서 유지되었다.
1298년(충렬왕 24)에 충선왕이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상서도성의 관부는 복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첨의부에 복야 · 낭중 · 원외랑 · 도사를 두어 별청에서 업무를 보게 하였고, 4사는 전조(銓曹) · 병조(兵曹) · 민조(民曹) · 형조(刑曹) · 의조(儀曹) · 공조(工曹)의 6조로 개편되었다. 충선왕이 퇴위하자 첨의부 소속의 상서도성 관직을 폐지하였고 4사로 바꾸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이 선부(選部) · 민부(民部) · 언부(讞部)로 개편하였다가 다시 4사로 바꾸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반원정치의 일환으로 상서성[상서도성]과 상서육부로 복구하였다. 하지만 1362년(공민왕 11)에 상서성[상서도성]이 폐지되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상서육부의 행정은 유지되어 전리사 · 군부사 · 판도사 · 전법사 · 예의사 · 전공사(典工司)의 6사로 개편하였다. 1369년(공민왕 18)에 선부 · 총부 · 민부 · 이부 · 예부 · 공부의 6부로, 1372년에 6사로, 1389년(공양왕 1)에 이조 · 병조 · 호조 · 형조 · 예조 · 공조의 6조로 개편하였다.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가 국가 대사를 논의하는 최고회의기구이자 정무기구로 운영되면서 6부의 행정 기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육전 중심의 행정체계를 정립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상서도성은 폐지되었어도 6부는 다양한 형태로 유지되었다.
상서성은 고려시기의 행정관부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 관부였다. 상서도성은 상서육부를 행정적으로 장악하지 못하면서 폐지되었으나, 상서육부는 성종이 도입한 이후 일부 변화가 있었지만 조선시기까지 계승되는 국가 행정의 중추 기구였다는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