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이 정사를 처리할 목적으로 설치한 편전을 보평청이라 불렀다.
국왕이 정사를 처리하던 장소를 의미하며, 편전을 가리켰다. 보평청에서 신료들은 업무를 보고하여 국왕의 결재를 받거나 정치의 잘잘못을 건의하였고, 국왕은 신료와 국정을 논의하거나 국정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사신을 영접하거나 옥사를 처결하거나 보평청의 공간을 활용하여 제석도량(帝釋道場)을 열기도 하였다.
보평청은 공민왕 이래로 국왕이 정사를 처리하던 장소를 의미하였다. 정전(正殿)과 편전(便殿)으로 구성된 궁궐에서 보평청은 편전을 가리켰다. 신료가 업무를 보고하는 보평례(報平禮)를 시행하였기에 보평청으로 불렸다. 국왕이 보평청에 행차하면 지신사(知申事)나 승선(承宣)이 의례를 집행하였다.
1370년(공민왕 19)에 공민왕은 보평청에 나가 사관(史官) 2명을 좌우에 배치하고 간관에게 정치의 잘잘못을 건의하도록 요구하였다. 공민왕은 매월 2회 보평청에 나갔으나 그렇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1371년(공민와 20)에는 보평청에 행차하는 날이 아닌 때에도 국가의 대사는 보고하도록 하였다.
1380년(우왕 6), 우왕은 보평례를 행하고 정사를 듣고 명령을 내리며 군국기무를 처결하라는 헌부의 건의를 수용하여 보평청에 나가 재상들과 국정을 논의하였고, 매월 2일과 16일에 중앙관청의 장관에게 업무를 보고하도록 명령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는 예조의 건의로 매번 조회를 마친 후에 보평청에 나가 형조가 아뢰는 옥사를 처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