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성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초기, 백관을 총괄하며 정치를 평의했던 관부.
제도/관청
설치 시기
918년(태조 1)
폐지 시기
982년(성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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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광평성은 고려 초기 백관을 총괄하며 정치를 평의했던 관부이다. 호족 세력을 대변하는 기구라는 견해도 있으나 국왕 휘하의 정부기구로 보고 있다. 광평성은 태조 대에는 최고 관부였으나 광종 대에 내의성이 서열 1위가 되면서 밀려났고, 성종 대에 내의성, 내사령과 함께 내사문하성으로 개편되었다.

정의
고려 초기, 백관을 총괄하며 정치를 평의했던 관부.
설치 목적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에 태봉의 관제를 이어받아 백관을 총괄하면서 정치를 널리 평의하도록 할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기능과 역할

백관을 모두 거느리고 정치를 평의하는 기능을 하였다. 국왕 측근에서 유교적 입장으로 문필을 담당하고 정사를 논의하였던 내의성(內議省)과는 구별되었다. 유력한 호족들의 출사 자리 또는 호족을 대변하는 정책 결정 기관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국왕 휘하에서 정치를 평의하는 공식적인 정부 기구로 보는 견해가 있다. 호족 연합 정권설이 비판을 받으면서 후자의 견해가 지지를 얻고 있다.

변천사항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태조 1)에 관료제를 정비하면서 태봉의 관제를 이어받아 광평성 · 내봉성(內奉省) · 내의성을 근간으로 하는 3성 체제를 갖추었다. 이 중 광평성은 관원으로 시중(侍中) · 시랑(侍郞) · 낭중(郞中) · 원외랑(員外郞) 등을 두었다. 최고의 관부로 설치된 광평성은 광종 때에 내의성에 최고 관부의 자리를 내주었다.

성종 때, 태봉의 구제를 답습한 3성 체제와 중국의 관제를 수용하여 삼성(三省)이 설치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광평성은  982년(성종 1)에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고쳐 3성의 하나가 되고, 995년(성종 14)에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고쳤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내봉성을 고려의 도성(都省)으로 비견하고 있는데, 대개 후자가 수용되고 있다. 광평성은 내의성, 경종 때의 내사령(內史令)과 함께 통합되어 982년(성종 1)에 내사문하성으로 고쳤고, 1061년(문종 15)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개편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논문

김갑동, 「고려 태조 초기의 중앙관부와 지배세력: 태조 원년 6월 신유 조를 중심으로」(『사학연구』 71, 한국사학회, 2003)
변태섭, 「고려초기의 정치제도」(『한우근정년기념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1)
이기백, 「귀족적 통치기구의 정비」(『한국사』 5, 국사편찬위원회, 1975)
이태진, 「고려 재부의 성립: 그 제도사적 고찰」(『역사학보』 56, 역사학회,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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