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는 남송 시대, 유학자 주희가 사대부가에서 시행할 관혼상제에 관한 예를 저술한 예서이다. 주희는 부친상과 모친상을 치르면서 제례와 상례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였고, 이후 관례와 혼례 관련 자료를 추가해 『가례』 초고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초고 상태에서 분실되었다가 주희 사후에 다시 세상에 나와 미비한 부분이 많았다. 고려 말 우리나라에 도입된 『가례』는 조선시대에 폭넓게 활용되고 연구되었으며, 조선시대의 『가례』 연구는 질과 양 모두에서 중국을 능가할 만큼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주희(朱熹: 1130~1200)는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자는 원회(元晦) ·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 회옹(晦翁) · 둔옹(遯翁)이다. 주자(朱子)라는 존칭으로도 불리며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저서로 『사서집주(四書集註)』, 『주역본의계몽(周易本義啓蒙)』, 『근사록(近思錄)』 등이 있다.
『가례(家禮)』는 『주자가례(朱子家禮)』,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라고도 한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는 『가례』를 저술하기까지 오랜 시간 여러 단계를 거쳤다. 1143년 부친상을 당한 그는 사대부가에서 행할 수 있는 예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제례(祭禮)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1169년 모친상을 겪은 후에는 상례(喪禮)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였고, 이후 관례(冠禮)와 혼례(婚禮)로까지 범위를 넓히면서 『가례』의 틀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가례』는 완전히 정리되기 전인 초고 상태에서 분실되었고, 주희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책이 주희의 친작(親作)이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그의 저술로 간주되었다.
『가례』의 간행 과정은 중국과 조선의 경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중국에서는 1211년과 1216년에 「통례」 · 「관례」 · 「혼례」 · 「상례」 · 「제례」 등 5편으로 구성, 간행되었다. 주희의 제자 양복(楊復)은 각 조목 아래 주희의 발언과 경전 및 주석의 내용을 수록한 『가례부주(家禮附註)』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주복(周復)은 양복의 부주를 책의 뒤쪽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가례』를 재편집하고, 1245년에 간행하였다. 이 책이 현전하는 『가례』 중 가장 오래된 송각본(宋刻本)이다. 이 밖에도 양복과 유해손(劉垓孫)의 주석을 수록하고 몇 장의 그림을 덧붙인 『찬도집주문공가례(纂圖集註文公家禮)』가 송대에 간행되어 전한다. 이후 원대(元代)에는 황서절(黃瑞節)이 편찬한 『가례』가 『주자성서(朱子成書)』에 수록되었고, 명대(明代)에는 관련 주석을 집성한 4권짜리 『가례』가 편찬되어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수록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가례』가 도입되었으나, 본격적인 보급은 조선시대에 이루어졌다. 1403년(태종 3)에 『주자성서』본 『가례』가 수입되었지만, 1419년(세종 1) 이후 『성리대전』이 여러 차례 수입, 간행되면서 여기에 수록된 『가례』가 널리 보급, 활용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가례』가 다섯 차례 간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먼저 1563년과 1611년에는 『성리대전』 권18~21권에 수록된 『가례』를 따로 떼어낸 『가례대전(家禮大全)』[4권]이 간행, 보급되었다. 1658년에는 삼척부(三陟府)와 경성부(鏡城府) 등지에서 『가례』가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특징은 기존의 4권 체제를 7권으로 확대 편성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조선에서 간행된 모든 『가례』는 7권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1726년(병오년) 함경감영(咸鏡監營)에서 조선시대 예학자들의 견해를 반영한 두주(頭註)가 달린 『가례』가 간행되었고, 1759년(기묘년)에는 그간의 성과를 모두 반영한 『가례』가 주1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가례』는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내용을 사대부가에서 준행할 수 있도록 편찬한 예서이다. 본문은 통례(通禮) 43조목, 관례 30조목, 혼례 38조목, 상례 221조목, 제례 72조목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각 조목 아래 본주와 부주가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책머리에는 서문과 『가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가례도(家禮圖)」가 실려 있다.
‘집안의 예’를 뜻하는 가례(家禮)는 ‘국가 단위의 예’를 뜻하는 방국례(邦國禮)의 상대 개념이다. 따라서 『가례』는 사대부가에서 사당(祠堂)을 중심으로 관혼상제를 행하는 예법을 다룬다. 사대부 계층의 가례는 후한(後漢) 이후 등장해 육조(六朝) 시대에는 ‘서의(書儀)’로 변형되며, 일종의 도덕 규범서 또는 의례서로 자리 잡았다. 사마광(司馬光)의 『사마씨서의(司馬氏書儀)』가 대표적인 예이며, 주희의 『가례』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저술된 대표적인 가례서이다.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도입된 『가례』는 조선시대에 사대부가에서 예를 시행하는 표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예학이 『가례』를 중심으로 폭넓고 깊이 있게 발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가례』 관련 연구는 초기에는 올바른 이해를 위한 해석 단계에서 출발해, 점차 미비점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단계로 나아갔으며, 이후 조선 사회 현실에 부합하는 『가례』를 정립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