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 ()

목차
관련 정보
고대사
지명
후삼국 시대, 궁예가 세운 나라의 이름.
지명/고지명
제정 시기
911년
폐지 시기
918년 6월
내용 요약

태봉은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세운 나라의 이름이다. 궁예는 901년에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내세우고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면서 왕을 자칭하였고, 904년에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꾸었다가 911년에 태봉으로 고쳤다. 궁예는 이때 연호도 수덕만세로 고쳤다가 914년에 다시 정개로 바꾸었으며,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미륵관심법을 내세워 정적들을 제거하는 등 미륵신앙에 근거한 신정적 전제 정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신정적 전제 정치는 심각한 민심 이반을 불러왔다. 그 결과, 태봉은 왕건의 정변으로 결국 멸망하였다.

목차
정의
후삼국 시대, 궁예가 세운 나라의 이름.
내 용

궁예는 901년에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내세우고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면서 왕을 자칭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904년에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바꾸었다가 911년에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태봉이라는 나라 이름은 그 후 궁예가 왕건에 의해 제거되면서 918년 6월에 몰락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 왕실의 정권 다툼으로 희생된 왕족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세달사(世達寺)의 승려로 숨어 지내다가 891년(진성여왕 5)에 죽주(竹州: 지금의 경기도 안성 죽산 일대)의 호족(豪族)인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그러나 기훤에게 환대받지 못했던 궁예는 892년(진성여왕 6)에 기훤의 부하로 있던 원회(元會) · 신훤(申煊) 등과 함께 다시 북원(北原: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원주 일대)의 호족인 양길(梁吉)에게 투항하였다. 여기에서 궁예는 양길에게 크게 발탁되어 좌장(佐將)이 되었고,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 일대) 관내와 그 인근의 군현 10여 곳에서 항복을 받으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후, 궁예는 894년(진성여왕 8)에 명주로 진출하면서 장군(將軍)에 추대되고 자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양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명주를 떠나서 강원도 북부 지역으로 북상하면서 군현(郡縣) 10여 곳을 점령하였고, 895년(진성여왕 9)에는 철원(鐵圓)에 도읍을 정하고 내외의 관직까지 설치하면서 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896년(진성여왕 10)에는 송악군(松嶽郡: 지금의 개성)의 대호족인 용건(龍建)과 왕건(王建) 부자가 귀부하면서 패서도(浿西道)와 한산주(漢山州)까지 장악하였고, 2년 뒤인 898년(효공왕 2)에는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는 송악에서 왕건의 도움을 받아 양길과 맞서 싸웠다. 그리하여 900년(효공왕 4)에는 양길 세력을 격파하고 강원도와 경기도뿐만 아니라 황해도 · 충청도 지역까지 장악한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901년(효공왕 5)부터 본격적으로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내세우고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면서 왕을 자칭하였다. 『 삼국유사』 왕력(王曆)에는 궁예가 이때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 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점에 주목한 연구자들은 대체로 ‘후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궁예는 904년(효공왕 8)에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고치면서 연호무태(武泰)라고 하였다. 그는 이 해에 청주인(靑州人) 1,000호(戶)을 철원(鐵圓)으로 옮겼으며, 이듬해인 905년에는 철원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고 연호도 성책(E0029637)으로 고쳤다. 이것은 궁예가 청주 세력을 끌어들여 왕건으로 대표되는 송악 세력을 견제하고 나아가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강화하려는 조치였다고 이해된다.

궁예는 이때 중앙에 최고 관부로서 광평성(廣平省)을 설치하여 광치나(匡治奈: 고려의 시중) · 서사(徐事: 고려의 시랑) · 외서(外書: 고려의 원외랑)의 벼슬을 두었다. 그 아래에 병부(兵部) · 대룡부(大龍部) · 수춘부(壽春部) · 봉빈부(奉賓部) · 의형대(義刑臺) · 납화부(納貨府) · 조위부(調位部) · 내봉성(內奉省) · 금서성(禁書省) · 남상단(南廂壇) · 수단(水壇) · 원봉성(元鳳省) · 비룡성(飛龍省) · 물장성(物藏省) 등을 설치하여 국사를 각각 분장하도록 하였다. 그 밖에 역어(譯語)를 장악한 사대(史臺), 과수(菓樹)를 심고 기르는 일을 관장한 식화부(植貨府), 성황(城隍)의 수리를 맡는 장선부(障繕府), 기물(器物)을 만드는 주도성(珠淘省)도 설치하였다.

또한 궁예는 904년에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꾼 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州縣)을 차지하고 공주 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의 항복을 받았다. 905년(효공왕 9)에는 앞서 항복해 온 패강진(浿江鎭)의 10여 주현을 패서(浿西) 13진으로 나누어 정비하고 평양 성주 장군(平壤城主將軍) 검용(黔用)과 증성(甑城: 지금의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 일대)의 호족인 명귀(明貴)의 항복을 받았으며, 신라의 변방 고을인 죽령(竹嶺) 동북쪽을 공략하였다.

906년(효공왕 10)에는 왕건을 보내어 상주 사화진(沙火鎭)에서 견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909년(효공왕 13) 이후에는 왕건을 보내어 광주(光州) 염해현(鹽海縣)에서 오월(吳越)로 들어가는 후백제의 배를 사로잡은 뒤 진도군(珍島郡)과 고이도(皐夷島)의 항복까지 받았으며, 나주에서 다시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고 나아가 갈초도(葛草島: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 일대의 섬)에서 압해현(壓海縣: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 일대)의 적수(賊帥) 능창(能昌)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궁예는 이처럼 세력을 넓혀가면서 마진 시기에 이미 삼한(三韓)의 영토를 태반이나 차지하였으며, 사실상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신라를 병탄하려는 의지도 드러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궁예는 전제 왕권을 추구하려는 의지까지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911년(효공왕 15)에 나라 이름을 다시 태봉으로 바꾼 것도 이러한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태봉’이라는 나라 이름은 『 주역(周易)』의 태괘(泰卦)에서 천하 만물이 조화를 이룬다는 뜻의 ‘태(泰)’와 봉토(封土) · 봉강(封疆)을 뜻하는 ‘봉(封)’의 합성어로서, 조화롭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중국에서 천하를 통일하거나 제패했던 황제가 태산에 가서 천지(天地)에 자신의 공훈을 고하였던 태산봉선(泰山封禪)의 줄임말로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던 궁예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여하튼 궁예는 이때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가 914년(신덕왕 3)에 다시 정개(政開)로 바꾸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고 큰아들과 막내아들을 각각 청광보살(靑光菩薩)과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칭하였다. 또한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내세워 정적(政敵)들을 제거하는 등 미륵 신앙에 근거한 신정적(神政的) 전제 정치(專制政治)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궁예가 이처럼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면서 전제 정치를 추진하였던 사실은 뒷날 고려 태조가 즉위하면서 단행한 918년 6월의 인사 발령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인사 조치는 고려 태조가 궁예를 몰아내고 6일만에 단행하였다는 점에서 태봉의 관직 체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보이는 태봉의 관직 체계는 904년에 설치된 마진의 관직 체계와 비교할 때 몇 가지 차이가 있었다. 첫째, 마진에서 9번째 서열이었던 내봉성의 지위가 태봉에서 2번째 서열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국왕의 근시 기구로서 왕명을 받들고 인사 행정까지 맡았던 내봉성의 지위가 높아졌다는 사실은 이를 통해 인사권을 행사하였던 궁예의 권한이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호족의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알려진 광평성의 정치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둘째, 군사 문제를 담당하였던 병부의 지위가 마진에서 2번째 서열이었으나 태봉에서 4번째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또한 태봉의 관직 체계에서 순군부(徇軍部)와 내군(內軍)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순군부의 지위가 병부보다 앞선 서열 3위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이전에 군사권을 독점하고 있던 병부의 역할을 분산시키면서 새롭게 군사 지휘권을 부여받은 순군부의 지위를 강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친위군으로 자신의 신변 경호와 군 내부의 감찰 임무를 맡길 목적으로 내군을 창설함으로써 군을 강력하게 통제하고자 하였던 궁예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마진 시기인 904년에 설치된 광평성 체제가 호족연합정권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면, 태봉 시기의 관직 체계는 이처럼 궁예의 왕권 강화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편된 것이었다.

태봉 시기에는 관직 체계뿐만 아니라 관품 체계도 함께 변화를 보였다. 즉, 904년에 설치된 마진의 관품은 정광(正匡) · 원보(元輔) · 대상(大相) · 원윤(元尹) · 좌윤(佐尹) · 정조(正朝) · 보윤(甫尹) · 군윤(軍尹) · 중윤(中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봉 시기에는 대재상(大宰相) · 중부(重副) · 태사훈(台司訓) · 보좌상(輔佐相) · 주서령(注書令) · 광록승(光祿丞) · 봉조판(奉朝判) · 봉진위(奉進位) · 좌진사(佐眞使) 등으로 구성된 9등급의 관품을 다시 설치한 것이다.

궁예가 이처럼 태봉 시기에 추진하였던 전제 정치는 심각한 민심 이반을 불러왔다. 이 과정에서 부인 강씨(康氏)와 두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마진 이래로 궁예 정권의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던 청주(靑州) 세력마저 재지(在地) 세력과 재경(在京)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에 시중을 지냈던 왕건도 청주 세력의 핵심이었던 아지태(阿志泰)를 처벌함으로써 그들의 갈등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몸을 피해 물러나서 나주(羅州)의 운영에 치중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궁예에게 소환되어 미륵관심법의 시험 대상이 되면서 궁지에 몰렸다가 벗어나기도 하였다.

왕건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918년 6월에 홍유(洪儒) · 배현경(裵玄慶) · 신숭겸(申崇謙) · 복지겸(卜智謙) 등 궁예의 기장(騎將)들에 의해 추대를 받고 마침내 정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왕건에게 축출당한 궁예는 도망을 치다가 부양(斧壤: 지금의 평강 일대)의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고, 태봉도 결국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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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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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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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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