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진한·변한을 말한다. 삼한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지역에 비정된다.
삼한사회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은 ≪삼국지 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이며, 축약, 정리된 내용이 ≪후한서 後漢書≫ 동이전과 ≪진서 晉書≫ 사이전(四夷傳) 등에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마한은 54개 소국(小國),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소국으로 구성되었다.
≪사기 史記≫ 조선전과 ≪한서 漢書≫ 조선전에 의하면, 서기전 2세기경까지도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정치집단에 대해서는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한 소국의 활동기사가 나타나는 것은 서기 1세기 초엽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진한 또는 삼한 모두가 진국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기≫의 판본이 ‘중국’ 이외 ‘진국’으로 기록된 것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래, ‘진국’ 자체에 대한 논쟁이 제기되고 ‘진국’과 삼한의 발전관계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진국’의 역사적 존재를 부인하고 ‘중국’설을 취할 경우, 삼한형성문제가 ‘진국’과 결부될 필요성은 없어진다. 그러나 진국설을 취하고, ‘진국’을 남부지역 전체의 토착집단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삼한 전체 또는 마한과 변한이 모두 ‘진국’으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반면, ‘진국’을 남한 일부지역에 형성된 특정세력집단으로 규정하는 입장에서는 진한이 옛 ‘진국’이라는 ≪삼국지≫의 기록에 근거해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한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도 견해가 다양하다. 종래의 연구 중에는 마한족·진한족·변한족이라는 별개의 종족집단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주, 정착해 삼한을 형성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선주토착집단의 점진적 발전 결과로 삼한이 대두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 중 남부지역의 정치집단에 대해 ‘한(韓)’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 유래에 대해서는 한씨(韓氏) 성을 가진 고조선 준왕(準王)의 남주와 결부시키거나, 간(馯)이라는 종족명에서 근거해 후한대(後漢代)부터 ‘한’이라는 정치집단명이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한’은 ‘크다, 높다’의 뜻을 가진 알타이어의 ‘한(khan, han)’이라는 말에 대한 한자식 표기로서, 고조선 지배씨족의 이름이 되고 이것이 다시 국명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혹은 문헌자료에 나오는 ‘진국’과 한왕(韓王)의 존재를 근거로 위씨조선(衛氏朝鮮)의 멸망을 한 형성의 시발점으로 잡는 견해도 있다.
이와는 달리, 한족사회 형성의 문화배경에 주목해 한반도 남부지역의 고인돌[支石墓]사회가 점진적인 발전을 거쳐 서기 1세기경 소부족국가(小部族國家)를 형성해 대두하게 된 것이 ≪삼국지≫의 삼한이라는 주장이 있다.
역시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한강(漢江)유역을 경계로 남쪽지역이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이며, 이들이 ‘한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초기철기시대라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한다면, ‘한’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는 별개로 한족사회의 형성과 토착화과정은 청동기문화단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한족사회의 형성과 이 지역에 성립된 정치집단인 삼한 각 소국의 형성과정, 그리고 소국연맹체의 의미를 가진 마한·진한·변한의 대두는 시기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상호 구분되어야 한다.
삼한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각 소국의 형성과정은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단계의 대소규모 단위집단들이 다수 통합되어 단일한 정치집단으로 기능하게 되는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삼한사회의 70여 소국들은 일정시기에 일률적으로 대두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시기와 과정이 비교적 다양하다.
고고학 자료상 지배자 개인이 소유하는 금속제 유물의 수량과 구성은 정치집단의 존재와 규모, 분포상태, 문화배경을 나타내는 주요한 척도가 된다.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청동기유물이 집중 출토되는 마한지역 소국의 상당부분은 서기전 3∼2세기 이래 세형동검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달리 청동기유물에 비해 철기유물이 다량 분포된 한강유역이나 경상도지역의 소국들은 서기전 1세기 이래 철기문화의 유입, 위만조선을 비롯한 북방유이민의 정착을 계기로 형성되는 것이 주로 많다.
삼한의 각 소국들은 종래 부족국가로 통칭되어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기원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성읍국가(城邑國家)·읍락국가(邑落國家)·군장사회(君長社會, chiefdom)·초기국가와 같은 새로운 용어와 개념의 설정이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삼한사회의 기본성격을 규정하고 발전과정을 체계화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이를 위해 소국의 전반적 성격과 조직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지식의 축적이 요구된다.
각 소국의 존재와는 별개로 마한·진한·변한의 구분은 소국의 개별적인 성격의 차이나 전체적인 문화기반의 차이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삼한의 구분은 소국 사이에 형성된 유기적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삼국지≫의 마한과 진한의 실체가 대두되는 것은 특정 소국을 주축으로 다수 소국들 사이에 통일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정치·경제적 결속기반이 확립된 결과이다.
경제적인 교역관계를 토대로 삼한 분립의 실마리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은 서기전부터이나, 이것이 확대 발전되어 지역별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로서의 마한과 진한이 성립되는 것은 철기가 일반화되는 서기 1세기 이후 단계이다.
삼한 소국은 큰 것은 1만여 가(家)로부터 작은 것은 6백∼7백가에 불과한 것까지 규모가 다양하지만, 평균 2천∼3천가 정도의 인구를 가지는 정치집단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조선지역에 설치된 중국 군현의 통치단위인 각 현에 비교될 수 있으며, 영역상으로는 현재의 군(郡) 정도의 세력범위로 추정된다.
삼한의 소국들은 중심 읍락(邑落)인 국읍(國邑)과 다수의 일반 읍락으로 구성된다. 국읍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주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대읍락이다. 삼한사회의 읍락은 단일한 농경촌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지에 연결되는 다수의 취락군(聚落群)으로서 1천호 미만의 인구를 가지고 동일한 시조를 내세우는 의제적 혈연집단(擬制的血緣集團)으로서 독립된 지배자에 의해 통치되는 개별정치집단이다.
국읍 또는 읍락은 서기전 3세기 이래 초기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대두한 정치집단들이 성장, 발전된 것이다. 초기의 읍락지배자는 세형동검(細形銅劍)·세문경(細文鏡)·동모(銅鉾)·동과(銅戈)·청동방울과 같은 청동제 무기와 의식용구를 껴묻기[副葬]하는 돌덧널무덤[石槨墓]·널무덤[土壙墓]의 주인공들이다. 진한 사로국(斯盧國)의 6촌(六村), 수로집단(首露集團) 대두과정에 나타나는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의 9간(九干)과 같은 집단들이 각 소국을 구성하는 읍락집단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읍락의 중심 취락은 하천을 끼거나 구릉지대에 위치함으로써 인근지역의 조망(照望)과 방어에 편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토루(土壘)·목책(木柵)·환호(環濠)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경우가 많다.
민무늬토기와 김해토기(金海土器)를 출토하는 환호취락과 경상도 남해안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貝塚]유적들은 모두 삼한사회의 대표적인 취락 유적지로서, 이들은 대개 하천을 끼고 있거나 표고 20∼100m 높이의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주 월성, 대구 달성, 김해 봉황대유적·부원동유적, 서울 풍납동토성, 김해패총·양산패총·웅천패총·고성패총·마산성산패총 등이 있다.
이러한 유적의 원초적인 형태는 일반 취락지였으나 인구 증가와 무력대립 등으로 비상시에 읍락주민이 대피하는 피난소로 이용되었으며, 공동집회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정치·경제적 중심지로 발전되는 읍락의 경우, 토성은 지배자의 전용 거주지가 됨에 따라 외형적인 형태와 규모에도 변화가 가해졌을 것이다.
방어시설을 갖춘 취락(聚落)의 출현은 각 집단 사이에 벌어지고 있었던 무력적 대립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며, 삼한사회에 있어서 철기문화의 확산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 이 시대의 취락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철제도끼·낫·손칼[鐵刀子]과 같은 생활용구, 그리고 지배자의 분묘에서 출토되는 풍부한 철제무기들이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한다.
삼한 소국은 다수 읍락을 포괄하는 지연집단(地緣集團)으로서, 국읍에는 소국의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읍차(邑借)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통솔자를 세우고, 대내외적으로 단일한 정치집단으로 기능하였다.
국읍의 주수(主帥)는 읍락간의 교역과 소국간의 교역활동을 주관하는 경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국읍은 물자교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소국은 여러 가지 형태의 경제활동이 전개되는 독자적인 경제단위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국읍의 주수는 읍락 거수(渠帥)가 개별적으로 행사하고 있던 군사력을 전체적으로 통솔하는 군사책임자이다. 유사시에 장악된 군대통솔권이 일상적인 것으로 확보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지배권력의 발전과정이 전제되어야겠지만, 대외적으로 각 소국은 국읍을 주축으로 획일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개별정치집단으로 기능하였다.
이 밖에 국읍세력이 행사하고 있었던 다른 하나의 기능은 제천의식(祭天儀式)의 주관이다. 국읍에는 천군(天君)이라는 제사장(祭祀長)을 세워 매년 5월과 10월 곡식의 파종과 추수가 끝날 때마다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는 청동기시대 이래 토착사회에서 전래되어오던 원시농경의례로서 천군은 전통적인 지배권의 일부를 계승하는 토착적인 성격이 강한 지배자이다.
삼한사회의 국읍은 초읍락적인 제천의식의 주관을 통해 읍락간의 유대의식을 높이고, 다수의 읍락들을 통합하는 내재적인 결속원리를 가졌다. 이처럼 삼한 소국은 제정이 기능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정치·경제적인 권력 못지 않게 종교적인 영향력이 중요하게 작용했고 이러한 상태는 국읍의 정치권력이 미약한 초기단계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삼한사회가 제정분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하는 것은 철기문화의 보급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중남부지역 초기철기문화단계의 토착적인 지배자는 일반적으로 제정을 겸하는 존재로 파악된다. 청동거울·청동방울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의 청동제 의식용구들이 무기와 함께 지배자 분묘의 중요한 부장품이 되고 있으며, 청동기 일괄유물군의 상당부분이 의식용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 이후 정치적 지배기능을 우선적으로 행사하는 새로운 성격의 지배자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서기전 1세기 이후에는 철기문화의 유입과 유이민의 이주라는 정치·문화적인 영향으로 이러한 성격의 지배자가 수적으로 크게 증가되고, 그들의 정치·사회적 비중이 증대되면서 삼한사회의 주도적인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철기가 다량 반출(伴出)되는 단계에 이르면 지배자가 소유하는 금속기의 대부분은 무기류로 구성되고, 의식용구를 가지는 일괄유물군의 숫자는 크게 줄어든다. 이러한 변화는 철기문화의 보급을 배경으로 단위집단 지배자로서 제사장의 기능보다 정치·군사적 통솔자로서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전반적인 발전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사장의 기능이 특정인에게 위임되면서 삼한사회가 점차 제정분리의 사회체제로 전환되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지≫ 동이전에 각 소국에는 별읍(別邑)이 있어, 이를 소도(蘇塗)라고 하고 그곳에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겼다는 기록이 있다.
소도에 대해서는 동네 어귀에 있는 경계 표지 또는 신성지역(神聖地域)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철기문화가 성립시키고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와 대비되는 재래적인 신앙활동의 중심지로 파악되기도 한다.
또는 제사장인 천군이 농경의례·축제 등을 거행하던 장소로서, 민무늬토기시대 이래 생활 근거지였던 야산이나 구릉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소도는 국읍의 정치기능과 관련해 삼한사회의 문화성격을 반영하는 중요자료로 주목된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한 소국의 정치·경제적 성격이나 성장과정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적극적인 활용과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개괄적인 추세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전한(前漢) 말 한(漢)나라의 일시적인 철의 전매제 폐지와 후한대(後漢代)에 진행된 철기제작의 민영화 추세는 제철·제강기술의 확산을 자극해 철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한족사회에도 서기전 1세기 후반 이래 철기사용이 점차 보편화되고, 생산력 증대와 함께 철을 매개로 활발한 물자교역이 전개되면서 각 집단간의 세력격차가 심화된다.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배경으로 서력 기원후가 되면 소국의 정치적 기능이 강화되고 각 소국간에 새로운 질서가 확립된다.
국읍의 주수는 유력한 읍락과의 혼인, 교역의 성공적 수행, 대외적 군사활동의 전개를 통해 지배권력을 강화하고, 읍락의 거수를 국읍의 지배세력으로 흡수하면서 읍락집단에 대한 통제력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그리고 확대된 통치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군대지휘, 조세징수와 관리 등 중요통치기능이 전문화되면서 지배조직의 체계화가 진행되었다. 동시에 소국의 내적인 성장과 대외적 팽창과 무력대립이 원인과 결과로서 상승작용을 거듭함에 따라, 지역별로 유력한 소국을 중심으로 소국연맹체가 대두된다.
일부의 변한 소국들처럼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속한 것도 다수 있으나, 대부분은 일정한 맹주국을 주축으로 지역별 소국연맹체의 구성원으로 편제되었다. 즉, 2, 3세기경 삼한 소국들은 경주 사로국을 맹주로 하는 진한소국연맹체와 한강유역의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 그리고 마한지역의 토착 맹주세력인 목지국(目支國)중심의 세력권으로 통합되었다.
소국연맹체의 결속기반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단계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각 소국들은 독자적인 통치기구와 지배기반을 유지하면서, 맹주국으로부터 일정한 형태의 정치·경제적인 제재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맹주국은 일반 소국에 대해 독점적인 교역관계를 요구하거나 교역물품·교역상대 등을 규제함으로써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통제력을 행사하였다.
상주(尙州)의 사량벌국(沙梁伐國)이 경주 사로국과의 결속관계를 버리고 백제국이라는 외부세력과의 교섭을 시도하자, 이를 무력으로 저지했다는 ≪삼국사기≫의 석우로전(昔于老傳) 기록은, 3세기 중엽 각 소국간의 결속기반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배권력의 성장에 따라 대등한 결속관계가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복속 관계로 전환되면서, 공물(貢物)을 징수하거나 군사력을 동원하는 등 정치적인 제재가 함께 가해졌다.
그러나 3세기경까지도 소국의 토착기반을 해체하거나 규칙적인 조세를 부과하고 대외교섭을 완전히 차단할 만큼 강력한 통제력이 확립되지 못하였다.
중국 군현의 토착집단 회유정책이 실시될 때마다 연맹체에 소속된 소국의 거수들 중에는 귀의후(歸義侯)·중낭장(中郎將)·도위(都尉)·백장(伯長)·읍군(邑君)·읍장(邑長)과 같은 관작(官爵)과 인수(印綬)·의책(衣幘) 등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대외통교와 교역을 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집권적 귀족국가로서 신라·백제 국가의 확립은 마한·진한 소국연맹체의 결속력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삼한은 토지가 비옥해 벼농사를 짓고 오곡(五穀)을 재배하는 토착농경사회이며 양잠을 하여 견포를 직조하였다. 가옥은 수혈주거(竪穴住居)로부터 지상가옥으로 발전하는 과도단계이나, 일반적인 가옥형태는 서까래가 있고 지붕 위에 풀이나 갈대·볏짚을 이은 초가집의 원초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례(葬禮)에는 관(棺)은 있으나 곽(槨)이 없다고 하여 토광목관묘가 주된 묘제임을 알 수 있다. 근래의 고고학 발굴자료에 의해 토광목관묘에서 매장주체부가 확대되면서 목관 바같에 목곽을 설치한 토광목곽묘로 발전해 갔으며, 봉분 주위에 ‘ㄷ’자형, 원형, 반원형 등의 물도랑을 판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가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소와 말을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변진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하고 죽은 자가 승천하는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변진지역에서는 편두(褊頭)와 문신(文身)의 풍속이 있어 남방문화의 영향으로 해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