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빈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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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제도
904년(효공왕 8), 궁예가 외교사절을 접대하고 잔치를 베푸는 일을 관장할 목적으로 설치한 중앙의 행정 부서.
제도/관청
설치 시기
904년(효공왕 8)
폐지 시기
1894년
내용 요약

봉빈부는 904년(효공왕 8)에 궁예가 외교사절을 접대하고 잔치를 베푸는 일을 관장할 목적으로 설치한 중앙의 행정 부서이다.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고치면서 설치하였는데, 태봉 시기에 이어서 고려 태조가 예빈성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존속되었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태조가 예빈성으로 바꾼 뒤에 성종이 잠깐 객성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예빈성으로 바꾸었다.

정의
904년(효공왕 8), 궁예가 외교사절을 접대하고 잔치를 베푸는 일을 관장할 목적으로 설치한 중앙의 행정 부서.
설치 목적

외교사절을 접대하고 연회를 베푸는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내 용

궁예는 904년(효공왕 8)에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정하면서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는데, 이때 중앙에 광평성(廣評省)을 포함한 19개의 관부(官府)를 설치하였다. 이 가운데 5번째 관부였던 봉빈부(奉賓部)는 고려의 예빈성(禮賓省)처럼 빈객(賓客)에게 연회를 베푸는 일을 맡고 있었으며, 그 연원은 신라의 왜전(倭典) · 영객전(領客典) · 영객부(領客府) · 주1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예빈성이 921년(태조 4)에 설치된 사실을 고려하면, 봉빈부는 904년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태봉 시기를 거쳐서 921년에 고려 태조가 예빈성으로 바꿀 때까지 존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921년에 예빈성으로 바꾼 뒤 995년(성종 14)에 객성(客省)으로 고쳐졌다가 다시 예빈성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충선왕(忠宣王)이 1298년(충렬왕 24)에 즉위하면서 전객시(典客寺)로 바꾸었다가 중간에 예빈시(禮賓寺)로 바꾸었고, 1308년(충렬왕 34)에 복위하면서 다시 전객시로 바꾸었다.

그 뒤 공민왕(恭愍王) 때 예빈시로 고쳤다가 전객시로 고치기를 반복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예빈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래서 예빈시는 1392년(태조 1)에 조선 건국 후 관제를 개편한 이래로 1894년(고종 32)에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조선에서도 계속 존속되었다고 한다.

변천사항

왜전 · 영객전 · 영객부 · 사빈부(신라) → 봉빈부(904) → 예빈성(921) → 객성(995) → 예빈성(?) → 전객시(1298) → 예빈시(?) → 전객시(1308) → 예빈시 · 전객시(공민왕) → 예빈시(1390)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
『삼국사기』

단행본

김용선, 『궁예의 나라 태봉-그 역사와 문화』(일조각, 2008)
이재범, 『후삼국시대 궁예정권 연구』(혜안, 2007)
조인성, 『태봉의 궁예정권』(푸른역사, 2007)

논문

조인성, 「궁예정권의 중앙정치조직: 이른바 광평성체제에 대하여」(『백산학보』 33, 백산학회, 1986)
주석
주1

신라 때에, 외교를 맡아보던 관아. 경덕왕이 영객부를 고친 것으로, 혜공왕 때 다시 영객부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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