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강은 924년 7월 조물성전투(曺物城戰鬪)에 출전했던 후백제 견훤의 아들이다.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는 수미강(須彌强)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는 수미강(須彌康)으로 기록되어 있다.
견훤의 아들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서 모두 10여 명이 나온다. 넷째 아들로 금강(金剛)이 있고 그 위의 형으로 신검(神劒) · 양검(良劒) · 용검(龍劒)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견훤에게 자식 아홉이 있는데, 첫째가 신검(神劒: 혹은 견성(甄成)이라고도 함)이고, 둘째가 태사(太師) 겸뇌(謙腦), 셋째가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가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가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을 알 수 없고, 일곱째가 좌승(佐承) 위흥(位興), 여덟째가 태사(太師) 청구(靑丘), 딸 하나가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다.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 소생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견훤의 아들 10여 명 중에서는 수미강의 존재를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태조 7년(924) 7월 기사에는 “견훤이 아들 수미강과 양검(良劍) 등을 보내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수미강이 어떤 존재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삼국사기』 견훤 열전을 포함한 많은 사료에서 견훤의 둘째 아들이 양검(良劍)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견훤의 둘째 아들인 양검보다 앞에 등장하는 수미강은 견훤의 첫째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견훤의 첫째 아들로는 신검〔神劒, 혹은 견성(甄成)이라고도 함〕이 이미 존재한다. 따라서 수미강은 신검과 동일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연구자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수미강을 신검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 따르면, 924년 7월에 견훤이 아들 수미강을 보내어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남 합천 일대)과 문소성(聞韶城: 지금의 경북 의성군 금성면 일대) 두 성의 군사를 일으켜 조물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 조물성 사람들이 고려 태조를 위해 성을 굳게 지키고 싸워 수미강은 손해를 보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을 전하는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의 태조 7년(924) 7월 기사에서는 견훤이 아들 수미강과 양검(良劍) 등을 보내어 조물성을 공격하자, 고려 태조가 장군 애선(哀宣)과 왕충(王忠)에게 구원하도록 명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도 수미강 등이 아무 이득 없이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기록에서는 수미강이 조물성을 공격하자 고려 태조가 장군 애선과 왕충에게 명하여 조물성을 구원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수미강이 이 전투에서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고 알려준다. 수미강은 이때 조물성 사람들과 이를 구원하기 위해 온 고려의 장군 애선과 왕충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으며, 그 결과 고려의 장군 애선을 전사하게 한 것이다. 수미강이 1차 조물성전투에서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