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성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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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 사이에 있었던 싸움.
이칭
이칭
조물군전투(曹物郡戰鬪)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조물성전투는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있었던 싸움이다. 왕건이 즉위한 후 경북 내륙지역이 고려에 복속되자 후백제는 경상북도 죽령 부근의 조물성을 공격해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이 전투는 2차례에 걸쳐 이뤄졌는데, 1차는 924년 후백제가 먼저 공격하였으나 고려에 참패했다. 그 후 견훤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2차 전투에 나섰고, 고려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화의를 맺었다. 화의는 백제에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이 전투의 결과 경상 지역에서 후백제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정의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 사이에 있었던 싸움.
역사적 배경

조물성(曹物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상북도 안동 지방, 구미 금오산성(金烏山城), 김천시 조마면, 의성 등으로 추측되나 『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太祖世家)에 “ 죽령(竹嶺)의 길이 막혀 왕충(王忠) 등에게 명해 조물성에 가서 정탐하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죽령에 가까운 경상북도 지역인 것 같다.

왕건(王建)이 즉위한 이후 일부 국지전(局地戰)을 제외하고 후백제와 고려 양국 사이에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고려는 후백제의 북진(北進)을 차단하였고, 창원과 김해지역 진출을 시도하는 후백제의 동진(東進)을 저지하였다. 고려가 후백제의 동진정책을 신라와 연대하여 저지하자 경북지역의 호족(豪族)들은 태조에게 호의를 보이며 귀부하기 시작했다.

922년 안동과 청송 일대의 호족으로 하지현 출신 원봉(元逢)과 진보현의 호족 홍술(洪述)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명지성의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의 양문(良文) 등도 연이어 고려에 복속하였다. 안동과 청송, 성주 등 경북 내륙지역의 호족들이 고려에 투항하자 견훤(甄萱)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후백제는 충청지역에서는 금강 이북의 10여 주 · 현(州 · 縣)을 차지하는 등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경상지역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해, 조물성을 공격하여 전세를 반전시키려고 하였다.

경과

924년(태조 7) 7월 견훤은 아들 수미강(須彌康: 신검)양검(良劍)을 보내 조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제1차 조물성전투). 이에 태조는 장군 애선(哀宣)과 왕충(王忠)을 보내 구원하도록 했는데, 애선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군민(軍民)이 굳게 지켜 후백제군이 물러갔다.

925년 10월 고려 태조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충북의 연산진(燕山鎭)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재개되었다. 연산진은 고려가 장악하고 있던 청주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중간 길목이며, 후백제의 최일선 요충지이다. 유금필은 연산진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성을 함락하고 이어 임존성(任存城)까지 함락시켜 후백제는 수백 여명이 전사하고 2천명 이상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견훤은 무너진 전세를 만회하고, 친고려노선(親高麗路線)을 견지하는 경상지역의 호족을 제압하기 위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제2차 조물성 공격에 나섰다. 견훤이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태조도 정병(精兵)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서로 화의를 맺었다.

태조는 당제(堂弟) 왕신(王信)을, 견훤은 외생(外甥) 진호(眞虎)를 서로 인질(人質)로 교환하였다. 이 화의에 대해 『삼국사기(三國史記)』 견훤전에는 견훤의 군사가 우세해 태조가 요청한 것이라 했고, 반면에 『고려사』 태조세가에는 견훤이 화의를 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 유금필전(庾黔弼傳)을 인용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유금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합세해 병세를 떨치니 견훤이 두려워해 화의를 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자나 그 저본이 되었던 사료에서 태조의 위신을 고려하여 후백제가 먼저 화의를 제안한 것으로 왜곡하여 서술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조물성전투의 전세는 후백제가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기에 태조 왕건이 사촌동생 왕신을 인질로 보내며 견훤을 상보(尙父)로 높여 부르면서 화의를 청했고, 견훤은 그에 답례하기 위해 사위 진호를 파견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과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이 소식을 듣고 태조에게 사절을 보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지만 태조는 화의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고려-후백제 양국의 화의는 후백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체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는 조물성을 후백제에게 넘겨주고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928년 8월에 왕충이 왕건의 명령을 받고 조물성 부근에서 정탐활동을 했던 일로 입증된다.

조물성전투의 결과, 후백제가 조물성을 점령하면서 성주와 고령 및 구미 등 인근 지역은 후백제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와 후백제의 화친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경상 지역에 대한 후백제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신라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후백제는 조물성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거창 등 20여성을 차지하며, 문경과 예천 등의 경북 서북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뒤로는 조물성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924, 925년에는 조물군(曹物郡)이라 했고 928년에는 조물성이라 했는데, 그 뒤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후백제 견훤정권연구(後百濟 甄萱政權硏究)』(신호철, 일조각(一潮閣), 1996)
『고려태조(高麗太祖)의 후삼국통일연구(後三國統一硏究)』(문경현, 형설출판사(螢雪出版社),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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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4(국사편찬위원회, 1974)
『고려시대사(高麗時代史)』(김상기,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 1961)
『한국사(韓國史)-중세편(中世篇)-』(이병도,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61)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연구(硏究)』(이병도,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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