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923년(경명왕 7) 7월에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 : 지금의 경상북도 星州) 장군 양문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같은해에 해당하는 『고려사(高麗史)』 태조 6년 8월조에는 “벽진군(碧珍郡) 장군 양문이 그 생질 규환(圭奐)을 보내와서 항복하니 규환을 원윤(元尹)으로 제배하였다.”고 하였다.
경산부는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의하면 “본래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여 신안(新安)이라 하고 경산군의 영현으로 삼았는데 뒤에 벽진군이라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에 다시 경산부로 고쳤다.”고 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벽진군이라 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경산부로 해야 할 것을 바꿔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양문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달을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7월이라 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8월이라 하여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양문이 생질 규환을 7월에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항복할 뜻을 전하고 8월에 항복한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