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봉성은 904년(효공왕 8)에 궁예가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정할 때 설치한 중앙의 관부 가운데 하나이다. 처음에는 전체 19개 가운데 서열상 9번째 관부로 설치되었지만, 태봉 시기를 거쳐 고려 초에는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래서 내봉성의 장관인 내봉령이 광평시중 바로 다음에 등장할 정도로 서열이 높아졌다.
궁예는 904년(효공왕 8)에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는데, 이때 중앙에 광평성(廣評省)을 포함한 19개의 관부(官府)를 설치하였다. 내봉성(內奉省)은 이 가운데 9번째 관부였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그것이 고려의 도성(都省)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여기에 의문을 표하면서, 광평성이 982년(성종 원년)에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바뀌었고 995년(성종 14)에 다시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고려의 도성, 즉 상서성(尙書省)의 전신을 내봉성으로 볼 것인지 광평성으로 볼 것인지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다만, 지금의 학계에서는 대체로 내봉성이 상서성으로 이어졌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내봉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신라의 집사성(執事省)이나 고려의 상서도성처럼 국왕 측근이 왕명을 받들면서 인사 행정까지 맡았다는 견해도 있고, 신라의 위화부(位和府)처럼 단순한 인사 행정의 업무만 맡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내봉성이 궁예의 근시 기구로서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사정부처럼 감찰 기능까지 맡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내봉성의 성격이 이처럼 복잡하게 이해되는 이유는 내봉성이 904년에 전체 19개의 관부 가운데 9번째에 해당하였으나, 태봉 시기를 거치면서 그 기능이 크게 강화된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려 태조가 즉위하였을 때의 관리 임명 기사나 976년(경종 원년) 10월에 경순왕을 상보(尙父)로 책봉하는 「책상보고(册尚父誥)」에 서명한 관리들의 순서를 보면, 내봉성의 장관인 내봉령(內奉令)이 광평시중(廣評侍中) 바로 다음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편, 내봉성의 관원으로는 내봉령 이외에 차관인 경(卿)과 낭중(郎中) · 원외랑(員外郞) 등이 있었으며, 내봉감(內奉監) · 이결(理決) · 평찰(評察) · 사(史) 등과 같은 속관(屬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