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935년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다투던 경명왕 때부터 경애왕 대에 이르러 고려와의 우호관계를 강화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했다. 경순왕은 난폭한 견훤의 보호국보다는 왕건에게 투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935년 국가를 고려에 넘길 것을 결의하고 국서를 보냈다. 왕건은 신라를 경주로 고쳐 그의 식읍으로 주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78년에 승하했다.
재위 927∼935.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며,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추봉된 관○(官○, 혹은 實虹 · 乍慶)이며,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고,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비는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이며,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王建)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결혼하였다.
경명왕(景明王)이 즉위할 무렵 이미 지방에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정권이 형성되어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918년(경명왕 2)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경명왕이 왕건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또 경명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애왕(景哀王)이 더욱 친고려정책(親高麗政策)을 추진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덕왕(神德王), 경명왕, 경애왕은 아달라계(阿達羅系)의 후손으로 박씨 왕계였다.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신덕왕부터 경애왕까지 이어진 박씨 왕계가 다시 경순왕이 옹립됨으로써 김씨 왕계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했는데, 수십 일을 왕경에 머물면서도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조금도 범법(犯法)하지 못하게 하였다.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935년 3월 견훤이 장남 신검(神劍)을 비롯한 형제들의 음모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일이 벌어졌다. 3개월 후 6월 견훤은 유폐되어 있던 절을 탈출하여 고려군이 점령하고 있는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로 일단 피신했다가 고려 태조의 도움으로 개경으로 망명하였다. 견훤은 태조로부터 상보(尙父)의 존칭을 받았고, 그 지위가 백관(百官)의 위에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에 놀란 경순왕은 더 이상 보호국의 처지에서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의미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935년 경순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국가를 고려에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 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태자보다 위인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였다. 그런 다음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채용하였다. 또한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978년(경종 3) 4월에 승하하였다. 무덤은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