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심관은 고려시대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직이다. 935년(태조 18)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항복해 오자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고, 또 공신들을 각각 출신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해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다스리게 한 데서 비롯하였다. 아직 지방관 파견이 여의치 않던 때여서 사심관은 기인제도와 함께 지방 세력에 대한 중앙통제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면서 사심관이 민호와 노비를 가로채 사욕을 채우는 등 폐단이 심하여 1318년(충숙왕 5)에 폐지되었다.
935년(태조 18)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부(金傅 : 경순왕)가 항복해오자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동시에 여러 공신을 각각 출신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해 부호장(副戶長) 이하의 향직(鄕職)을 다스리게 한 데서 비롯하였다.
당시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던 공신들은 중앙귀족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본주(本州 : 本貫)에 여전히 전통적인 세력기반을 갖고,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중앙정부는 이러한 공신들의 재지세력기반(在地勢力基盤)을 이용해 인심을 수습하고 그 지역의 토호세력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아직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했던 때였으므로, 당시의 사심관은 기인(其人)과 함께 지방세력에 대한 중앙통제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태조 때 설치된 사심관은 983년(성종 2)에 지방관제가 실시되고 그 체제가 정비되어감에 따라 변화를 보게 되었다.
996년에는 사심관의 정원을 규정, 5백정(丁) 이상의 주는 4인, 3백정 이상의 주는 3인, 그 이하의 주는 2인으로 하여 아무리 작은 주현이라도 최저 2인이 임명되었다. 복수임명은 1인의 임명으로 인한 권력의 집중을 막으려는 정책이었다.
당시 전국의 군현수는 약 6백에 달해 최저 2인으로 보더라도 사심관의 총수는 1,200인을 헤아리는 셈이었다. 이는 성종 때의 중앙관료 대부분이 사심관에 임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당초 사심관이 지녔던 호족적인 성격이 크게 감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모든 군현에 파견되지 못하고, 사심관이 없는 군현도 많았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처음보다 수가 늘고 차차 관료적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창설 당시 사심으로 불리던 것이 996년에는 사심관이라 하여 ‘관(官)’자가 부가되어 관료체계에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때에 관료는 본향(本鄕) 뿐 아니라 처향(妻鄕) · 모향(母鄕) · 조모향(祖母鄕) · 증조모향(曾祖母鄕) 등 연고지의 사심관을 겸임할 수 있도록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관할하는 지방의 향리는 서로 동향일 뿐만 아니라 동족일 경우가 많아서, 지방세력의 중앙통제에는 아직도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이후에는 향리 출신으로 사심관이 되는 경우도 빈번해, 더욱 사심관과 향리의 혈연관계를 단절시키는 제도적인 조처가 필요하였다. 현종 초년에는 아버지나 친형제가 호장인 사람은 사심관이 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1124년(인종 2)에는 향리의 자손은 비록 향역(鄕役)이 면제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처의 친척이 아직도 향직에 있으면 사심관이 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사심관은 중앙집권체제의 실효를 거두기 위한 특수관직으로서 부호장 이하의 향리를 관장해 그 관할 지방민의 종주(宗主)가 되고 유품(流品)을 심사하며, 부역을 균평하게 하고 풍속을 표정(表正)하는 등의 직능을 맡아 지방통제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편으로는 관료로서 더욱 출세할 수 있는 정치적 · 경제적 기반도 마련할 수가 있어서 유력한 관료들은 서로 연고지의 사심관을 겸임하려고 경쟁하기도 하였다.
사심관의 겸향 범위가 광범해졌으나, 부계 · 모계 · 처계와 관계없는 지방까지는 확대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즉, 혈연적으로 연고가 있는 지방만이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사심관의 증가는 자연히 여러가지 민폐를 가져오게 되었다. 1057년(문종 11) 사심관으로서 귀향(歸鄕)해 작폐한 자는 안렴사(按廉使) · 감창사(監倉使)가 경사(京師)에 추송(推送)해 죄를 주고, 그 후임은 사심주장사(事審主掌使)에게 계달(啓達)해 선임하도록 법제화하였다.
그러나 의종 · 명종 이후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자, 사심관의 폐단이 차차 드러났다. 이들은 넓은 공전(公田)을 점유하고 많은 민호(民戶)와 노비들을 가로채 사복을 채우는 등 원래의 목적과는 아주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사심관의 작폐는 제도의 폐지를 가져오게 하였다. 1283년(충렬왕 9) 한때 폐지되었으나, 얼마 뒤에 권문세족들이 스스로 사심관이 되어 폐단이 전보다 더 심하였다. 이에 1318년(충숙왕 5)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 때 백성이 매우 기뻐했다는데, 당시 사심관이 일반민중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던가를 상상할 수 있다.
1319년에 사심관이 차지한 토지와 민호를 몰수하였다. 민(民)이 2,360호(戶), 노비가 137인, 공전이 1만 9798결(結), 사전(私田)이 1,227결, 위전(位田)이 315결이었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도량(跳梁)으로 다시 설치된 듯하여, 중앙집권체제를 좀먹고 지방분권을 부채질했으며, 지방민의 보호라는 위치로부터 스스로 수탈자로 변해버렸다. 공민왕 때 신돈(辛旽)은 자기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려고 하였다.
이때 공민왕은 사심관을 대도(大盜)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사심관제는 그 뒤 『고려사』에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유향소(留鄕所)는 곧 전조(前朝)의 사심관이라는 기록(성종실록 15년 5월 계사조)을 통해 고려 말 조선 초의 경재소(京在所) · 유향소는 고려의 사심관제를 답습한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