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私田)의 개념은 사전적 의미로만 보면 개인의 토지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사용된 역사적 조건에 따라 소유권적 의미와 수조권(收租權)적 의미로 나누어 규정된다. 한국사에서 사전이란 전시과(田柴科) · 녹과전(祿科田) · 과전법(科田法)과 같은 국가적 토지분급제가 시행되던 시기와 그 이후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하며, 또한 토지국유론과 토지사유론의 인식 차이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
전근대의 한국사회에서 모든 토지는 왕의 토지라는 왕토(王土) 이념에 의해 토지 소유의 개념이 명목적 의미와 실질적 의미에 차이가 있었다. 왕토 이념에 비중을 두면 국가나 왕의 명목적 소유 개념이 강조됨으로써 실질적 소유의 의미가 약화된다. 이로 인해 토지국유론과 토지사유론이라는 관점의 차이가 나타났다.
토지국유론에 따르면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인만큼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조(租)는 당연히 국가에 귀속되는 것이지만, 국가에 복무하는 관료들에게 복무 댓가로 국가의 토지를 나누어 주어 경작자들부터 조를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이때 관료들이 국가에서 받은 토지는 사전으로 규정되었다〔和田一郞〕.
토지사유론에 따르면 전근대 사회에서도 농업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토지에 대한 경작자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토지의 사유화가 진전되고, 농민들은 자신의 경작지를 사유화하면서 국가에 조세를 바치는 민전 소유자로 성장하였다. 여기서 국가는 국가에 복무하는 관료에게 복무의 댓가로 민전에서 수조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이때 개인 수조지로 바뀐 민전은 관료에게 수조권이 부여된 토지라는 측면에서 사전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전은 본질적으로는 농민의 소유지인 민전이지만, 개인 관료에게 수조권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사전으로 파악된다. 이때 농민은 수조권을 가진 관료에게 생산량의 1/10을 주었다고 본다(김용섭, 이경식 외).
신라의 「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에 따르면 “비록 왕토라 하더라도 공전(公田)이 아니므로 좋은 값으로 구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내용에서 신라의 토지는 기본적으로 왕토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국가의 토지가 아니고 사유지이기 때문에 매입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사전의 개념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미 이 시기에 토지 사유를 바탕으로 한 토지의 매매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아마도 매입한 토지는 사전일 수 있다.
고려 왕조에 들어와 토지는 크게 공전과 사전, 민전으로 구분되며, 민전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고려 왕조는 경종, 목종을 거쳐 문종 대에 이르러 관료들에게 관직의 등급에 상응하여 토지를 지급하는 전시과 제도를 완성하였다. 전시과 제도는 국가가 관료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국가적 토지분급제이다.
국가적 토지분급제는 관료 개인에게 토지에서 수조할 수 있는 권리를 분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시기에 사전의 의미는 개인에게 수조권이 분급된 개인 수조지를 가리킨다. 이때 국가는 관료 개인에게 민전에서 수조할 수 있는 권리를 분급하고 민전의 경작자는 관료 개인에게 조(租)를 바친다.
국가적 토지분급제는 다른 말로 수조권 분급제(收租權分給制)라고 하며, 전시과 제도가 운영되던 시기에 수조권을 받은 관료는 사전주(私田主)로서 전주(田主)라고 인식되었고, 실질적 민전 소유주인 농민은 사전 경작자로서 전객(佃客)이라고 불리웠다. 이를 일명 전주전객제(田主佃客制)라고 불렀다(김용섭, 이경식 외).
그러나 이 시기에도 사전이 소유권적 측면에서 개인 사유지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973년(광종 24)에 진전(陳田) 개간 사료를 보면 『고려사(高麗史)』 권78, 식화(食貨)1, 조세(租稅)조에 “진전을 개간하여 경작하는 사람에게는, (그 토지가) 사전이면 첫 해에 수확한 것을 전부 지급하고 2년째에는 처음으로 토지 주인〔田主〕과 절반씩 나누도록 하며, (그 토지가) 공전이면 3년을 기한으로 하여 (수확한 것을) 전부 지급하고 4년째에 처음으로 법에 따라 조(租)를 거두도록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광종 연간에 묵힌 땅〔陳田〕의 개간을 장려하는 가운데 묵힌 사전을 개간하면 경작자에게 첫 해 수확물의 전부를 지급하고 2년째에는 전주와 반반씩 나누도록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개간이 완료되고 난 후 전주와 경작자 사이의 분배 비율을 1/2로 하였다는 사실은 전주가 사전의 소유주임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공전과 사전의 개념이 수조권의 귀속에 따른 구분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사료에서 보이는 사전을 사유지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하일식).
토지사유론이 현재의 통설적 견해로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이에 대한 반성과 함께 고려시대 토지 소유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왕토 이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공 · 사전의 개념과 경작자의 실체를 해석하는 데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국가에 의한 토지의 수수 과정은 기본적으로 ‘공과 사의 전화 과정’이라고 보고 전정연립(田丁連立)은 이러한 공사의 전화 과정이며, 사전은 공적 관계의 외피 속에 내재해 있으면서 공권력의 추인 속에 나타나는 특권적 사유지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윤한택).
고려의 토지제도를 국전제(國田制)로 보면서 국전제 아래에서 전호(佃戶)는 국가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는 농민이라고 보고, 공 · 사전의 개념에서 수조권과 소유권, 두 차원의 소유관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며, 특히 사전을 소유권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견해가 있다(이영훈). 고려시대에 사전의 실체는 사유지라는 소유권적 개념을 적용하기는 어려우며, 민전 위에 1/10의 수조권이 설정된 토지도 아니라고 보고 민전과 사전이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파악하면서 전주와 경작자 사이에 서구 중세의 상하급 소유권이 적용될 수 있음을 제기한 견해가 있다(위은숙).
고려시대 공(公)과 사(私)의 의미를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직역(職役)을 매개로 공과 사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대표적 사전인 양반전(兩班田)은 양반 관료를 중심으로 구성된 양반호에 분급된 토지이며, 호의 주체가 직역을 담당하고 이를 대상으로 토지가 분급되는 ‘입호충역(立戶充役)’의 원칙이 양반에게도 적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이상국). 한편 고려시대 토지사유론의 한계를 ‘중세적 토지사유’라는 제한적 의미로 규정하고, 사전의 개념이 수조권적 의미와 소유권적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은 민전 위에 수조권을 분급할 사회경제적 조건이 아닌 상황에서 전정연립이라는 고려 특유의 토지 계승 방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김기섭).
『고려사』 권80, 식화 3, 상평의창(常平義倉)조 현종 14년 윤9월 의창의 법에 의하면 “무릇 여러 주현(州縣)의 의창(義倉)의 법은 도전정수(都田丁數)를 사용하여 거두어들이는데, 1과 공전(一科公田)은 1 결(結)에 조(租) 3두, 2과(二科) 및 궁원전(宮院田) · 사원전(寺院田) · 양반전은 조 2두, 3과(三科) 및 군인호정(軍人戶丁)과 기인호정(其人戶丁)은 조 1두로 이미 정해진 규정이 있다.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면 이것으로 급한 것을 구제하게 하고 가을에 반환하게 하여 함부로 낭비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 규정에 따르면 공전은 1과, 2과, 3과로 나누어지고 2과 공전과 같은 수준에 있는 토지로 궁원전, 사원전, 양반전, 그리고 3과 공전과 같은 수준에 있는 토지로 군인호정과 기인호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공전에 대응하여 나타나는 궁원전 · 사원전 · 양반전과 군인호정 · 기인호정은 사전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 토지는 수조권이 궁원과 사원, 그리고 양반, 군인, 기인에게 귀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전은 개인에게 수조권이 위임된 양반전, 군인전, 기인전, 한인전(閑人田) 등이다.
양반전은 전시과 제도 아래에서 양반 관료에게 수조권이 위임된 토지를 가리킨다. 양반 관료는 자신의 관직에 상응하여 국가로부터 민전에 대한 1/10 수조권을 받게 되며, 민전 소유자는 국가에 내야할 토지에 대한 조(租)를 수조권을 받은 양반 관료에게 대신 납부하는 방식이다(김용섭, 이경식 외). 한편 양반 관료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조를 면제 받는 면조권(免租權)이 주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윤한택, 김기섭).
양반전은 전국에 산재하고 있었으며, 향촌의 향리들에 의해 관리, 운영되었다. 양반의 과전이 부곡(部曲) 지역에 존재하였으며, 부곡민(部曲民)이 경작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오일순). 자신의 소유지가 각 향촌에 있을 때 양반 관료의 가인(家人)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자신의 토지에 대한 면조 혜택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근래 서해 연안에서 발견된 고려 침몰선 마도 1, 2호선의 목간에서 양반전에서 수취한 곡물로 보이는 ‘전출정조(田出正租)’의 용례는 주목되며, 양반의 수조지이거나 면조지일 수 있다(김기섭, 신은제).
군인전은 998년(목종 1)에 개정된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에 마군(馬軍)과 보군(步軍)에 관한 전시 지급 규정이 명시되고, 1076년(문종 30)에 개정된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 규정에 15과에 마군 25결, 16과에 역보군(役步軍) 22결, 17과에 감문군(監門軍) 17결을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국가는 이들에게 직역에 상응하는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이들 군인이 지급받은 토지가 군인전이었다.
앞에서 보이는 군인호정(軍人戶丁)은 군인호(軍人戶)가 가지고 있는 군인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고려 왕조는 국가에 필요한 다양한 직역을 호별로 편제하는 호별 편제 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역은 군인호에서, 기인역은 기인호(其人戶)에서, 향리역(鄕吏役)은 향리호(鄕吏戶)에서 지는 방식이다. 이들에게 지급한 토지가 각각 군인전, 기인전, 향리전이다.
고려 왕조는 직역의 계승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직역을 매개로 토지를 계승하는 전정연립제(田丁連立制)라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전정연립제는 군역, 기인역, 향리역과 같이 국가에 필요한 기본적인 직역을 원활하게 계승하도록 하기 위하여 전제(田制)와 역제(役制)를 결합하여 전정을 계승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군인전은 전정연립제의 원칙에 따라 군역을 지는 자에게 계승되었는데, 군역을 지는 군인의 존재와 관련하여 군인은 군반씨족(軍班氏族)으로 보는 견해와 부병제(府兵制) 아래의 일반 농민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근래에는 군인층을 2원화시켜 경군(京軍)과 지방군을 분리하여 경군은 군반씨족, 지방군은 일반농민으로 된 부병으로 보기도 한다.
군인전의 성격을 둘러싸고 군인전은 군인호가 본래부터 소유해 오던 자신의 민전이라고 보고 군역을 지는 댓가로 조를 면제하였다고 보는 편이다. 군인전의 경작은 양호(養戶)가 경작하여 운송까지 담당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나, 고려 후기로 가면서 군인전 경작이 부실하게 이루어져 이를 시정하는 방편으로 전호를 두어 경작하도록 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기인전은 기인의 직역에 대한 댓가로 지급한 사전이다. 1023년(현종 14) 윤 9월 의창(義倉)의 법에 기인호정으로 나타나며, 고려시대 호별편제의 원칙에 따라 기인역을 담당하는 기인호에게 지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사』 권75, 선거3, 기인조에 보면 기인은 “국초(國初)에 향리의 자제를 선발하여 서울에 볼모로 삼고, 또 그 고을의 일을 자문하는 일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이를 기인이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다.
기인은 신라의 상수리(上守吏) 제도를 연원으로 하여 후삼국 통일전쟁기에 귀순한 성주(城主)의 자제를 중앙에 머물게 한 제도에서 시작되었다. 후에 성주의 후예들이 지방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방 통제책의 일환으로 향리의 자제를 기인으로 선발하여 해당 고을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인재로 활용하였다.
1077년(문종 31) 기인의 선발 기준을 보면 각 주현(州縣)의 규모에 따라 선발 기준과 역의 연한을 정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외관(外官) 파견이 증대되면서 그 기능은 약화되었고 처우도 크게 줄어들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기인은 개간 사업에 동원되거나 관청의 잡무를 수행하는 등 그 처지가 매우 열악해지면서 기인역에 관한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궁원전은 왕실 소속의 궁원에 소속된 토지로서, 궁원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사유지와 궁원에서 수조하는 수조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 권78 식화1, 전제 경리조 현종 13년 12월의 기사에 따르면, “사주(泗州)는 바로 풍패(豐沛)의 땅인데, 이전에 민전을 삭감하여 궁장(宮莊)에 소속시켰으므로 민이 세(稅)의 징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옵건대 주(州)의 경내에서 공전을 살펴 헤아려 그 수만큼 보상하십시오.”라고 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궁장은 궁원 소속의 장원으로 궁원전으로 볼 수 있다. 민전을 궁원전으로 삼게 되자 궁장에 소속된 민이 세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과 관련하여 궁장에 편입된 민전의 경작민이 궁장호(宮庄戶)로 편제되어 궁원과 주에 이중으로 요역을 부담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강진철), 민전과는 달리 궁장에 소속된 민호의 과중한 전조의 부담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안병우).
한편 궁원 소속의 장처전은 소유지로 보면서 흔히 궁원전으로 불린 토지는 수조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안병우). 이에 따르면 궁원전은 왕실의 궁원 사이에 수수되면서 왕실 재정의 기반으로 기능하였으며, 궁원전과 사원전은 서로 이속되면서 동일한 성격의 수조지이며, 문무 양반전과도 동일한 성격의 수조지로 보고 있다. 수조지로서의 궁원전은 전호로 불린 농민에 의해 경작되었으며 경작의 책임은 지방관에게 있었다고 본다.
사원전은 사원 소속의 토지로서 사원의 소유지이거나 국가에서 지급한 수조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원이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던 사유지로서 사원전은 「약목군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若木郡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에 보이는 2필지의 토지는 1031년(현종 22) 당시 양안(量案)에 기재된 정도사(淨兜寺)의 소유지로 파악된다. 이 토지는 그 면적이 각각 49 부 4 속, 9부 5속으로 큰 면적은 아니나 5층석탑을 조성하기 위하여 내어놓은 것으로서 사원의 소유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원의 소유지는 주로 노비나 전호가 경작하였을 것으로 본다. 『 졸고천백(拙藁千百)』의 저자 최해(崔瀣)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토지를 빌려 전호가 되었다고 한다(『고려사』 권109, 열전22, 최해).
수조지는 국가나 왕실에서 분급받은 경우가 많으며, 전국적으로 분산된 경우가 많아 전장(田莊)의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4,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에 보면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세규사(世逵寺)의 경우에는 지장(知莊)을 파견하여 전장을 경영하였다. 지장은 사원전 관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조의 수취와 경작농민을 관리하였을 것으로 본다. 사원에 가까이 있는 토지의 경우에는 직세승(直歲僧)이 토지와 경작농민을 관리하였을 것으로 본다.
수조권에 기반한 토지에 대한 수취 비율은 1/10로 보고 있으나, 수조권이 사원의 소유 토지에 설정된 경우에 사원은 국가에 대한 전조 부담은 없으며, 농민은 사원에 1/2의 전조를 바쳐야만 하였다. 사원전을 경작하는 농민은 사원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사적 예속민이지만, 동일한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조지를 경작하는 전객 농민, 소유지를 경작하는 노비나 전호 농민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전자에 비해 예속도가 훨씬 높았을 것으로 본다(이병희).
사전에는 소유권적 측면에서 개인 사유지라는 의미와 수조권적 측면에서 개인 수조지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전시과 제도가 국가적 토지분급제로서 정착되었을 때에는 개인 수조지로서의 사전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전시과 제도가 제 기능을 상실하면서 사전 혁파를 둘러싼 정치 세력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사전의 의미는 이중적으로 이해되었다. 사전 제도를 합법적으로 이해하고 유지하려는 이색(李穡) 등의 사전 개선론자(私田改善論者)와 사전 제도를 불법적으로 보고 이를 혁파하려는 정도전(鄭道傳) · 조준(趙浚) 등의 사전 혁파론자(私田革罷論者)들의 사전 이해방식의 차이에서 그 의미를 살필 수 있다.
사전 개선론자들은 고려의 사전 제도는 고려 왕조가 견지해 오던 조종(祖宗)의 법제로서 함부로 고칠 수 없을 뿐 아니라, 혁파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1전1주(一田一主)의 원칙에 위배되는 불법적인 일전다주(一田多主)의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고려 전시과 제도가 제 기능을 상실하면서 불법적인 토지 겸병이 심화되고 하나의 토지에 여러 명의 전주가 수조자로 등록되어 경작자를 불법적으로 착취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사전개선론자들은 '전민을 바로 잡는다는 정책〔田民辨正〕'을 통해 불법적인 전주를 가려내어 1전1주의 원칙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 사전은 개인 관료에게 정상적으로 수조권이 분급된 토지임을 의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사전혁파론자들은 고려 후기 사전의 폐단은 선왕의 균전제(均田制)를 회복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중국의 이상적인 토지제도인 정전제(井田制)와 균전제를 모델로 삼고자 하였다. 그들은 전시과 제도야말로 정전제와 균전제를 이상적인 제도로 본받아 만든 것으로, 그것이 어그러져 사전의 폐단이 생겼으므로 다시 정전제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사전을 정전제적 이상을 무너뜨리고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불법적인 토지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는 소유권적 의미와 수조권적 의미가 겹쳐 있는 고려시대 사전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데에서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말 사전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사전의 혁파를 위한 다양한 논의들이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 정도전, 조준 등의 사전 혁파론자와 이색 등의 사전 개선론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과전법을 제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에 따라 수조권적 지배를 기본으로 한 사전은 경기(京畿) 지역에 한정해서 과전으로 지급하고, 서울 이외의 지방에는 사전을 폐지하여 국가 수조지로 재편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국가 수조지든 개인 수조지든 모두 1/10조를 징수하는 방식으로 귀결되었다. 1/10 수조율이 적용된 민전에서는 1결당 2석(30두)을 수조하되 경기의 사전 전주는 자신의 과전에서 1결당 2두의 전세(田稅)를 부담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제전(諸田)조에 따르면 관둔전 · 마전(馬田) · 원전(院田) 등은 자경무세(自耕無稅), 국행수륙전(國行水陸田) · 내수사전(內需司田) 등은 무세(無稅), 사전(寺田) · 아록전(衙祿田) · 공수전(公須田) 등은 각자수세(各自收稅)를 하도록 규정하였다.
여기서 자경무세전은 관유지로서 공전이며, 무세전(無稅田)은 왕실 직속지로서 공전이며, 각자수세전(各自收稅田)은 민전에 수조권을 부여한 토지로서 공전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과전법에서 능침전(陵寢田) · 창고전(倉庫田) · 궁사전(宮司田) · 공해전(公廨田) · 공신전(功臣田) · 사사전(寺社田)은 무세지(無稅地)이며, 과전 · 군전(軍田) · 외역전(外役田) · 진역원관전(津驛院館田) · 지장전(紙匠田)은 유세지(有稅地)였다.
1402년(태종 2) 2월부터 사사전 · 공신전이 유세지로 변하면서 무세지는 공전, 유세지는 사전이 되었다고 본다(이성무). 결국 조선 왕조에 이르러서도 조(租)가 사인(私人)에게 귀속되는 토지는 사전으로 파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전제(職田制)에서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로 변하고 궁극적으로 민전에 대한 수조권을 사인에게 귀속하는 국가적 토지분급제가 사라지게 되면서 수조권 개념의 사전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소유권의 귀속에 따라 국유지나 사유지 또는 민유지로 귀결되게 된다. 사유지 가운데 내수사전이나 궁방전(宮房田)의 경우 유토(有土)는 내수사(內需司)나 궁방의 사유지이며, 무토(無土)는 기본적으로 민전이며 각 기관에서 세를 수취하였다.
개인에게 수조권이 분급된 국가적 토지분급제는 과전법을 끝으로 한국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농민의 토지 소유권이 성장하여 소유권을 기반으로 한 조선 왕조의 조세체계가 확립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