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과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국가에서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를 분급한 토지제도.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976년(경종 1)
공포 시기
976년(경종 1)
시행 시기
고려시대
폐지 시기
고려 후기
시행처
고려왕조
주관 부서
고려 상서성 호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전시과는 고려시대 국가에서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를 분급한 토지제도이다. 협의로는 문무 관료 및 직역(職役) 부담자에 대한 수조지(收租地) 분급을 규정한 토지제도를 의미하고, 광의로는 이 토지제도를 기축으로 구성된 토지 지배 관계의 광범한 체계를 의미한다. 농경지인 전지와 땔나무 등을 공급해 주는 시지를 아울러 분급했기 때문에 전시과라고 하였다.

정의
고려시대, 국가에서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를 분급한 토지제도.
제정 목적

전시과(田柴科)는 관료(官僚) · 군인(軍人) · 서리(胥吏) 등이 국가를 위해 관직이나 직역(職役)에 복무하는 것에 대한 반대 급부로 주어졌으며, 한편으로는 이들의 가계(家系)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물적 기반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전시과는 관직과 직역을 매개로 자손에게 전수(傳受)될 수 있었다. 따라서 전시과는 지배 신분층의 지속적인 유지와 이를 통한 왕조 국가의 존속을 위해 마련되었다.

내용

신라 말기에 국가와 호족(豪族)이 이중으로 농민들을 수탈하면서, 농민들의 피해가 컸고, 이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는 이를 경험 삼아 백성들로부터 수취하는 데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방침을 내걸고, 수취를 완화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일반 농민의 사유지(私有地)인 민전(民田)은 그 소유권을 인정하면서도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하여 공전(公田)으로 편입하고 국가에서 1/10의 전세(田稅)를 거두어들였다. 이처럼 국가에서 직접 조세(租稅)를 거두어들이는 토지 외에 각 기관이나 국가에 역(役)을 지는 개인에게 위임시켜 조세를 거두어 운영하게 하는 토지를 사전(私田)이라 하였다.

고려시대 토지는 첫째, 왕토(王土)로서의 공전, 둘째, 소유권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공전(국 · 공유지)과 사전, 셋째, 수조권(收租權)의 귀속에 따라 구분되는 공전(국가 수조지)과 사전(개인 수조지)으로 나눌 수 있다. 즉 공전에는 왕토로서의 공전과 국 · 공유지로서의 공전 및 국가 수조지로서의 공전이 있었고, 사전에는 사유지로서의 사전과 개인 수조지로서의 사전이 있었다. 이러한 공전과 사전의 개념 중 신라와 고려 초에는 소유권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개념이 많이 쓰였고, 고려 초기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수조권의 귀속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 개인 수조지인 사전의 대표적인 토지가 전시과이다.

전시과는 분급 대상과 그 성격에 따라 크게 일반전시(一般田柴) · 공음전시(功蔭田柴) · 공해전시(公廨田柴)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전시는 관직과 직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분급된 것으로, 다시 문무양반(文武兩班) 및 군 · 한인전시(軍閑人田柴) · 무산계전시(武散階田柴) · 별사전시(別賜田柴)로 나누어 규정되었다. 이 가운데 전시과를 대표하는 문무양반 및 군 · 한인전시는 976년(경종 1) 처음 제정되었다. 이에 앞서 940년(태조 23) 고려시대 최초의 토지분급제도인 역분전(役分田)이 제정되어 조신(朝臣) · 군사에게 분급되었다. 이것은 후삼국 통일에 공로가 컸던 사람들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의 성격이 강한 토지분급이었다.

976년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 이후 전시과는 정치적 · 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998년(목종 1) ·1014년(현종 5) ·1034년(덕종 3)에 각각 개정되었고, 1076년(문종 30)에 최종적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목종(穆宗) · 문종(文宗) 때에 크게 바뀌었으며 각각은 토지분급방식에서 나름대로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시정전시과는 분급 기준으로 관품(官品)과 인품(人品)을 아울러 사용하였다. 우선, 분급 대상을 보면, 광종(光宗) 때 제정된 자삼(紫衫) · 단삼(丹衫) · 비삼(緋衫) · 녹삼(綠衫)의 사색공복(四色公服)에 따라 4계층으로 구분하였다. 다시 단삼은 문반(文班) · 잡업(雜業) · 무반(武班)으로, 비삼 · 녹삼은 문반 · 잡업으로 나눈 뒤 5·8·10·18품으로 세분해 토지를 분급하였다.

여기에서 자삼 계층은 반열(班列)에 따라 세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삼이 관계(官階)를 기준으로, 단삼 이하는 관직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근본적으로는 고려왕조의 개창에 크게 기여한 중앙 · 지방의 유력자인 자삼 계층이 관직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 원윤(元尹) 이상의 고위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시정전시과에서 인품을 분급의 기준으로 설정한 것은 신구 세력이 타협해 정국의 안정을 모색하던 경종(景宗) 초기에 지배 계층 전체를 분급 대상으로 흡수하는 데 따른 불가피한 선택의 결과였다.

998년의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에서는 분급 기준이 관직으로 단일화되어, 관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 18과(科)로 구분해 토지를 분급하였다. 분급 규정이 간편화한 것은 무엇보다도 성종(成宗) 때 크게 확립된 고려의 관료 체계가 토지분급제도에 반영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한, 전시과에서는 실직(實職)을 중심으로 토지를 분급해 산관(散官)은 현직 관리에 비해 몇 과 아래의 토지를 받게 하였다. 아울러 무관에 대한 문관의 우위가 현저히 드러난다. 가령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은 5과에 해당하는 데 비하여 같은 정3품의 문관인 상서(尙書)는 4과에 해당하여 더 많은 전시를 받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마군(馬軍) · 보군(步軍)의 군인층이 분급 대상에 포함된 것도 개정전시과의 한 특징이었다.

한편 1076년의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도 18과로 나누어 분급했지만 몇 가지 사항에서 차이가 있었다. 우선, 한외과(限外科)의 소멸을 들 수 있다. 즉, 이전까지 18과에 속하지 못하고 토지를 받던 계층이 모두 과내로 흡수되었다. 이로써 전시과는 외형상 완결된 토지분급제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산관이 분급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되었으며, 무관에 대한 차별 대우가 사라지고, 군인에 대한 대우도 이전보다 나아졌다. 그리고 향직(鄕職)이 새로이 분급 대상에 포함되었다. 향직은 고려 초기의 관계가 변화된 것으로 중국식의 당풍(唐風)에 대한 고려식의 국풍(國風) · 향풍(鄕風)을 의미하는 독자적인 질서 체계였다. 때문에 토지가 국왕 및 왕실에 대한 공로자나 70세 이상의 관직 없는 노인, 여진(女眞)의 추장(酋長) 등에게도 주어졌다. 비록 명예적인 칭호였지만 대상(大相) · 좌승(佐丞) · 원보(元甫) 등의 향직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12∼14과의 토지가 분급되었다.

분급 기준과 마찬가지로 분급액도 각 단계마다 차이가 있었다. 다만 최고 분급액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차 감소하였다. 시정전시과는 전 · 시 각 110결, 개정전시과는 전 100결, 시 70결, 경정전시과는 전 100결, 시 50결이었다. 특히, 시지의 분급이 현격히 감소하였다.

양반 · 군인 · 한인(閑人)의 분급액을 경정전시과에서 보면, 양반의 경우 종1품인 중서령(中書令) · 상서령(尙書令) ·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은 제1과로 각각 전 100결, 시 50결을 받았다. 이하 관리는 과등(科等)에 따라 전시의 액수가 감액되어, 양반 품관의 말단인 정 · 종9품은 제15과로 시지 없이 전 25결을 받았다.

한편, 품관은 아니지만 도필(刀筆: 문서기록)의 임무를 띠고 말단의 행정 업무에 종사하는 이속(吏屬)이 15∼17과에 속해 20∼25결을 받았다. 이들은 비록 비슷한 액수의 토지를 받았으나 관직 체계에 편입될 수 있는 입사직(入仕職)과 그렇지 못한 미입사직(未入仕職)으로 구분되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반면에 지방 행정 관청의 실무자인 향리(鄕吏)에 대한 토지분급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군인의 경우에는 마군이 제15과로 전 25결을, 역군(役軍) · 보군(步軍)이 제16과로 전 22결을, 감문군(監門軍)이 제17과로 전 20결을 받았다. 다만 군인은 수도 개경(開京)에서 근무하는 경군(京軍)에 한정되었고 지방군은 제외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비해 한인은 잡류(雜類)와 함께 가장 적은 제18과의 전 17결을 받았다. 한인은 과거(科擧)음서(蔭敍)를 통해 산직(散職)동정직(同正職)을 받고 아직 실직에 임명되지 않은 관인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때로는 군역에 보충되기도 하였으므로 양반과 달리 군인에 가까운 존재로 보는 의견도 있다. 잡류는 이속의 말단으로 잡역(雜役)을 담당하였으며 잡로(雜路)라고 불리는 그들 나름의 사로(仕路)에 따라 승진하였으나 품관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양반 · 군인 · 한인에게 분급된 토지는 각각 양반전(兩班田) 군인전(軍人田) · 한인전(閑人田)이라 불렸다.

이러한 분급 규정 외에 경정전시과에는 무산계전시와 별사전시가 규정되어 있다. 무산계전시는 무산계(武散階)를 가진 사람에게 토지를 분급하는 것이다. 관리의 품계를 나타내는 방법에는 문산계(文散階)와 무산계의 두 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 문산계는 문반 관리의 품계로, 무산계는 무반 관리의 품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문반 · 무반의 구분 없이 모든 품관 관리에게는 문산계가 주어지고, 무산계는 향리나 탐라(耽羅)의 왕족, 여진의 추장, 노병(老兵) · 공장(工匠) · 악인(樂人) 등 특수한 계층에게 주어졌다.

무산계는 종1품의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에서 종9품하의 배융부위(陪戎副尉)까지 29품계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무산계전시를 받은 것은 정3품에 해당하는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이하였으며, 그 이상의 품계에 대한 토지분급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분급액을 보면, 관군대장군과 운휘대장군(雲麾大將軍)이 각각 전 35결, 시 8결의 최고액을 받았으며, 이하 순차적으로 감액되어 배융교위와 배융부위가 각각 전 20결의 최하액을 받았다. 공장 · 악인 등의 무산계 소유자에게 토지가 분급된 것은 그들의 임무가 일종의 직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별사전시는 승과(僧科)지리업(地理業) 출신자를 대상으로 한 규정이었다. 고려는 불교와 풍수지리사상(風水地理思想)이 유행했으므로, 대덕(大德) 등의 법계(法階)를 가진 승려나 대통(大通) · 부통(副通) · 지리사(地理師) · 지리박사(地理博士) · 지리생(地理生) 등의 지사(地師)에 대해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 우대한 것이다. 모두 6등급으로 구분되어 최고 전 40결, 시 10결로부터 최하 전 17결의 전시가 분급되었다.

일반전시가 관리 및 직역 부담자에 대한 토지 분급제도라면, 일반전시의 미비점을 보충하는 것이 공음전시와 구분전(口分田)이었다.

1049년(문종 3)에 제정된 양반공음전시법(兩班功蔭田柴法)에 의하면, 분급 대상은 1품에서 5품까지로 구분되었으며, 1품의 문하시랑평장사 이상은 전 25결, 시 15결을 받았고, 이하 점차 감액되어 5품은 전 15결, 시 5결을 받았다. 다만 산관은 각 품의 분급액에서 5결을 줄였다. 이것은 일반전시와는 달리 자손에게 상속되었다. 관료가 사망해 일반전시가 국가에 회수되더라도 그의 유족은 공음전시로 관인 신분을 계속 누릴 수 있었다. 더구나 남계(男系) 자손이 없으면 여서(女壻) · 친질(親姪) · 양자(養子) · 의자(義子)의 순서로 상속되었다. 공음전시를 받은 자의 자손이 중죄(重罪)나 제명(除名)에 해당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으면 아들이 유죄라도 손(孫)이 무죄일 경우에는 공음전시의 1/3을 상속받았다.

공음전시는 종래 관리 선발 과정의 음서처럼, 5품 이상의 양반 관료를 위해 마련한 토지 분급의 특혜 조처였다고 이해되었다. 이에 따르면 위의 양반공음전시법에서 규정한 ‘품’은 곧 ‘관품’을 뜻하며, 특별한 유공자만이 아니라 5품 이상의 관료는 모두 혜택을 입었다. 이것은 977년(경종 2) 개국공신(開國功臣)이나 향의귀순성주(向義歸順城主)에게 분급한 훈전(勳田)을 계승한 것으로, 문벌귀족사회(門閥貴族社會)인 고려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제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에는 공음전이 5품 이상의 고위 관료만을 대상으로 하는 토지제도가 아니라, 모든 관리를 대상으로 하여 그들 가운데 특별한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지급하는 특별상여제였다는 견해가 널리 수용되고 있다. 이는 공음전의 지급 규정에 보이는 ‘품(品)’을 관품(官品) · 품질(品秩)의 품으로 보지 않고 단계를 의미하는 품종(品種)의 품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편 구분전은 관리나 군인의 유가족에 대한 보호의 대책으로 설정된 지목(地目)이다. 1024년(현종 15)과 1047년(문종 1)의 규정에 따른 구분전의 분급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편이 사망하고 연립(連立)할 자손이 없는 처(妻)의 경우, 남편이 6품 이하 7품 이상이면 전 8결, 8품 이하거나 전쟁에서 죽은 군인이면 전 5결이 분급되었다. 또 부모가 모두 사망한 뒤 남자 형제는 없고 미혼(未婚)의 여자일 경우, 아버지가 5품 이상이면 전 8결이 주어졌다.

이와 같이 생활 능력이 없는 과부(寡婦)나 미혼의 여자에게 구분전이 지급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후생적(厚生的)인 의미를 가진 토지임을 알 수 있다. 구분전 지급의 조건으로 자손과 남자 형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집안에 남자가 있으면 그들에 의해 생계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구분전의 또 하나의 분급 대상은 자손 · 친족이 없는 70세 이상의 늙은 군인이었다. 이들 역시 자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보호 대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처럼 구분전이 관리나 군인의 유가족에 대해서 지급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목적이 휼양(恤養)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등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구분전이라는 별도의 지목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시과로 지급된 토지가 관직과 직역의 승계에 따라 이어지면 그것이 영업전(永業田)으로 불렸으며, 승계가 불가한 경우 국가에 환수되면서 유가족의 생계를 위해 남겨진 토지가 구분전이었다고 한다. 결국 구분전은 전시과의 운영 원리에서 파생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공해전시는 중앙 및 지방의 행정 기관에 분급되어 해당 기관의 운영 경비를 조달하는 재원으로 사용된 토지를 말한다. 고려시대 각 관청은 독자적으로 설정한 재원의 소출(所出)에 의존해 필요한 재정을 지출하였다. 따라서 각 관청에서는 소요 경비를 조달할 재원으로 공해전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중앙 관청의 공해전도 있었으나 현재 그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지방 관청의 공해전에 대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주(州) · 현(縣)향(鄕) · 부곡(部曲)은 인정(人丁)의 수에 따라 각각 8등급과 3등급으로 구분하고, 역(驛) · 관(館)은 길의 크기에 따라 대로(大路) · 중로(中路) · 소로(小路)의 3등급으로 구분해 일정한 액수의 공수전(公須田) · 지전(紙田) · 장전(長田)을 분급하였다. 예를 들면, 1천 정(丁) 이상의 주 · 현에는 공수전 300결이 지급되었고, 5백 정 이상의 주 · 현에는 공수전 150결, 지전 15결, 장전 5결이 지급되었다. 이하 점차 감액되어 20정 이하의 주 · 현에는 공수전 10결, 지전 7결, 장전 3결이 지급되었다. 여기에서 공수전은 빈객 접대, 외관(外官)의 녹봉, 기타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것이고, 지전은 필요한 용지를 공급하기 위한 재원이었다. 장전은 향리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에게 분급된 토지로 추측되지만, 이것이 호장의 직전(職田)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지(田地) 외에 공수시지(公須柴地)도 분급되었다. 주 · 부 · 군 · 현의 경우에는 1천 정 이상이면 80결, 5백 정 이상이면 60결, 5백 정 이하이면 40결, 1백 정 이하이면 20결이었다. 12목(牧)은 인정의 다소에 관계없이 모두 100결이었다. 또한, 역은 도로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 50∼15결의 시지가 분급되었는데, 양계(兩界)보다는 동서도(東西道)의 역에 더 많이 분급되었다.

전시과에서 토지의 분급 대상과 분급액은 다양하게 규정되었지만 토지의 분급은 기본적으로 수조지의 분급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연구자마다 수조지가 어떤 토지 위에 설정되었는가부터 구체적인 경영 형태 및 성격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간단하게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전시과를 대표하는 양반전에 대해서 신라 말 고려 초 호족들이 소작제(小作制) 경영으로 지배하던 전장(田莊) 위에 설정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전시과가 제정될 무렵에 그 토지가 일단 국가에 회수되었다가 과거의 경영 형태를 그대로 보존한 채 양반전의 명목으로 다시 관리들에게 분급된 것이다. 그리하여 양반전을 경작하는 농민은 소출의 1/2를 전조(田租)로 양반 관료에게 납부하였다. 이때 수조지의 지배자인 양반 관료와 경작자인 농민 사이에는 토지의 경영 형태로서 전주(田主)- 전호(佃戶)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는 양반관료가 지주로서 그들의 수조지를 법적으로 소유한 상태에서 직접 지배 · 관리 · 경영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받아서 지급해 주는〔官收官給〕 전조를 일정 기간 취득할 뿐이었다. 즉 전주와 전호의 관계는 군현제(郡縣制)의 농민 지배를 매개로 하여 실현된 것이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양반전은 민전 위에 수조권이 설정된 토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민전의 주인은 대다수가 일반 농민이었고 이들의 사유지에 국가가 단지 수조권만을 허락한 것이 양반전의 실체였다는 의견이다. 때문에 1/2조와 같은 과도한 수취는 불가하였고, 양인이 국가에 바치는 전조와 마찬가지로 수확의 1/10을 수취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양반 본인의 토지 위에 수조권이 설정된 것으로 이른바 면조권(免租權)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휴한농법(休閑農法)과 같은 제약으로 인해 농민층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고, 민전에 기초하는 전면적인 수조권 분급제의 실시가 불가하였다는 의견이다. 이 밖에도 다른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의견 가운데 현재는 후자의 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군인전은 군인 자신의 민전이나 다른 농민의 민전 위에 설정되었다. 전자의 경우, 군인전의 소출이 전부 자신에게 귀속되므로 수조율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농민이 국가에 납부하는 전조를 대신 군인에게 납부하는 것이므로 수조율은 민전의 조율인 1/10를 초과하지 않았다. 또한 군인 자신의 토지가 너무 적어 군호(軍戶)로서의 구실을 못 할 때, 예외적인 조처로 공전을 가급(加給)하기도 하였다.

공해전은 주로 국가의 공유지로 편성되었으며, 그것이 소재한 촌락 농민의 요역(徭役) 노동에 의해 경작되거나 혹은 해당 관청에 예속된 관노비(官奴婢)의 노동력으로 경작되었으며, 농민을 이용한 소작제 경영도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전시과의 특징은 전지(田地) 이외에 시지(柴地)를 지급했다는 점이다. 시지는 976년 시정 전시과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개정과 경정전시과를 거치면서 분급 액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하지만 공해전 가운데 공수시지가 추가되고, 공음전에서도 처음에는 토지만 지급되다가 1049년(문종 3)에 양반공음전시법을 제정하면서 시지도 함께 주어졌다. 시지에서는 땔나무와 기타 생활에 필요한 산림 자원을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의 산림은 공유지로서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으나 풍수지리(風水地理), 음양설(陰陽說) 등의 영향으로 금령(禁令)이 있어 접근이 제한적이었다. 특히 개경은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로 땔감의 소요가 컸으므로 시지를 받은 관료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였다. 물론 시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로 활용하는 일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경정 전시과의 규정 말미에는 시지의 소재지가 명시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1일정과 2일정으로 나뉘어 있었다. 개경으로부터 하루, 이틀이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의미이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현재의 황해도, 경기도, 서울, 인천, 강원도 일부 지역에 속하며, 개성을 중심으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으나 북으로는 황해북도 서흥군이나 봉산군, 남으로는 경기도 김포와 인천광역시 부평구, 동으로는 강원도 철원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거리에 분포하였다.

변천 사항

전시과는 1076년(문종 30)에 마지막으로 정비되었지만, 이후에 개정되지 않았다. 즉 고려 토지제도의 근간으로 자리잡지 못한 채 점차 기능을 잃어 갔다.

전시과 체제하에서 전체 경작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민전이었다. 전시과를 대표하는 양반전과 군인전 역시 이들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였다. 민전의 일부는 내장택(內庄宅) 소속의 장전(莊田) · 처전(處田)으로 편성되어 그 전조가 왕실의 어수(御需)에 충당되었다. 또 일부는 우창(右倉)풍저창(豊儲倉)에 소속되어 국용(國用)의 기반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좌창(左倉)광흥창(廣興倉)에 소속되어 녹봉의 재원이 되었다. 그리고 군인전으로 편성된 민전과 양계의 민전은 물론 군비를 조달하는 데 할당되었다. 다시 말해 전시과의 근간은 민전이고, 민전을 경영하는 백정(白丁) 농민에 기반하여 전시과가 운영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농민과 그들의 삶의 터전인 민전이 붕괴될 경우 전시과 역시 운영 기반을 상실하게 됨은 자명한 일이었다.

1170년(명종 즉위년) 무신정권의 성립 이후, 권력자들에 의한 불법적인 토지탈점(土地奪占)이 전개되고, 전국적으로 대토지 소유를 뜻하는 농장(農莊)이 광범하게 설치되면서, 수조지의 분급에 기초한 전시과 체제는 무너지게 되었다. 자영 농민에 대한 수취에 의존해 있던 국가의 재정 구조는 파탄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몽골과의 전쟁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대해 고려 정부는 권세가에게 강제로 빼앗긴 토지와 농민을 되찾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고, 녹봉을 보충할 목적으로 녹과전(祿科田)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이러한 시도는 전시과 체제의 복구를 위한 노력이었다. 하지만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전시과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고려 말 사전개혁(私田改革)을 통해서 만들어진 과전법(科田法)은 조선의 토지제도로 새롭게 시행되었다.

의의 및 평가

전시과는 국가에서 관직과 직역에 복무하는 사람에게 그 대가로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였다. 그리고 토지를 매개로 한 관직 및 직역의 수행이 지속되도록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문무 양반으로부터 군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토지 분급의 대상이 되므로 공무를 담당하는 시스템이 전시과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과전법의 분급 대상이 관인으로만 한정된 것에 비하면, 직역 부담자에게도 토지를 지급했다는 점은 전시과의 독특한 역사성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강진철, 『고려토지제도사연구』(고려대학교 출판부, 1980)
이성무, 『조선초기양반연구』(일조각,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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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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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오치훈(경기대학교 조교수, 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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