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현제는 전국을 몇 개의 행정구획으로 나누고 여기에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던 중앙집권적 지방행정 제도이다. 한국의 군현제는 중국의 것을 도입한 것이나 실제 운용 측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전근대사회는 국왕권과 그를 뒷받침하는 관료제에 입각한 집권체제를 기반으로 하였다. 이는 국가의 명령을 지방에 전하고 민으로부터 각종 세역을 수취하여 물적인 토대를 구축할 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한 토대를 실현하는 매개체가 바로 군현제이다.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부터 발달한 것으로, 주나라의 종법적(宗法的) 봉건제도를 대체하여 나갔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군현의 설치가 확대되었고, 군이 현보다 상위 단위로 발달하였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는 전국에 군현을 두고, 군수(郡守) · 현령(縣令)을 파견하였다. 한대(漢代) 이후 군현제는 보강 · 강화되어 중앙집권적 지방행정제도로 발달하면서 중국 지방통치체제의 근간이 되었다.
고대국가가 성장함에 따라 확대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필요성이 나타났다. 이에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군현제가 정비되었다. 3~4세기 신라는 주변 소국을 복속시킨 후, 해당 지역을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주변 소국의 지배 질서를 인정한 채 수장층을 이용하여 공물을 수취하거나,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5~6세기 철제 농기구를 보급하고 관개시설을 정비함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증대하면서, 호민이 성장하는 등 계층분화가 발생하였다. 6세기 초 읍락을 촌(村)으로 편제하여 국가 지배 질서로 흡수하며 ‘주(州) · 군(郡) · 촌’으로 구축된 주군제가 성립하였다. ‘주 · 군 · 촌’에는 군주(軍主) · 당주(幢主) · 도사(道使)가 파견되었다.
신라 중고기에는 주 · 군 · 촌[성(城)]과 소경(小京)이 지방 지배 단위로 기능하였다. 주는 협의의 주로서 주의 치소인 주치(州治)나 군대의 주둔지인 정(停)과 광의의 주로서 행정적 편제 단위인 ‘주 영역’이나 광역의 ‘군관구’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자는 군주, 후자는 주행사대등(州行使大等)이 관장하였다고도 한다. 신라 중고기에 주는 행정구역보다 군사 거점의 성격이 강하였고, 전쟁으로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주를 계속 설치하너나 통폐합하였으며, 주치를 옮기는 사례가 빈번했다.
군의 영역은 ‘협의의 주’와 비슷하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몇 개의 촌을 포괄하는 감찰 구역으로 이해하거나, 촌 단위의 비균질성을 보완하고 수취의 편의를 위하여 설정한 광역 행정단위로 이해하기도 한다. 군에는 당주 · 나두(邏頭) 등이 파견되었다. 중고기의 지방관은 행정적인 성격보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의 지방 조직도 군정적(軍政的) 체계가 나타난다. 고구려는 전국을 대성(大城) · 성(城) · 소성(小城)으로 구획하고, 욕살(褥薩) · 처려근지(處閭近支)나 도사(道使) · 누초(婁肖) 등을 파견하였다.
모든 성에는 지방관을 보좌하는 속료로 가라달(可邏達)을 파견하였다. 이들 지방관은 고구려 전성기에 있었던 광역의 수사(守事), 군(郡)급 성의 태수(太守), 성(城) · 곡(谷) · 읍(邑)의 재(宰) 등이 계기적 발전을 거쳐 전환되었다고 여겨진다. 고구려는 다종족 국가였고 끊임없는 군사 활동을 수행하여 일원적인 편제를 갖춘 지방 지배를 관철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지방 통치는 성을 위주로 수행되었다고 이해된다.
백제의 지방제도는 사비(泗沘: 지금의 부여)로 천도한 후에 큰 변화를 보인다. 67세기에 백제의 지방은 5방(方) · 37군(郡) · 200성(城)으로 편제되었고, 방 · 군에는 방령(方領) 1인 · 군장(郡將) 3인을 두었다. 방령 1인이 610개의 군을 관장하였고, 군장은 민사 · 군사 · 행정의 일을 분담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백제의 지방제도는 5방의 하위 단위인 군 · 성을 중심으로 군현제적 지배 질서를 확립하였다.
군은 사비 천도 이전의 ‘ 담로(擔魯)’와 연결선상에 있으며, 37개 군은 방과 여러 소성을 연결하는 실질적 행정단위로 기능하였다. 성이 지방제도의 말단 단위로 나타나 민정적 성격보다 군정적 성격이 강조되는 이유는 산성 축조를 비롯하여 전쟁이 빈번히 수행되던 삼국시대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뒤 신라는 전정(田丁) · 호구(戶口)에 따라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다. 자연촌을 기초로 삼아 9주(州) · 5소경(小京)을 두고, 주 아래 군 · 현과 향 · 부곡 등을 두었다.
9주는 경덕왕 때 정비되었는데, 옛 고구려 지역에 한산주(漢山州), 수약주(首若州), 하서주(河西州), 백제 지역에 웅천주(熊川州), 완산주(完山州), 무진주(武珍州)), 신라 지역에 사벌주(沙伐州), 삽량주(歃良州), 청주(菁州)가 각각 편제되었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옛 땅에 각각 3주씩을 두었다.
신라의 소경은 514년(지증왕 15)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을 두면서 나타나지만, 중고기에는 전국적이고 통일적인 체계를 갖추지는 않았다. 삼국통일 뒤에도 일시에 5소경을 두지 않았다. 678년(문무왕 18)에 북원소경(北原小京: 지금의 원주)을,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 지금의 김해)을, 685년(신문왕 5)에 서원소경(西原小京: 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 지금의 남원)을 두었고, 557년(진흥왕 36)에 둔 국원(國原)소경을 중원(中原)소경으로 고치면서 5소경 체제를 갖추었다.
5소경은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는 부분을 보완하고, 가야 · 백제 · 고구려의 옛 땅을 설치하기 위한 거점이자, 피정복민을 사민화시키는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소경에는 사신(仕臣)을 파견하였다.
통일신라는 지방을 주 · 군 · 현으로 구분하고, 주 · 군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영현(領縣)을 거느렸다. 주 · 군은 평균 2개 정도의 영현을 거느렸고, 주 · 군 · 현에는 도독(都督) · 태수(太守) · 현령이나 소수(少守) 등이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주의 장관은 종래의 군주를 661년(문무왕 원년)에 총관(摠管)으로 고쳤다가 785년(원성왕 원년)에 도독으로 칭하였다. 통일신라의 지방관은 행정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나, 총관은 주의 장관보다 당(幢) · 정 등의 장군 칭호와도 관계가 있다. 이 외에 하대가 시작되는 선덕왕(宣德王) 때에는 북방을 개척하고 방어하기 위하여 특별 군사행정 지역인 패강진(浿江鎭, 지금의 황해도 지역)을 두기도 하였다.
9주 5소경제는 전국을 일원적인 수취망으로 편성하여 민을 직접 지배하는 군현제가 성립하였음을 의미한다. 이후 이를 토대로 경덕왕 대(742765)에 군현을 개편하고, 애장왕 대(800809)에 12도로 사신을 보내 군ㆍ읍의 경계를 정하는 등 군현 지배체제가 확립되면서 민에 대한 국가의 지배방식은 큰 전환을 이루었다.
고려 초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협조한 인물의 출신지를 주(州) · 부(府) 등으로 승격시켰지만, 고려에 항거하거나 비협조적인 지역은 읍호를 강등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초에는 호족 중심의 지역 편제라는 변화가 반영되면서 전국적 규모로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였고, 일부 군현을 중심으로 국가의 지방 지배가 이루어졌다.
국가체제가 정비되어 가던 983년(성종 2)에 최승로의 건의로 12주목(州牧)을 두었다. 12주목은 9주 · 5소경 지역으로 지방행정의 중심축 역할을 해온 곳이거나, 후삼국 통일전쟁 당시 군에서 승격된 군현에 두었다. 이곳에 민정적 성격의 외관이 파견되어 국가의 지방 지배를 관철하는 단초를 열었다.
995년(성종 14)에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전국을 10도, 즉 관내도(關內道),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洋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로 나누었다. 패서도는 주 · 현과 진(鎭)을 분속하였고, 9도는 주 · 현을 분속 · 관할하였다. 당시의 도는 최상위 지방행정 단위가 아닌 감찰 구역에 가까웠다.
거란 전쟁 이후 12주목을 12군(軍)으로 개편하면서, 지방관의 명칭도 절도사(節度使)로 바뀌었다. 12절도사, 2 유수(留守), 4 도호부사(都護府使), 7 도단련사(都團練使), 11 단련사(團練使), 15 방어사(防禦使), 15 자사(刺史) 등도 파견되었다.
1018년(현종 9)에 4도호(都護), 8 목(牧), 56지주군사(知州郡事), 20현령, 28진장(鎭將)을 두었다. 현종 대에 외관을 파견한 군현은 읍호의 등급과 관격(官格)을 구분하였고,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116군현)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366군현)과 관계를 맺으면서 지방행정의 중심축으로 기능하였다. 따라서 고려 군현제는 1018년에 일단 완성되었다.
집권화가 진행되면서 중앙에서 외관이 파견되어 직접적으로 지방을 통치하였고, 중앙과 지방의 지배집단이 점차 차별화되고 분화하였다. 예종 대에는 전국을 5도(道) 양계(兩界)로 정비하고, 도에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하여 각 도의 주 · 현을 순안(巡按)하였다.
고려 군현제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주현과 주현에 예속되어 행정적 지배를 받은 속군 · 속현이 있다. 속현의 모든 행정 사안은 주현을 통해 중앙정부와 연결되었다. 또 속현에 지방관인 감무(監務)를 두기도 하였다. 군현의 수는 통일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고, 다수의 지방행정 단위도 존재하였다.
둘째, 군현 아래 향(鄕) · 소(所) · 부곡(部曲) · 처(處) · 장(庄) 등의 특수 행정구역이 많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향 · 부곡은 지역의 규모를 기준으로 한다고도 하나 군 · 현의 강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주 · 현이나 향 · 부곡의 기준을 일률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고, 향 · 부곡도 군 · 현의 승강에 따라 다른 군 · 현으로 이속되기도 하였다. 14세기 후반에는 토지와 인구가 적어 영세한 속현이나 부곡을 주현에 통폐합하는 군현병합책을 시행하여, 374개의 속현은 143개로 대폭 축소하고, 부곡은 거의 소멸하였다.
조선왕조 초기의 군현제는 고려 말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다가 제3대 태종(太宗) 때부터 본격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우선 고려의 이원적인 5도 · 양계를 일원적인 8도(道) 체제로 확립하였다. 8도제의 목적은 중앙과 각 군현 단위를 연결하는 중간 기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도의 명칭은 각 도내 주요 계수관(界首官) 소재지 읍명의 첫 글자를 따서 붙였다.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 평안도는 평양와 안주의 첫 글자를 딴 것이었다. 8도의 장관은 처음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내지 안렴사(按廉使)라 불렸으나 세조 때에 관찰사(觀察使)로 통일하였다.
이어 중앙집권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분적 · 계층적 성격의 고려 군현을 명실상부한 행정구역으로 개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속현과 향 · 부곡 · 소 · 처 · 장 등을 소멸시키고, 직촌화(直村化)하는 임내(任內)의 정리, 작은 현의 병합, 군현 명칭의 개정 작업을 단행하여 최하 촌락들을 면리제로 점차 개편하여 나갔다.
태종과 세종 연간의 제도 시행 결과를 반영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지방행정은 중앙 직할지 5부와 8도, 그 아래 4부(府), 4대도호부(大都護府), 20목, 44도호부, 82군, 175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군현들이 명호상 부 · 목 · 군 · 현의 구분에 따라 읍격(邑格)에 차등이 있고 수령들의 벼슬 등급 역시 차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군현들은 각각 독자적인 행정 영역을 가지고도 아래에 병렬적으로 편성되어 통치 기능을 수행하였다.
조선 왕조는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하여 다소 수준이 낮은 감무를 사류(士類) 출신의 현감으로 대치하고, 종래 군현의 실질적 지배자 위치에 있던 향리를 점차 지방 관서의 행정 사역인으로 격하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수령권을 강화하여 향촌 토호 세력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직접 지배하려는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당시 조선 정부의 목표였던 것이다.
조선 왕조는 편의적으로 자치적인 자연촌락을 일정 호수 단위로 분할하여 그것을 면이나 방(坊) · 사(社) 등으로 조직하고 그 밑에 리(里)나 동(洞) 등의 형태로 편성하였다. 1485년(성종 16) 조선 왕조는 ‘5호를 1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고 5통(25호)을 1리로 하여 이정을 두며, 각 면에 권농관을 두어 오가통 조직과 그것의 확대 편제로서 면리제를 설정하였다. 이를 통해 수령을 중심으로 지방사회를 통제하면서 민에 대한 교화 · 권농 · 수취체제 운영을 모색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농업기술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증대됨에 따라 자연촌이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전기의 방위면(方位面) 체제가 해체되고 방위면 아래의 리가 면으로 승격하였으며, 그 아래에 자연촌이 하나 또는 몇 개의 리로 편제 · 분화되었다. 군현제 · 면리제의 공적 사회제도가 활성화되기에 이르렀다.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고종 32) 8도제가 없어지고, 소구역주의에 입각한 23부제가 실시되었다. 이로 인해 종래 부 · 목 · 군 · 현이 모두 337군으로 단일화되었다. 각 부에는 칙임(勅任) 3등 이하 주임(奏任) 2등 이상의 관찰사 1인, 주임 4등 이하의 참서관(參書官) 1인, 판임(判任)의 주사(主事) 약간 명을 두고, 각 군에는 주임관인 군수 1인씩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23부제는 행정이 불편하고 번거로우며 재정상의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 칙령 제35호를 발령하여 폐지하고 이어서 내린 칙령 제36호 제1조에 의거하여 현대 대한민국 행정구역의 원형인 13도제가 실시되었다. 13도 밑에는 8부 · 1목 · 332군이 존재하고 있었다. 내용에 있어서도 지방관원의 임용 절차와 보수 규정, 면리의 운영 등에 있어서 23부제에 비해 달라진 것이 많았으나, 관찰사를 내부대신의 감독 아래 두게 하고, 지방관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등의 기본 정신에는 차이가 없었다.
한국의 군현제는 중국의 것을 모방하였지만 실제 운용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고대와 중세의 한국 사회는 국왕권과 왕을 뒷받침하는 관료제에 입각한 집권체제를 기반으로 하였다. 이는 전국의 민으로부터 각종 세역을 수취하여 물적인 토대를 구축할 때 유지될 수 있다. 그러한 토대를 실현하는 매개체가 바로 군현제이다. 물론 운용과정에서 향리와 지방관의 수탈 같은 폐단도 발생하였지만 그럼에도 군현제는 고대 · 중세 집권체제의 형성과 발전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