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려근지는 고구려 후기 지방통치 구조에서 중성에 파견된 지방관이다. 고구려는 성(城)과 곡(谷)을 중심으로 직접적으로 지배하다가 6세기에 대성·중성·소성의 3등급으로 구성하여 일원적 체제를 마련하였다. 상하 간 영속적인 관계로 대성에는 당의 도독(都督)에 해당하는 욕살이, 소성에는 현령(縣令)에 해당하는 누초가 있었다. 중성에는 자사에 비견되는 처려근지를 파견하였는데, 중간급 이상의 지방관으로 휘하에는 소성들을 거느렸다. 대체로 제7위 대형 이상의 관등 소지자가 임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고유어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고구려의 지방 제도는 3세기까지는 부와 속민체제를 근간으로 한 간접 지배 방식이었고, 4~5세기는 성(城)과 곡(谷)을 중심으로 직접적 영역지배를 확대해 가다가 6세기에 이르러 대-중-소 3등급의 성을 단위로 한 일원적 체제를 마련하였다.
고구려 멸망기 사료를 보면 당시 고구려에는 176개의 성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구려의 지방 행정 조직은 이들 성을 단위로 중층적으로 편제되었다.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 의하면 7세기 무렵 고구려 지방 통치 구조는 성의 크기를 기준으로 대-중-소 3단계로 나뉘고, 그 등급에 따라 대성에는 당의 도독(都督)에 비견되는 욕살이, 중성에는 자사에 비견되는 처려근지가, 소성에는 현령(縣令)에 비견되는 누초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상하 간 영속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고려전에는 당시 고구려에 60주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처려근지급 이상의 성들만 추린 것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처려근지는 3단계의 지방 행정 단위 중 중성에 파견된 지방관이다. 그리고 5세기의 지방관인 수사(守事)를 계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중국의 자사에 비견된다는 것으로 보아 처려근지는 중간급 이상의 지방관으로 고구려 후기 지방 제도에서 허리와 같은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휘하에는 소성들을 거느렸고, 처려근지의 치소는 ‘비(備)’라고 불리었다.
처려근지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7세기 무렵 고구려 정치 체제에 관한 기록이 있는 『한원』에는 당시 고구려의 지방 관제를 소개하고 이어서 무관직에 대해 서술하면서 대모달(大模達)의 다음으로 두 번째 고위 무관인 말약(末若)이 대형(大兄) 이상으로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고대 국가 관제의 특성상 관직에 따라 담당할 수 있는 관등이 정해져 있었고, 고구려 역시 중앙 관직과 무관직에 그러한 기준이 있었다. 지방관도 이에 준하여 임명되었을 것이 분명하므로, 지방관 중 두 번째 고위직인 처려근지는 무관과 마찬가지로 제7위 대형 이상 관등의 소지자가 보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무관의 최고위직인 대모달에 제5위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이상으로 임명케 한 규정이나, 지방관 최고위직 욕살에 조의두대형 이상 관등의 소지자가 임명된 사례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가 있다.
『한원』에는 처려근지는 일명 도사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 고유어 처려근지가 한문식 표현인 도사로도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처려근지나 도사라는 관명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지방 행정 단위인 성의 책임자로 ‘성주’라는 호칭이 자주 보이는데, 이 중 일부를 성의 규모와 중요도 등을 고려해서 처려근지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근거는 『한원』 번이부 백제조에 성주를 도사라고도 불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