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4세기경부터 각 방면 교통로의 성(城)과 곡(谷)을 단위로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성수(城守)와 곡수(谷守)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수사’는 이러한 계통의 지방관으로 5세기 전반 「모두루묘지 牟頭婁墓誌」에 ‘영북부여수사(令北夫餘守事)’, 5세기 후반에 건립된 「중원고구려비 中原高句麗碑」에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등의 사례가 보인다.
북부여는 송화강 중류의 길림일대에 위치하였던 부여의 중심지이고, 고모루성은 광개토왕이 396년(영락 6) 백제로부터 획득한 58성 가운데 하나이다. ‘수사’는 4·5세기경 각 지방 중심지에 파견된 지방관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모두루의 조부들이 북부여 지역의 성민(城民)·곡민(谷民)을 다스렸다고 하므로 수사는 여러 성·곡을 통괄하던 상위 지방관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모루성수사가 모종의 군사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군사지휘관을 겸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로 보아 수사는 ‘수(守)’라는 명칭처럼 수(守)-재(宰)라는 2단계 지방통치조직의 상위 지방관 또는 군(郡) 태수(太守)와 동일한 실체로 파악된다. 이에 비해 수사를 여러 군급(郡級)·현급(縣級) 행정단위를 포괄하는 3단계 지방통치조직의 최상위 지방관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