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전반 이 교통로에는 남도와 북도 두 갈래가 있었다. 남도가 험하고 좁았던 반면 북도는 평탄하고 넓었다. 남도상에는 목저성(木底城)이 위치했다고 한다.
342년(고국원왕 12)전연(前燕)모용황(慕容皝)이 남도로 기습 공격했을 때, 고국원왕은 전연이 북도로 침공하리라 예상하고 북도로 주력군을 파견하고, 나머지 군대를 거느리고 남도 방어에 나섰다가 목저성에서 크게 패하였다.
남도와 북도의 종착점을 국내성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별로 없지만, 분기점에 대해서는 분분하다. 일반적으로 혼하(渾河)·소자하(蘇子河) 합류지점을 분기점으로 보지만, 혼강(渾江)·부이강(富爾江) 합류지점, 부이강 상류의 왕청문, 소자하 연안의 영릉진 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 밖에 국내성을 종착점으로 설정하지 않고 혼하·소자하 합류지점에서 흑구산성(黑溝山城), 요동평원에서 소자하, 전연의 수도인 용성(龍城 : 朝陽)에서 혼강 등에 이르는 교통로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남·북도 경로의 다양한 견해는 ‘남도험협(南道險狹)’·‘북도평활(北道平闊)’을 기준으로 삼아 경로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도상의 목저성이 소자하 연안에 비정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남도가 소자하 연안을 경유한 것은 틀림없다.
한편, 남도가 국내성∼요동지역의 전통적인 교통로, 북도는 고구려∼부여 및 요동∼부여 교통로의 일부가 합해진 오래된 경로라는 사실에 착안해 4세기경 남도·북도 등 각 방면 교통로를 매개로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던 모습을 밝힌 연구성과가 제기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