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國)’은 수도라는 뜻으로 ‘국중대회’는 수도에서 개최되었던 대규모 제천행사를 의미한다. 국중대회는 왕실을 비롯해 고구려·부여를 구성하던 여러 단위 집단의 대표들이 참석하는 국가적 차원의 제천행사였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삼한(三韓)의 5월제·10월제 등 3세기 동이(東夷) 사회에서 행해지던 제천행사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국중대회’라는 표현은 부여·고구려의 제천행사에만 사용하고, 동예·삼한의 제천행사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는 각 동이사회의 정치적 발전 정도와 밀접히 연관된다. 정치적 발전이 상대적으로 늦었던 동예·삼한에서는 읍락(邑落)이나 소국(小國)을 단위로 행해졌기 때문에 국중대회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을 정점으로 지배체제가 성립된 부여·고구려에서는 수도에서 대규모로 열렸기 때문에 이를 ‘국중대회’라고 표기했던 것이다.
물론 수도에서만 제천행사가 열린 것은 아니다. 3세기 고구려에서는 본래 국주(國主)였던 소노부(消奴部)도 여전히 종묘(宗廟)를 세우고, 영성(靈星)·사직(社稷)에 제사를 지냈다.
소노부를 비롯한 각 나부(那部)나 집단들도 각기 제의를 개최했던 것이다. 따라서 국중대회라는 표현은 읍락이나 소국을 단위로 분산적으로 행해지던 제천행사가 ‘국(國)’, 즉 왕권을 중심으로 통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에서는 계루부를 비롯해 각 나부(那部)의 대표들이 참여했고, 부여에서는 사출도(四出道)를 통솔하던 대·소가(大·小加)들이 참석하였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왕의 주재 아래 일신(日神)과 수신(隧神)에 대한 제의를 행하였다. 일신은 천신(天神)으로 모셔진 시조 동명(東明)이고, 수신은 농업신적 성격을 지닌 유화부인(柳花夫人)이었다.
동쪽 수혈(隧穴)에서 맞아 오는 수신은 유화를 신격화한 지모신(地母神)으로 보거나 수혈신(隧穴神)으로 이해하고 이를 몽골이나 탁발족에서 확인되는 동굴신앙과 비교하기도 한다.
수신이 동굴에 모셔졌다가 장소를 이동하여 제사되는 것은 건국신화에서 유화가 유폐되었다가 빛을 받아 주몽을 잉태하던 모습을 상징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제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한 해의 풍요를 가져다준 일신·수신에 대해 감사와 기원을 드리는 수확제적 성격과 계루부 왕실의 조상신에 대한 제사의 성격을 동시에 지녔던 대회였다.
국중대회는 단순한 제천행사가 아니라, 각 나부의 대표들이 계루부 왕실의 시조를 고구려 전체의 공동시조로 받아들이고, 계루부 왕권에 대한 복속을 약속하던 정치적 제의로서의 기능을 지녔다.
계루부 왕실은 국중대회를 주재함으로써 계루부가 고구려의 ‘국(國)’임을 재확인하는 한편, 독자적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던 각 나부에 대한 영도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각 나부의 지배세력과 주민들은 계루부 왕실의 조상신을 고구려족 전체의 공동시조로 받아들임으로써 상호간에 동질감을 함양하는 한편, 피정복집단에 대해 원고구려족의 집단적 우위성을 과시하였다. 이처럼 국중대회는 정치적 제의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지녔다. 따라서 국중대회 때에는 각종 정치적 집회를 개최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구려에서는 제가회의(諸加會議)를 개최해 국가중대사를 의결하는 한편, 주요 범죄자를 처결하고 죄수를 사면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국중대회 때에 표출되었던 계루부 왕실의 신성족(神聖族) 의식은 4세기 이후 영역확장 및 중앙집권체제 확립에 따라 고구려를 천하(天下)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관념으로 확대·발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