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경 ()

고대사
제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지방에 설치한 작은 서울을 이르는 5개의 특수 행정 구역.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신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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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오소경은 신라시대에 지방에 설치한 작은 서울을 이르는 5개의 특수 행정 구역이다. 오소경은 국원소경 · 금관소경 · 서원소경 · 남원소경 · 북원소경을 말한다. 757년(경덕왕 16)에 중원경 · 김해경 · 서원경 · 남원경 · 북원경으로 고쳤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수도의 편재성을 보완하고,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과 수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지방에 설치한 작은 서울을 이르는 5개의 특수 행정 구역.
중고기 소경의 설치

514년(지증왕 15) 정월에 아시촌(阿尸村)에 소경을 설치하고, 왕경 6부와 남쪽 지방 사람들을 옮겨 그곳에 살게 하였다. 아시촌을 아시혜현(阿尸兮縣)과 동일한 곳으로 이해하여 오늘날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으로 보는 견해, 아시량군(阿尸良郡)과 연결하여 경상남도 함안군으로 보는 견해, 6기정(畿停)의 하나인 관아량지정(官阿良支停)과 같은 곳으로 보아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으로 이해하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다. 이 가운데 안계면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지지를 받고 있다.

의성군 안계면은 신라 수도 경주에서 낙동강 중 · 상류와 소백산맥 이남 경상북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신라는 서북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에 알맞은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고, 왕경 6부와 남쪽 지방 사람들을 그곳에 이주시켜 개발한 것으로 짐작된다.

557년(진흥왕 18)에 국원(國原)을 소경으로 삼고, 다음 해에 귀족 자제와 6부의 호민(豪民)들을 옮겨 그곳에 살게 하였다. 국원은 오늘날 충청북도 충주시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신주(新州)를 두어 통치하였다.

국원은 신라의 수도 경주와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 및 소백산맥 주변 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 통제하고, 한강 유역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를 침략하는 외적의 방어를 위해 국원을 소경으로 삼은 것으로 짐작된다. 일반적으로 국원소경의 설치와 동시에 아시촌소경을 폐지하고, 거기에 살던 왕경 6부인을 국원으로 이주시켰다고 이해하고 있다.

신라는 639년(선덕왕 8) 2월에 하슬라주(강원도 강릉시)를 북소경으로 삼았다. 강릉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북부 동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신라는 동해안의 여러 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 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강릉에 북소경을 설치하였다고 짐작된다.

655년(태종무열왕 2)에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연합하여 신라의 북경(北境)을 침략하여 33성을 빼앗았다. 이때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말갈이 신라를 공격하여 강릉 근방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신라는 658년(태종무열왕 5) 3월에 하슬라의 땅이 말갈과 잇닿아 있어 사람들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북소경을 폐지하고 하슬라주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설치한 소경 가운데 국원소경만이 유일하게 남게 되었다.

오소경의 완비

678년(문무왕 18) 정월에 오늘날 강원도 원주시에 해당하는 평원군에 소경을 설치하고, 그곳을 북원소경(北原小京)이라 하였다. 원주시는 남쪽으로 남한강을 통해 충주와 연결할 수 있고, 북쪽으로 우수주(牛首州)의 치소(治所)인 춘천과, 동쪽으로 대관령을 넘어 하서주(河西州)의 치소인 강릉과 연결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옛날 고구려의 영토였던 강원도 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 통제하기 위하여 원주시에 북원소경을 설치하였다고 짐작된다.

680년(문무왕 20)에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 가야군은 옛날 금관국( 금관가야)이 있었던 경상남도 김해시에 해당한다. 김해시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양산을 거쳐 남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을 이용한 수로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옛날 가야 지역에 해당하는 경상남도 지역을 지배 통제하기에 가장 적합한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였다고 짐작된다.

신라는 685년(신문왕 5)에 9주를 정비함과 동시에 충청북도 청주시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에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여 5소경을 완비하였다. 신라가 청주 지역에 서원소경을 설치한 첫 번째 이유는 청주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부여나 공주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여서 옛 백제 지역을 지배 통제하기에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로 통일신라 시기에 청주가 경주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관문항 당항진(당은포)에 이르는 당은포로에 있어서 중국과 신라를 오가는 사신이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던 길목에 해당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대구를 거처 고령, 합천, 거창을 지나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나주시 및 전라북도 전주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신라는 옛 백제 지역인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 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고룡군에 남원소경을 설치하였다고 짐작된다.

소경이 설치된 지역은 모두 신라의 수도 경주와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옛 가야와 백제, 고구려 지역을 통제하기에 적합한 전략 거점이었다. 결국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를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 소경을 더 설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통일신라 시대의 소경은 수도가 신라 영역 동 남쪽에 편재한 관계로 신라 전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이른바 배도(陪都) 또는 부도(副都)로서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지니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57년(경덕왕 16)에 국원소경을 중원경(中原京), 북원소경을 북원경, 남원소경을 남원경, 금관소경을 김해경, 서원소경을 서원경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755년(경덕왕 14)에 제작된 「신라 백지묵자 대방광불화엄경 사경 발문」에 남원경이란 표현이 보여, 757년 이전에도 단지 ‘~경’이라 부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해경은 동원경(東原京)이라고도 하였다.

오소경의 설치 배경과 통치체제

현재 신라의 수도가 한반도 동남쪽에 편재하여 지방을 효율적으로 지배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소경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찍이 신라가 영토 확장에 따른 지방 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고, 피정복 지역의 지배층을 연고지로부터 유리시켜 재기를 방지하는 한편, 그 지배층을 회유 감독하기 위해 소경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밖에 지방에 파견된 6부 소속의 관리, 즉 지방관의 통치를 배후에서 지원해주기 위해 교통 요지에 왕경 6부 사람들을 이주시켜 소경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견해, 지방에서 거둔 수취물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도로 운송할 수 있는 교통 요지에 6부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소경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견해, 5세기 말 이후 신라 수도로 인구와 재화가 집중되자, 인구와 재화를 분산하기 위해 지방의 교통 요지에 소경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신라는 소경을 통치하기 위해 장관으로 사대등(仕大等)을, 차관으로 사대사(仕大舍)를 파견하였다. 사대등은 사신(仕臣)이라고도 부르는데, 관등이 급찬에서 파진찬까지인 자가 임용되었다. 사대사에는 관등이 사지에서 대나마까지인 자를 임명하였다. 9세기에 당나라의 경조부와 하남부, 태원부 등 3경부(京府)의 관직명에 견주어 사대등을 대윤(大尹), 사대사를 소윤(少尹)이라 불렀다.

가야 출신인 강수(强首)가 중원경 사량인(沙梁人)이었다. 또한 대가야에서 우륵(于勒)이 망명하자, 진흥왕은 그를 국원에 살게 하였다. 가야가 멸망한 이후에 가야인들 가운데 일부를 소경에 이주시켜 거주하게 하였음을 알려준다. 685년에 남원소경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그곳에 나누어 살게 하였는데, 통일 이후에 지방 사람들을 소경으로 이주시켜 거주하게 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9주의 치소 가운데 상주와 전주에서 사방 직선도로로 구획된 주거 공간을 중심으로 도시를 계획적으로 건설하였음이 밝혀졌다. 남원시에서 신라 수도 경주와 마찬가지로 평지에 사방을 일정하게 구획한 모습으로 도시를 건설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근거하여 9주의 치소뿐만 아니라 5소경 역시 도심지를 도시 계획에 의거해 정비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충청북도 청주시의 상당산성에서 발견된 기와편에서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에 있는 장지역(長池驛)이 사훼부(沙喙部)에 속하였다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서원소경도 신라 수도 경주와 마찬가지로 6부로 구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수가 중원경 사량인이었는데, 국원소경(중원경) 역시 6부로 구획하였음을 말해준다. 나머지 소경 역시 6부로 구획하였다고 짐작된다.

신라촌락문서」에 "서원경~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에 의거하여, 6부는 공식적인 행정 조직이 아니라 행정적인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설치한 6개의 구획 단위에 불과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신라는 5소경에 소경여갑당(小京餘甲幢) 16개를 배치하였다. 소경여갑당은 소경의 주민들을 징발하여 편성하였고, 군관으로 법당주법당감이 배속되었다. 다만 소경마다 몇 개의 소경여갑당을 두었는지 알 수 없다.

923년(경명왕 7)에 건립된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 탑비」에 "김해부(金海府)"라는 표현이 나온다. 870년(경문왕 10)에 작성한 「보림사북탑지」에 서원경을 서원부(西原部)로 표현하였다. 서원부는 서원부(西原府)를 가리킨다. 두 자료는 신라에서 9세기 후반에 당나라 유수부제(留守府制)를 수용하여 소경을 부(府)로 개편하였음을 알려준다.

신라 하대에 잦은 재해와 지배층의 과중한 수취로 인해 농민들이 도적이 되어 봉기하였다.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종종 주치(州治)에 거주한 진골 귀족이나 지방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는 지방 통제의 핵심 거점으로서 주치의 기능이 약화되자, 지방의 원활한 통제를 위해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5소경을 5부로 재편한 것으로 이해한다.

참고문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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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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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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