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성은 김씨,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아버지는 지증왕의 둘째 아들이자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다. 입종갈문왕은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이라 칭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 지소부인(只召夫人)이고, 비(妃)는 모량부 소속 박영실 각간의 딸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 삼국유사』에서는 식도부인(息道夫人)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입종갈문왕이 537년에 죽고, 540년 7월에 법흥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조카이자 외손자인 삼맥종이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가 『 삼국사기』에는 7살, 『삼국유사』에는 15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태후 지소부인이 섭정(攝政)하였다. 551년(진흥왕 12) 정월에 연호를 건원(建元)에서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는데, 이때부터 진흥왕이 전면에 나서 정국 운영을 주도한 것으로 이해한다.
「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 의하면, 신라가 540년대 후반에서 551년 사이에 충청북도 단양 지역에 진출하였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신라는 충주 지역까지 진출하였다고 짐작된다. 550년에 신라는 고구려의 도살성(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과 백제의 금현성(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이어 청주 지역도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하였다.
551년에 고구려의 내분을 틈 타,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을,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였다. 552년에 고구려는 서북쪽에서 거세게 압박하는 북제와 돌궐에 대비하기 위해 신라에 동맹을 제의하였고, 신라가 이에 응해 이른바 여라동맹이 체결되었다. 553년(진흥왕 14)에 신라는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통치하기 위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백제는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자, 554년(진흥왕 15)에 왜 · 대가야와 연합하여 관산성(충청북도 옥천)을 공격하였다가 신라군에게 패배하였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은 신라군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관산성 전투 승리 후 신라는 한강 유역을 확고하게 확보하고, 당항진(경기도 화성시 남양만)을 열어 중국과 직접 교통함으로써 삼국 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562년(진흥왕 23)에 이사부(異斯夫)가 신라군을 이끌고 대가야를 공격하여 멸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62년에 가라국과 안라국을 비롯한 임나(가야) 10국이 멸망하였다고 한다. 신라가 562년에 대가야(가락국)와 더불어 가야 소국들을 정복하여 가야 지역을 모두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하였음을 반영한다.
신라는 556년(진흥왕 17) 7월에 비열홀주(북한의 강원도 안변군 안변읍)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신라가 동북으로 비열홀까지 진출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후부터 568년(진흥왕 29) 사이에 신라는 북한의 함경남도 영광군 황초령과 이원군 마운령까지 북진(北進)하였다. 진흥왕이 신료들을 대동하고 두 곳을 순행하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568년에 「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와 「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진흥왕이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결과, 신라는 이전보다 3배나 더 넓은 영토를 개척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다. 왕비 역시 진흥왕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처하다가 614년(진평왕 36)에 죽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진흥왕은 재위 기간 불교를 진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544년(진흥왕 5) 2월에 법흥왕 때부터 천경림에 짓기 시작한 흥륜사(興輪寺)를 완성하였다. 이어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불교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549년(진흥왕 8)에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 각덕(覺德)이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귀국하자, 진흥왕은 백관들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또한, 565년(진흥왕 26)에는 진나라에 유학을 갔던 승려 명관이 진나라 문제(文帝)의 명으로 사신 유사(劉思)와 함께 불교 경론 1,7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각덕의 귀국과 불교 경론의 전래를 계기로 신라에서 불교 교리가 발전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553년(진흥왕 12)에 월성(月城) 동쪽에 황룡사(皇龍寺)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566년(진흥왕 27)에 완공하였다. 574년(진흥왕 35)에는 황룡사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여 안치하였다. 신라인들은 장육존상을 황룡사구층탑,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삼보(新羅三寶)로 받들었다. 또한, 566년에 경주 포석정 근처에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도 준공되었다.
551년에 고구려에서 망명한 법사 혜량(惠亮)을 승통(僧統)으로 임명하고 승정기구(僧政機構)를 정비하였다. 566년 황룡사를 준공할 때 최초로 백좌강회〔백고좌법회〕)를 열었는데, 혜량이 주관하였다고 알려졌다.
진흥왕은 스스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고, 두 아들의 이름을 전륜성왕의 이름을 빌려 동륜(銅輪), 사륜(舍輪: 철륜)이라 지었다. 진흥왕은 즉위 이후에 대규모 영토를 확장하면서 자신의 정복 활동을 정당화하고, 동시에 백성들을 무력이 아니라 정법(正法), 즉 불법(佛法)으로 다스리는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이라 자처한 것으로 짐작된다.
572년 정월에 연호를 태창(太昌)에서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551년 개국으로 연호를 바꾼 이래 정복 활동을 전개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나라의 위세가 높아졌다. 이에 진흥왕은 568년에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었다가 영토 확장 과정에서 고통을 당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전륜성왕으로서 불법의 힘으로 그들을 널리 구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572년 정월에 연호를 홍제로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572년(진흥왕 33년) 10월 20일에 전쟁에서 죽은 사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팔관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행사 역시 이 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545년(진흥왕 6)에 진흥왕은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국사』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고려시대에 편찬한 『 구삼국사』와 『삼국사기』에 『국사』의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일반적으로 김씨 왕실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 정치이념을 기초로 왕자(王者)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국사』를 편찬하였다고 이해한다.
진흥왕은 인재를 선발하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화랑도는 진골 출신의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로 구성되었다. 평소에 화랑과 낭도는 명산과 대천을 찾아다니며 도의(道義)를 연마하고, 무예를 익혔으며,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다가 전쟁이 발생하면, 전사 집단으로 전환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에 여성 중심의 원화제(源花制)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를 창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원화를 화랑으로 개편한 것은 562년(진흥왕 23) 이전이었다.
진흥왕은 대가야에서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망명하자, 그를 국원(國原: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에 살게 하고 제자를 양성하게 하였다. 이후 진흥왕은 가야금을 널리 연주하게 하여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삼았다고 한다.
진흥왕은 재위 37년 만인 576년 8월에 사망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진흥왕을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일반적으로 진흥왕릉은 경주시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북쪽에 자리한 서악동고분군 가운데 하나로 이해한다. 진흥왕의 첫째 아들 동륜 태자가 572년 3월에 사망하여, 진흥왕의 뒤를 이어 둘째 아들 사륜〔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