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金庾信)의 부인으로, 태종무열왕김춘추(金春秋)의 셋째 딸이다. 김유신과의 사이에서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등 아들 다섯과 딸 넷을 두었다.
그녀의 자녀들에 대한 법도는 대단히 엄하여 당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아들 원술이 감히 아버지 김유신을 보지 못하고 숨어 살다가 김유신이 죽은 뒤에 그녀를 뵙기를 청하였으나, 그녀는 “부인(婦人)은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는데, 지금 내가 과부가 되었으니 아들을 따라야 하겠지만, 원술은 이미 선군(先君)에게 아들 노릇을 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느냐.” 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712년(성덕왕 11) 8월에 부인(夫人)에 봉해졌다. 이 때 성덕왕은 “지금 안팎이 편안하고 군신이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곧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사물(賜物)이요,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려 서로 경계하여 음덕(陰德)의 공이 무성한 것이며, 과인이 그 덕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소. 남성(南城)의 조(租)를 매년 1,000석(石)씩 주겠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매년 곡식 1,000석을 받게 되었다. 뒤에 머리를 깎고 베옷을 입고 여승이 되어 생애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