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왕의 아들이며, 고국원왕의 아우이다. 요동(遼東)지방을 직접 장악하게 된 모용황(慕容皝)은 중국 내지로 진출하기에 앞서, 먼저 고구려와 우문씨(宇文氏)를 차례로 멸망시키려 하였다. 342년(고국원왕 12) 모용황은 4만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고구려는 모용황의 침입로를 험하고 좁은 남도(南道)가 아닌 평활한 북도(北道)로 예상하였으므로, 그는 정병 5만을 이끌고 북도를 방비하였다. 반면 고국원왕은 험하고 비좁은 남도를 소수의 약졸로 방비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모용황이 이끄는 주력부대 4만은 남도로 나갔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이 군사 1만5000명을 이끌고 북도로 쳐들어 왔다. 이에 남도를 방비하던 고구려군은 목저성(木底城 : 遼寧省 瀋陽과 撫順 사이)에서 모용황의 대군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북도에서는 왕우의 군대를 맞이하여 모두 패몰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황은 초조하게 되어 철수를 서둘렀다. 이때 모용황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거두어갔다. 그리고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포함한 5만여명의 남녀를 포로로 하여 끌고 갔다.
이듬해인 343년 고국원왕은 그 아우를 보내어 인질반환교섭을 벌인 끝에 미천왕의 시체만 돌려받았다. 이때 인질반환교섭사로 파견되었던 왕의 아우가 고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