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조에만 나타나는 관등이다. 246년(동천왕 20)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으로 고구려의 동천왕은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을 버리고 지금의 함흥일대인 옥저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 때 동부인(東部人) 유유(紐由)가 죽음으로써 막아 고구려는 위나라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동천왕은 전공을 세운 유유를 추증하여 구사자를 삼고, 유유의 아들을 대사자(大使者)에 임명하였다. 유유의 아들이 대사자에 임명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유유가 추증받은 구사자는 대사자 위에 있는 관등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구사자나 대사자 모두 『삼국지』위서 고구려조의 10개 관등명에는 속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사자(使者) 관등만 보이고 있어 3세기 중반기에 접어들어 사자·대사자·구사자의 순으로 사자계열 관등의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구사자를 신분의 차이에 따른 승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중위제(重位制)의 일면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지만, 믿기 어렵다.
중위제는 신분과 관등제의 일차적인 완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구사자라는 관등이 등장하는 3세기 중엽은 고구려의 관등체계가 완성되지 못한 상황이라는 점과, 신분과 관등에 대한 규정이 명시되었을 율령이 반포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