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신라 · 고려 · 조선 시대에서 각각 다른 의미로 승통이라는 말을 채택하여 사용하였다.
승통은 중국 북위(北魏)에서 처음 생겨난 것으로 사문통(沙門統) · 승통 · 사문도통(沙門都統) 등 세 가지 직책을 두었으며, 문성제(文成帝) 때에는 계빈국 승려 5인을 승통으로 위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에서 승통의 이름이 처음으로 보인다. 551년( 진흥왕 12)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화해 온 혜량(惠亮)을 승통으로 삼아 교단(敎團)을 지도, 육성하게 하였으며, 이 승통 밑에 대도유나(大都維那)와 도유나랑(都維那娘)을 두어 각각 비구교단과 비구니교단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 승통제는 자장(慈藏)의 귀국과 함께 그를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음으로써 통일 후에는 국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국통은 전국 9주에 있는 주통(州統) 9명과 그 밑의 군통(郡統) 18명을 총관(總管)하였으며, 국가통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승통이 교종(敎宗)의 최고법계로 사용되었다. 국가에서 주관하는 승과(僧科)의 교종선(敎宗選)에 합격하면 대선(大選)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수좌(首座)승통에 이르게 되는데, 승통에게는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될 자격이 부여된다. 그러나 이 법계는 고려가 멸망하며 없어졌다가, 조선 중기 이후에 다시 그 이름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 때는 사찰의 책임자에 해당하는 주지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조선 말기까지 큰 사찰마다 승통이 있어 자기 관할의 승려행정을 맡아서 처리하였다.
현재 부산 동래범어사(梵魚寺)의 경우 역대 주지의 이름과 임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주지승통총섭(摠攝)섭리(攝理)주지의 변천과정 중 승통시대가 160년간 177대에 걸쳐 가장 오래 존립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