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의 재궁(齋宮)이었다. 현릉(顯陵) 동쪽에 있었던 것을 능과 가깝다는 이유로 조선 초기 이곳으로 옮겼으며, 1408년(태종 8) 재궁을 개경사로 고치고 조계종에 소속시켰다.
노비 150명과 전지(田地) 100결을 이 절에 소속시켰으며, 1409년 법회를 개최하였다. 1410년송림현 선흥사(禪興寺)의 탑을 이 절로 옮겼으며, 1412년안정왕후(安定王后)의 칠재(七齋)를 행하였다. 같은 해 주지 성민(省敏)의 청에 따라 경주 백률사의 전단관음상(旃檀觀音像)을 이 절로 옮겨 모셨으며, 1413년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출(印出)하여 이곳에 봉안하였다.
1414년 법회를 열고 대장경을 전독하였으며, 1418년세종이 이 절에 쌀 50석을 하사하였다. 1419년김구덕(金九德)이 정종의 칠재를 열었으며, 1424년 나라에서 전국 사찰의 승려의 수와 전지를 정할 때 승려 200명, 전지 400결로 하였다.
1434년 세종이 이 절의 승려에게 반승(飯僧)하는 것을 항례로 삼게 하였으며, 1442년 이 절에 유생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단종 때에는 절의 이건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옮기지 않았으며, 1799년(정조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