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은 삼국 시대 신라의 대국통, 황룡사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당에 유학하여 명성을 떨쳤고 당 태종의 두터운 예우를 받았다. 643년(선덕여왕 12) 선덕여왕이 자장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귀국한 후 분황사에 머무르며 대국통이 되었다. 645년(선덕여왕 14)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웠다.
자장은 김무림이 천부관음을 조성한 공덕으로 얻은 아들이다. 불교와 인연이 깊은 집안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고골관(枯骨觀)’(또는 ‘백골관(白骨觀)’) 등의 수행에 전념하였다. 국정에 참여하라는 선덕여왕의 부름에 “차라리 하루라도 계(戒)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백년 동안 계를 어기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라며 거절하였다. 이후 출가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자장은 638년(선덕여왕 7)에 문인 실(實) 등 10여 명을 데리고 장안(長安)으로 갔다. 장안에 도착한 자장은 당 태종(太宗, 재위 627-649)이 보낸 사신의 위로를 받으며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황제와 황태자의 보살계사였던 법상(法常, 567~645)을 만나 보살계를 받았다. 때론 종남산에서 수행에 매진하기도 하였는데, 그곳에서 도선을 만나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견해도 있다. 643년(선덕여왕 12) 선덕여왕은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어수선해진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자장을 불러들여 대국통(大國統)으로 삼고, 분황사에 머물게 하였다. 석가족을 표방했던 진평왕을 계승한 선덕여왕은 불교를 통한 치국(治國)에 공을 들였고, 자장이 이를 도왔다. 이때 황룡사구층탑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한편 자장은 국왕과 조정의 전적인 지원 하에 불교 교단의 규율도 정비하였다. 자장의 저술에는 『사분율갈마사기』, 『십송율목차기』가 있고, 자장이 당에서 귀국할 때 함께 왔던 원승(圓勝)도 『사분율갈마기』, 『사분율목차기』를 지었다. 자장은 원승과 함께 신라에서 율부(律部) 강의를 열었다. 그리고 보름마다 승려들이 모여 계경(戒經)을 염송(念誦)하고 율에 따라 죄를 참회하는 포살(布薩)을 하게 하였고, 매년 겨울과 봄에 율을 지키고 어기는 것에 대한 시험을 실시하였다. 자장은 도읍뿐만 아니라 지방 사원의 규제 방안도 마련하였다. 지방의 사원에 순사(巡使)를 파견하여 두루 살펴보게 하고 ,승려들의 잘못을 경계하고 단련하게 하였다. 불경과 불상을 장엄하게 꾸미는 것도 일정한 규정을 따르게 하였다.
자장의 학문 경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속고승전』에 귀국 후 신라에서 『섭대승론(攝大乘論)』과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자장은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동역전등목록(東域傳燈目錄)),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일본흥륭불전소초목록(日本興隆佛典疏鈔目錄)),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이상 2권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라는 저술도 있었다. 이를 통해 자장이 아미타 신앙에도 관심이 있었고, 섭론학(攝論學)에도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원광에 의해 신라에 알려진 섭론학이 자장의 강의에 의해 더욱 보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속고승전』에서는 자장과 원승이 율을 보급한 공적을 치하하여 ‘빛의 시작이다’, ‘신라에 비로소 삼학(三學: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이 갖추어졌다’고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