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 선덕여왕 당시 창건한 사찰이다.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한다. ‘분황(芬皇)’은 ‘향기날 분’, ‘황제 황’자로 ‘향기나는 황제절’이란 뜻으로, 신라 최초로 여왕이 왕위에 올라선 것을 알리는 상징적인 절이다. 분황사는 창건 이후 최소 3차례 이상 가람배치가 변하였다. 창건 당시 가람은 석탑을 남쪽 중앙에 배치하고 그 북쪽에 남향의 삼금당을 ‘품(品)’자형으로 배치한 소위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였다. 1차~3차 중건으로 가람은 1동의 대형 금당을 배치한 ‘일탑일금당식’으로 바뀌었다.
신라에는 예로 부터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던 7곳의 가람터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용궁 남쪽의 분황사이다. 선덕여왕이 창건한 분황사의 "분황(芬皇)'은 ‘향기날 분’, '황제 황'자로 향기나는 황제절이란 뜻이다. 인평으로 연호로 바꾼 그 해 창건된 분황사는 신라 최초로 여왕에 올라선 것을 내외에 알리는 상징적인 절임을 알 수 있다.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도 가위 등 여자와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중국에서 대장경 1부를 가지고 돌아 온 자장은 분황사에 주석하였다. 분황의 진나(陳那, 480~540년경)로 알려진 원효도 일찍이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화엄소를 짓다가 제4 십회향품에 이르자 붓을 놓기도 하였다. 분황사에는 설총이 원효의 유해를 부수어 만든 소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설총이 예배를 드리자 돌아섰다고 하는데 고려 당시에도 돌아선 채로 있었다 한다.
문무왕 때 분황사 옆 마을에 살고 있던 엄장이 아미타신앙을 닦았다. 광덕은 처와 동거를 하였지만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는데 처는 분황사의 여종으로 관음보살의 19 응신의 하나로 광덕과 살았다.
755년(경덕왕 14) 분황사의 약사여래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0만 6700근이요, 장인은 강고(强古) 내말(乃末)이다. 같은 왕 때 한기리의 여인 희명(希明)의 아이가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눈이 멀어 이 절의 천수대비(千手大悲) 에게 기도하였더니 눈이 떠졌다. 원성왕 때 분황사 우물에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있었는데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 사람을 시켜 용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데리고 가려고 했던 적도 있다. 진성여왕 때 분황사 옆에 살던 가난한 여인이 품을 팔아 어머니를 부양하였다.
고려 숙종 때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종 때 화쟁국사비를 분황사에 건립하였다. 현재 비신은 멸실되고 비부만 잔존한다.
일제강점기에 분황사 석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함 속의 출토유물 가운데 상평오수(常平五銖), 숭녕중보(崇寧重寶) 등 발행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중국 주화가 나왔다. 숭녕 연간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분황사 석탑을 수리했음을 알 수 있다. 1998년 보광전 수리공사시 해체한 종도리에서 확인된 보광전 중창과 중수 내용을 기록한 상량문(上梁文)에 의하면, 분황사가 지금처럼 사역이 축소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 약사여래도 화를 당했다. 1608년(광해군 원년) 보광전(普光殿) 등의 전각을 중창하고, 5,360근의 청동으로 약사여래를 주조 · 봉안하였다. 1680년(숙종 6)에는 허물어져 가던 보광전을 중수하였으며, 상량문은 이때 작성하였던 것이다.
분황사는 창건 이후 최소 3차례 이상 가람배치 변천과정을 거쳐 지금은 3차 중건 금당인 보광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건 가람은 석탑을 남쪽 중앙에 배치하고 그 북쪽에 남향의 삼금당을 ‘ 품(品)’자형으로 배치한 소위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였다. 분황사 탑은 현재 한국에서 창건 연대가 알려진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탑의 사방에는 물개 또는 사자로 추정되는 동물석상이 세워져 있다.
1차 중건 가람은 창건 삼금당을 모두 폐기하고 창건 중금당지의 규모를 확장하여 1동의 대형 금당으로 통합한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로 바뀌었다. 더불어 석탑 남쪽에는 중문을 건립하고 중문 좌우로는 남회랑을 건립하였다. 금당, 석탑, 중문은 모두 남북 중심선을 공유하고 있으며, 중문과 남회랑은 동서 중심선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2차 중건 금당은 1차 중건 금당에 비하여 그 면적이 1/5로 축소되고 건물의 방향도 이전까지의 남향이 아닌 서향으로 바뀌었다. 3차 중건 금당에 해당하는 현존 보광전은 2차 중건 금당처럼 서향으로 중건되었으며, 그 면적은 2차 중건 금당 대비 1/3로 다시 축소되었다. 이처럼 같은 위치에서 반복된 여러 번의 중복으로 인하여 유구의 결실이 매우 심한 편이며, 대부분 개축되는 후대 금당에 의하여 직전 금당의 선행 유구가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 중금당 유구는 동일 위치에서 면적이 확장된 일차중건 금당에 의하여 하층 기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결실되었으며, 2차 중건 금당이 세워졌던 1차 중건 금당지 동반부는 다시 대부분의 유구가 결실되었다. 그리고 현존 보광전이 위치하고 있는 2차 중건 금당지 중심부에 대한 유구조사는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살고 있는 신성한 절로 여겨졌다. 분황사 탑은 한국 최초의 석탑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