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탑파(石造塔婆)’의 줄인 말로서, 재료로는 화강암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안산암이나 점판암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구조는 크게 기단부(基壇部) · 탑신부(塔身部) · 상륜부(相輪部)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기단부가 생략되고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木塔)의 건립 시기로, 오랜 목탑의 건조에서 쌓인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목탑은 삼국이 모두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양식의 조형을 모방하여 누각형식(樓閣形式)의 다층으로 건립하였을 것이며, 방형 혹은 다각의 평면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평양시의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에서 8각전(八角殿)의 8각탑파(八角塔婆)와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상오리사지(上五里寺址)에서 8각당의 기단부가 조사되어 목탑지로 추정된 바 있기 때문이다.
또, 백제의 유구로는 부여의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와 익산시 왕궁면의 제석사지(帝釋寺址)에서 방형의 목탑 기단부가 확인되었으며, 신라의 유지로는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에 거대한 방형 9층목탑지(九層木塔址)가 남아 있다.
이러한 목탑의 유행에 이어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에서 석탑이 건조되었는데, 그 양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목탑을 본뜬 것이었다. 석탑이 백제에서 비롯된 데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이 발달하였던 나라로 이미 ‘사탑심다(寺塔甚多)’의 나라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또 신라의 황룡사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빙되어 공사를 담당하였으며, 일본의 초기사원 창립에 백제의 사공(寺工)이나 와박사(瓦博士) 등이 건너가 공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발전하에서 백제에서는 7세기 초반에 이르러 석재로 목탑을 모방하여 탑을 건립함으로써 석탑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미륵사지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뿐이지만 이 2기의 초기석탑에서 석탑의 발생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미륵사지석탑은 현재까지 원위치에 남아 있는데, 이 탑을 한국석탑의 시원으로 보는 이유는 그 양식이 목탑과 가장 흡사하다는 점에 있다. 이 탑은 당시 유행되던 목탑의 각 부 양식을 목재 대신 석재로 바꾸어 충실하게 구현한 것으로, 특히 기단부는 목탑에서와 같이 낮고 작다.
또 탑신부의 중심에 거대한 방형석주(方形石柱)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석탑의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로서 이러한 방주(方柱)가 지탱하고 있는 것도 목탑의 형식과 같은 점이다.
각 면에는 엔타시스(entasis : 배흘림)를 표시한 장방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가설하였으며, 다시 두공(枓栱)양식을 모방한 3단의 받침이 있어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다. 이것 또한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본받고 있는 것이다.
즉, 목조가구의 세부까지도 석재로 충실히 모방한 한국 최초의 석탑으로서, 백제에서 석탑이 발생하는 과정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도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모방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에 보이는 엔타시스의 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轉角)에 나타난 반전(反轉), 옥개석 하면의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형시킨 받침수법, 특히 낙수면 네 귀퉁이의 두두룩한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마루) 마루형 등에서 목탑적인 면을 볼 수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露盤石)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점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모방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부수법에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풍을 풍기고 있다. 즉, 미륵사지석탑을 본받기는 하였으나 그 시원에서 다소 벗어나 발전된 수법을 보이고 있어 석탑 발달과정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유구로 주목되고 있다.
한편, 신라의 석탑은 전탑(塼塔)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의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1962년 지정)으로 이 탑은 전탑양식에 속하는 것 같으나 그 재료는 벽돌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탑은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의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탑신부를 받기 위한 널찍한 1단의 화강암 판석 굄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탑재는 백제석탑과는 달리 흑갈색의 안산암이다.
즉, 안산암을 소형의 장방형 벽돌같이 절단하여 쌓아올린 전탑형을 이룬 것이다. 이 탑은 634년(선덕여왕 3)에 건조된 것으로 신라석탑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분황사석탑과 관련된 탑으로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을 들 수 있다. 이 탑도 석재로서 전탑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광대한 석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는데, 탑신을 받기 위한 1매의 판석과 옥개의 상하받침이 5단인 점, 기단이 광대한 점 등은 곧 분황사석탑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석탑은 분황사석탑과는 달리 새로운 착상과 수법의 간략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기단이 잘 정비된 건축기단의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탑신부의 옥신(屋身)에는 우주 외에 주형(柱形) 1개를 만들었고, 사방에 설치하였던 감실(龕室)을 한 면에만 두고 있다.
이 석탑은 백제의 두 탑과 같이 기단부의 우주 · 탱주나 옥신의 우주 · 주신(柱身)에 엔타시스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석탑도 백제의 두 석탑과 같이 양식발생의 초기 유구에 속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탑들에서 살펴 보았듯이 백제계의 석탑은 화강암만을 사용하여 목탑계 양식을 따른 반면, 신라는 화강암을 혼합하였으되 안산암을 주재료로 삼아 전탑계 양식을 모범으로 삼았다. 또 양국의 초기석탑은 그 기본평면을 정방형으로 하여 다층을 이루었다는 사실과 석재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백제와 신라의 초기석탑들은 서로 그 양식을 달리해서 출발했지만, 얼마 뒤 하나의 양식으로 통일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비로소 한국석탑의 전형이 성립되었는데, 이러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신라의 석탑은 삼국통일과 함께 백제와 고신라의 각기 다른 두 양식을 종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새로운 계기를 맞아 집약, 정돈된 형식으로 건조된 석탑 중 가장 시원적인 양식의 표본을 보이고 있는 것은 감은사지동서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이며, 그뒤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의 과도기적인 양식을 거쳐, 8세기 중엽에 이르러 불국사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 갈항사동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에서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定型)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8세기 중엽에 완성된 신라식 일반형 석탑의 정형은 그 뒤 전시대를 통하여 오랫동안 지켜진 형식으로, 이러한 방형평면의 기본양식과 괴체성(塊體性)의 중층형식(重層形式)은 한국석탑의 주류이며 또한 특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 전형양식의 건조형식은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그 위에 2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하기단 면석(面石)에는 각 면에 양쪽 우주(隅柱:모서리기둥)와 2주의 탱주(撑柱:받침기둥)를 각출(刻出)하였으며, 상층기단 갑석(甲石)에는 하면에 부연(副椽)을 새겼다.
그리고 상면에는 각형(角形) 2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구성하였다. 탑신부에는 옥신과 옥개석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여 쌓았으며, 옥신에는 각 층 각 면에 양 우주가 각출되었다. 옥개석은 하면에 각형 5단의 받침이 마련되고 상면정상에는 2단의 각형굄으로 그 위층의 옥신석을 받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복발(覆鉢 : 탑의 노반 위에 놓는, 엎은 주발 모양의 장식)과 앙화(仰花)가 놓이고, 그 위에 보륜(寶輪) · 보개(寶蓋) · 수연(水烟) · 용차(龍車) · 보주(寶珠) 등이 긴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에 꽂혀 장식되고 있다.
신라의 석탑은 8세기 이후 시대가 내려오면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고 전체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이 엿보인다.
예를 들어 옥개석의 받침이 5단이던 것이 3,4단으로 줄어든다든지, 기단부 면석의 탱주가 상층부터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거나 혹은 없어진다든지 하며, 또 옥개석 정상면의 옥신굄도 2단에서 1단으로 약화되고 각형에서 호형(弧形)으로 변하는 등 전체적인 규모에 있어서 거대한 것이 중형 · 소형으로 위축되는 식으로 변형을 보이고 있다.
대체로 9세기에 들면서 점차 변형이 나타나며 9세기 후반에는 현저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870년(경문왕 10)경에 건립된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국보, 1962년 지정)이다.
이 석탑은 상층기단 면석의 탱주가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고 옥개석이 얇아졌으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도 아주 심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석탑에서는 아직도 하층기단의 탱주 2주, 옥개받침 5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 형식의 석탑에 속하는 것으로는 부석사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을 비롯하여 단속사지동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청량사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청송사지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등을 들 수 있다.
좀더 말기로 내려오면 석탑 자체의 규모가 작아질 뿐 아니라 각 부 양식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보이게 된다. 즉 기단부에 있어서 석재가 줄어들고 각 면석의 탱주도 약화되며, 탑신부는 각 층 옥개석받침의 층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탑신굄의 조각수법이나 옥신굄 및 낙수면과 전각의 다듬기 형식에서 통일신라 전성기의 전형으로부터 변형되어 약화 혹은 부분적으로 생략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형은 조형미술품 자체의 양식적인 여러 가지 여건에 기인되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9세기 이후 왕실의 골육상쟁과 지방군웅의 할거로 사회가 혼란해져서 예술성이 위축되고, 특히 조형미술은 힘찬 기상에서 가냘픔과 허약함으로 변했으며, 따라서 자연히 각기 조형물의 규모가 작아지고 각 부의 양식도 약화, 생략된 변모를 보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하층기단의 탱주도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고 옥개받침도 5단에서 4단으로 약화된 형식의 석탑이 신라하대의 후기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보물, 1962년 지정)을 비롯하여 합천 월광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경주 효현동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탑곡리삼층석탑 등이 모두 이러한 예에 속한다.
신라하대에 이르면 또 하나의 변형된 작풍이 생겨난다. 즉 일반형 석탑에서 기단부의 구조가 2층기단이라는 기본형을 벗어난 단층기단으로 변화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고 있는 형식이다. 이 형태는 양식적으로는 낮은 하층기단이 생략되어 지대석 위에 바로 하층기단이 놓이게 된다.
이러한 양식이 나오게 된 동기는 목조건축의 기단이 단층이고 목조건축을 모방한 백제계의 석탑들이 모두 단층기단인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층기단을 갖춘 작품에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결구하여 지대석을 마련한 위에 기단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따금 통례와는 달리 지대석 대신에 자연암반 위에 기단면석을 조립한 석탑도 볼 수 있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같은 것은 자연암반의 상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높직한 굄대를 마련하여 기단을 받았는데, 단층으로서 2층기단부의 상층만을 놓은 것 같은 형식으로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그리고 옥개받침은 각 층 4단씩으로 역시 1단이 줄어들고 있다.
한편, 이러한 형식들의 석탑은 곧 고려시대의 석탑 건조양식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신라시대 전형적인 기단양식인 2층기단의 석탑이 유행하는 한편, 이와 같은 단층석탑도 많이 건립되어서 그 유례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신라석탑의 양식과 그 변천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형양식의 정형에서 말기의 약화된 양식에 이르기까지 몇 단계로 나누어 보면, 첫째 단계는 전형양식의 정형이라 볼 수 있는 석탑으로 경주 천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합천 월광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등을 들 수 있다.
또, 월성장항리서오층석탑 · 원원사지서삼층석탑 등은 탑신부나 기단부 표면에 인왕상 혹은 사천왕상 · 십이지신상들의 조각으로 장식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석탑 자체의 구성이나 각 부의 양식수법에 있어서는 상 · 하층 기단의 탱주가 2주씩이고 옥개받침도 5단씩이어서 역시 전형양식의 정형기 작풍을 보이고 있다.
둘째 단계는 상층기단의 탱주만이 2주에서 1주로 변하고 있는 석탑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 이외에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영광 신천리 삼층석탑(보물, 1969년 지정) 등이 있다. 이것들은 아직 하층기단에 2주의 탱주를 가지고 있다.
셋째 단계는 9세기 후반에 들면서 규모가 위축되고 탱주도 상 · 하층 기단이 모두 1주씩으로 약화되었으며 옥개받침은 4단으로 줄어든 형식이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불굴사 삼층석탑(보물, 1965년 지정) · 봉화서동리동서삼층석탑 · 성주사지중앙삼층석탑과 서삼층석탑 등 각처에서 상당히 많은 유례가 발견된다.
넷째 단계는 기단부의 단계가 2층기단이라는 기본형을 벗어나 단층기단으로 변화한 석탑을 말한다. 경주남산용장사곡삼층석탑 이외에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봉암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화엄사동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표충사삼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양식과 각부 수법은 신라에서 그치지 않고 고려시대까지 미쳐 하나의 양식으로 계승되어 곳곳에 많은 예를 남기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기본으로 하는 석탑들이 건립되는 한편, 전형양식과 형태를 달리하는 ‘이형적(異型的)인 석탑’이 출현하였다.
즉, 신라의 전성기인 8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러서는 전반적으로 건축적 결구의사(結構意思)가 단일된 조각적인 의사로 기울어져가는 동시에 탑 그 자체에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전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비건축적인 장식적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경주의 불국사 다보탑(국보, 1962년 지정) ·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건조연대는 모두 8세기 중엽으로, 통일신라 전성기에 유행한 수식적 의장은 곧 석탑에까지 미쳐 이형양식(異型樣式)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따라서, 시대가 내려올수록 여러 가지 유형의 발생을 보게 되었으며, 동시에 전형적인 석탑 그 자체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게 되었다.
이형석탑이란 석탑의 건조양식이나 각 부재의 결구방법이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탑을 말한다.
즉, 방형중층의 일반형 석탑의 기본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탈피하여 외관상으로 특수한 가구(架構)를 보이는 것인데, 이형석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태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이형적인 석탑으로서 석탑의 건조방법이나 각 부재의 결구방식이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석탑이다.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석탑은 대체로 8세기 중엽부터 그 뒤에 나타난 것으로서 불국사다보탑과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1963년 지정) · 정혜사지십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장식적인 석탑으로, 외형은 신라의 전형양식인 방형중층의 기본형을 갖추고 있으나 기단 및 탑신부의 각 면에 천인상 · 안상 · 팔부신중상 · 십이지신상 · 사방불 · 보살상 · 인왕상 등 여러 상을 조각하여 표면장식이 화려하며 장중한 석탑이다.
여기에 속하는 석탑으로는 원원사지동서삼층석탑을 비롯하여, 화엄사 서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1962년 지정) ·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 1966년 지정) ·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1966년 지정) · 산청범학리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 중흥산성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남산승소곡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탑신부는 방형중층의 전형을 보이고 있으나 기단부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도피안사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의 경우 탑신부는 방형평면이나 기단부에서 8각형의 평면을 이루어 하층기단 면석에 안상이 조각되고, 상층기단 상하갑석에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각하여 마치 불상대좌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석굴암삼층석탑은 탑신부는 방형중층으로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의 탑신을 이루고 있으나 기단부에서는 전혀 이형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다.
즉, 상하 2층의 기단이나 평면은 면석과 갑석이 같지 않고 면석은 8각형으로서 각 모서리에 우주가 각출되었고 갑석은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석굴암본존불(石窟庵本尊佛)의 대좌에서 본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넷째, 모전석탑으로, 건조재료는 석재이나 그 형태가 전조탑파(塼造塔婆)의 양식을 갖추고 있어 각 부재의 축조 및 결구방법이 특이하므로 괴체성의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과는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분황사석탑 ·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국보, 1977년 지정)이 여기에 속한다.
또, 모전석으로 건조한 것은 아니나 외형으로 보아 모전석탑의 형태와 비슷한 모전석탑류도 이형형식에 속하는데, 예를 들어 의성탑리오층석탑을 비롯하여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 ·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등은 모전석이 아닌 치석(治石)한 작은 석재로 탑을 조성하였다.
다섯째, 청석탑류로서 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보물, 1970년 지정)은 가장 오래된 청석탑으로 주목된다. 이 탑은 건조석재가 점판암이라는 특수한 용재이기 때문에 화강암으로 만든 일반형 석탑과는 구별된다.
청석은 그 자체가 크지 못하므로 모두 소규모의 탑뿐인데, 석질이 약해서 각 부재가 파손 혹은 결실되고 있어 완전한 형태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 탑에서 기단부는 모두 화강암으로 형성되고 탑신부 이상만이 점판암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석재가 모자라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의 교세는 고려시대에 와서 절정에 달하였다. 따라서 불교적인 조영(造營) 작업도 거의 고려 일대를 통하여 국가적 혹은 개인적으로 되었으며,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석탑과 유례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특징은 우선 석탑건립 이전 시대에 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된 점이다. 다만 수적으로는 왕도(王都)인 개경 부근이 우세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이러한 분포상의 변화는 시대상의 변혁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즉, 왕실불교적 위치에서 출발한 우리나라 불교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대중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고려시대적인 조영은 역시 전국적인 형태를 띠게 되는데, 특히 태조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도 반영되어 있듯이 도참사상(圖讖思想)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개경의 7층석탑의 건립과 연관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옛 도읍인 서경(西京) 구층탑의 건립,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의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의 중수, 백제 옛도읍 부근의 거대한 익산왕궁리오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의 예, 그리고 후백제군을 격파한 곳에 개태사(開泰寺)를 건립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면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더구나 주목되는 점은 고려시대의 조탑활동에 순수한 지방세력 내지는 민중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개심사지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의 명문(銘文), 정도사지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안에서 발견된 조성형지기(造成形止記)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그 지방민의 발원에 의하여 석탑이 건립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은 고려시대 석탑을 전국적으로 분포시키는 데 보다 더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석탑의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전대의 왕도 중심의 일률적인 탑파 건립에서 벗어나 각 지방의 토착세력이 건탑(建塔)에 관여하였을 때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제 나름대로의 특징이 반영되어, 곧 다양성 있는 건탑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시대의 석탑은 그 조형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신라의 고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신라석탑계를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세부에 있어 변형을 보이고 있다.
개심사지오층석탑은 연화문이 조식(彫飾)된 판석 1매를 끼워 탑신굄대를 삼고 있으며, 정도사지오층석탑은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이 있고 그 내면에 지선(地線)으로부터 귀꽃무늬가 조식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또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남계원지 칠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 현화사칠층석탑(玄化寺七層石塔) · 흥국사석탑(興國寺石塔) 등과 같이 일반형 방형중층탑이 고려석탑으로서의 특징을 지니면서 유행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도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1966년 지정) · 천흥사지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금산사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청양 서정리 구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등 상당수의 일반형 석탑이 건립되었는데, 모두 신라식을 계승하고는 있으나 옥개석의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추녀가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하였다든가 단층기단이 많아지고 상층기단갑석의 부연이 형식화되거나 생략되는 등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둔중해진 고려석탑 특유의 작풍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회의 새로운 성격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10세기 후반부터는 양식상 전대에 비하여 현저한 변화를 보인다. 그러한 고려석탑의 새로운 양상으로서 첫째, 지방적인 특색이 현저해진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석탑에서 지방적 특색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설령 신라의 중심이었던 경주를 벗어난 지방에 석탑이 건립되었다 하더라도 중앙인 경주지역의 양식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지방에 따라 각기 특색 있는 양식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신라의 고토인 경상도지방에서는 신라시대 석탑의 계통을 충실하게 계승한 데 비하여 백제의 고토인 충청남도와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에서는 백제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예가 많다.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1971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계룡산 청량사지 쌍탑 등과 전북특별자치도의 익산왕궁리오층석탑 ·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귀신사삼층석탑 · 죽산리삼층석탑 등 백제계의 석탑은 특히 옥개석의 구성에서 백제양식을 본받고 있다.
즉 옥개석 양식이 모두 판석형의 낙수면석이고, 대개의 경우 그 밑의 받침부가 별석으로 조성된 목조가구의 일면을 보이고 있는 점 등이 미륵사지석탑과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의 각 부를 모방하고 있어 ‘백제계의 고려석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백제 고토에서만 볼 수 있는 백제계 고려시대 석탑의 건립 현상은 고려의 불교가 전대인 신라시대의 중앙집중에서 벗어나 좀더 지방에까지 파급되고 한층 토착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고려시대의 석탑에서는 신라시대에 볼 수 없었던 각양각색의 새로운 특수형식의 탑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수한 양식이란 방형중층의 일반형 석탑의 형식에서 벗어나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새로운 특수한 형식이 가미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예는 신라시대부터 나타나던 것이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사사자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이나 홍천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보물, 1971년 지정)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전대의 이형석탑의 양식을 계승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라적인 이형석탑의 예는 사실상 극히 한정되고 개별적인 것에 그쳤으며, 그에 비하여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은 새로운 유형을 이루는 데까지 진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방형에서 다각형으로, 그리고 다층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석탑 중에서 8각형의 석탑은 나름대로 하나의 유형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비하여 원광사지육각칠층석탑이나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등 6각형의 석탑은 좀더 특이한 형이라 할 수 있다.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 보현사팔각십삼층석탑 등은 일반형 석탑처럼 기단부 위에 탑신과 상륜부를 건조한 형식이지만 8각형의 평면을 이룬 점이 특이하다.
이성계(李成桂)는 새 왕조를 건립하면서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유교를 새로운 국가통치의 교화이념(敎化理念)으로 삼았다. 이로써 신라 · 고려를 통하여 1,000여년간 국교적 위치에 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아직도 불교의 영향력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더욱이 태조 · 세조 등과 같이 불교에 귀의하거나 호불(護佛)정책을 표방한 군주도 있어 그런대로 불교미술의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여운이 아직도 엿보이는 시기여서 불교미술의 분야에서도 조성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던 반면, 조선 후기에는 고려시대의 영향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전란으로 인하여 고려적인 전통은 대부분 단절되었고, 다소 그런 전통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느 일부분에서 변형을 일으키고 있었고, 조형미술은 점차 소멸되어가는 상태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던 조선 초기 석탑 중 방형중층의 일반형 석탑으로는 낙산사 칠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 ·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벽송사 삼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 등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또 이형석탑으로는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수종사팔각오층석탑을 들 수 있다.
우선 일반형 석탑을 볼 때 방형중층의 신라석탑의 기본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은 벽송사삼층석탑으로서,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하여 신라식 일반형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각 층의 체감률도 착실하며 석재의 결구수법도 정돈되어 있는데, 기단에 있어서 상층면석에 탱주가 생략되고 탑신부에 있어서는 옥개받침이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들어 일률성이 없어 기본형식에서 벗어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전체의 조형이 무기력해진 점 등과 아울러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또한 이형석탑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은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고 수법이 세련되었으며 의장이 풍부하여 조선시대의 석탑으로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우수한 석탑이다.
이 석탑은 전체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조각 등이 고려시대의 작품인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흡사할 뿐 아니라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주목된다.
또 하나의 이형석탑으로는 수종사팔각오층석탑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은 평면이 8각인 원당형(圓堂形)을 이룬 탑으로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희귀한 예의 8각형석탑으로 손꼽힌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전대인 고려시대와 같이 다양한 형식의 탑이 조성되지 못하였으며 고려시대 석탑의 조형과 양식을 따르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억불정책 아래에서도 전대의 불교적인 양식을 전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여줄 뿐 아니라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한 우리민족의 문화적인 전통이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