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삼국시대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 등을 저술한 신라의 불교 사상가이다. 617년 태어났으며, 승려 신분으로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고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파계를 계기로 환속하여 문도 양성 대신 저술 활동에 힘써서 70여 부 약 150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다. 이들 저술을 통해 신·구역 불교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불교 교학이 정립되는 데 기여하였다. 아울러 통일신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불교적 평등 사회에서 찾고, '무애행'의 이름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불교대중화운동에 헌신하였다.
617년 압량군[현 경상북도 경산시]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설씨(薛氏)이고, 아명은 서당(誓幢)이다. 할아버지는 주1이며, 아버지는 담날(談捺) 나마이다. 기왕에는 속성, 출신지, 아버지의 관등에 근거하여 그의 신분을 6두품으로 간주하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설씨가 원래 김씨 왕족이었다고 하는 당나라 때의 금석문 자료가 출현함으로써 원효의 신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해졌다.
원효가 활동한 7세기는 후발 국가였던 신라가 불교로 상징되는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를 수입하여 안으로는 국왕 중심의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고구려 및 백제와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통하여 마침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아울러 당시의 신라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골품제라는 신분제의 원리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원효는 이러한 혈연[골품제] 또는 힘[전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속 사회를 떠나서 출세간(出世間)의 불교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였다.
원효의 생애는 크게 출가 이후의 승려 시기와 환속 이후의 거사(居士) 시기로 나누어진다. 수행자로서 그는 대승 불전을 두루 탐색하여 신라가 나아가야 할 이상 사회로 불교적 평등 사회를 제시하였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 사회적 약자 계급에 대한 지배 계급의 양보를 촉구하는 불교대중화운동을 전개하였다. 7세기 중반 새로 출범한 중대(中代) 왕실은 위민(爲民) 정책을 추진하면서 원효를 주목하고 후원하였다.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만남을 계기로, 환속 이후에는 유마거사(維摩居士)를 전범으로 하는 '승속불이(僧俗不二)의 거사불교'에 전념하였다.
현존하는 전기 자료만으로는 원효가 출가하게 된 동기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출가한 사찰은 왕성 서쪽에 있는 절인데,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출가 초기에 그는 참기(讖記)를 비롯한 외도의 서적을 읽어서 동시대 승려들로부터 배척당하였다. 34세 때인 650년에 의상(義相)과 함께 당나라 현장(玄奘) 문하로 유학을 시도하였는데, 육로를 이용한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였다. 그 후 해로를 이용하는 두 번째 시도 도중 직산(樴山)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면서 유학을 단념하고 경주로 돌아왔다.
경주로 돌아오고 나서 그는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말대로 혜숙(惠宿), 혜공(惠空), 낭지(朗智), 대안(大安) 등 여러 선지식과 어울리며 이들로부터 불교를 배웠다. 이들은 반야공관(般若空觀)을 사상적 기조로 하여, 경주 시내와 외곽에서 일반민을 대상으로 불교를 홍포한 이른바 불교대중화운동가들이었다. 원효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녔다. 이러한 파격적인 언행들 때문에, 국가 의례인 백고좌회(百高座會) 참석이 주2을 중시하는 기성 교단의 반대로 좌절되기도 하였다.
일련의 소소한 파계에 이은 최종적인 파계는 태종무열왕 대(654~661)에 요석궁의 과부 공주를 만나 아들 설총(薛聰)을 낳은 사건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요석공주와의 만남은 원효가 먼저 의사를 밝혔으며, 이를 태종무열왕이 받아들여 성사되었다고 한다. 설화적인 색채가 짙기는 하지만, 원효가 왕실로부터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나중에 신문왕이 설총을 관료로 발탁한 사실로 보아, 두 사람의 인연은 중대 왕실에 의해 공인받았다고 하겠다.
원효는 오계(五戒) 중에서도 불사음계(不邪婬戒)를 범하여서 더 이상 승려 신분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 환속하고 이후 거사를 자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혼인을 매개로 삼국 통일의 주역인 태종무열왕 및 김유신과 의제적 가족 관계를 맺게 되었다. 661년 겨울에는 김유신의 고구려 원정 때 커다란 군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때 왕비의 병을 고치고자 황룡사에 개설한 『금강삼매경』 강경을 도맡기도 하였다. 이러한 세 가문 사이의 특별한 유대 관계는 태종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던 중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원효는 중생 제도에 전념하다가 68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원효는 환속한 이후 거사로서 처신하였기 때문에, 사찰 내에서 문도를 양성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중생을 제도하고, 교학 연구와 집필에 매진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원효의 저서는 대략 70여 부 150권 남짓이며, 이 가운데 일부나마 전하는 것은 13부 16권가량이다. 내용을 보면, 반야, 삼론, 열반, 천태, 여래장, 유가유식, 화엄, 계율, 정토신앙 등으로서, 밀교를 제외하고 당시 동아시아 불교에서 유통되고 있던 주요 대승불교를 망라하고 있다.
그는 화쟁의 관점에서 주요 경전과 관련 학설의 요지를 간결하게 해석하였다. 특히 자신의 경전관을 유려하면서도 운율감 있는 문체로 진술한 종요(宗要)류의 대의문(大義文)은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될 정도로 문장미가 넘친다. 원효의 저서는 일찍부터 중국, 일본, 심지어 인도 불교계로 전해져서 주목받았다. 특히 7세기 말 법장(法藏)이 원효에게 힘입어 동아시아 화엄학을 집대성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0세기의 불교사가 찬녕(贊寧)이 "문장의 전장터를 종횡으로 누볐다."라고 찬탄한 바 있듯이, 저술에 엿보이는 학문의 폭과 깊이에서 원효는 동시대 동아시아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대승기신론』은 원효 사상의 철학적 토대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저술의 인용 관계를 보면, 『대승기신론』 관련 저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저술 목록을 보더라도 대승 경전 가운데 『대승기신론』에 관한 주석서가 8종 10권으로 가장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저술에 속하는 『기신론별기』[1권]의 서문은, 원효가 『대승기신론』을 대승불교의 양대 철학인 중관(中觀)과 유식(唯識)의 대립을 극복하는 이론서로서 주목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소』[2권]는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 불교계에서 '해동소(海東疏)'라 불렀을 정도로 동아시아 불교학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금강삼매경』은 7세기 중반 신라 불교계에서 처음 출현한 위경(僞經)이다. 원효는 이 경전을 최초로 주석하고 강의하였다. 『송고승전』 원효전은 원효가 반대파의 훼방을 무릅쓰고 왕실의 후원하에 황룡사에서 강연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잘 보여주는데, 『금강삼매경론』[3권]은 그때 작성한 강의 노트에 해당한다. 문무왕 때의 일로 추정되며, 원효는 성공적인 강경을 계기로 신라 불교계의 중심으로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었다. 한편, 『금강삼매경』의 사상이 반야공관인 데 비해, 『금강삼매경론』은 공유화쟁(空有和諍)의 관점에서 반야공관을 현장의 신유식(新唯識)과 회통(會通)시키고자 하였다.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사상적 차이는 동시대 동아시아 불교의 사상적 추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원효 저술 대부분이 1권짜리인데 비해 『화엄경소』는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8권이나 된다. 이는 원효가 『화엄경소』 집필에 커다란 뜻을 두었음을 시사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가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찬술하다가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절필하였다고 한다. 십회향품의 취지에 따라서, 그때까지의 경전 연구와 저술이라는 자리행(自利行)을 중생 제도라는 이타행(利他行)으로 회향하면서 절필하였다고 추정된다.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이 『화엄경소』[8권]에 『화엄종요』[1권]를 합쳐서 10권본 『화엄경소』를 만들었으나, 오늘날에는 서문 및 권3의 일부만 전한다.
원효의 사상은 수(隋)의 3대 법사인 지의(智顗), 혜원(慧遠), 길장(吉藏)으로 대표되는 구역불교(舊譯佛敎)에 토대를 두되, 당 초기 현장에 의해 성립한 신역불교(新譯佛敎)와의 적극적인 화쟁을 시도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7세기 말 동아시아 불교 교학의 성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원효의 사상 체계는 그가 만년에 찬술한 『화엄경소』의 사교판론에 집약되었다. 일부만 전하는 현행 『화엄경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법장을 비롯한 중국 역대 화엄종 고승들의 저서에 인용문 형태로 남아 있다. 이를 종합하면, 원효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의 순서로 네 단계로 나누었으니, 삼승별교(三乘別敎)-삼승통교(三乘通敎)-일승분교(一乘分敎)-일승만교(一乘滿敎)가 그것이다.
여기서 중관파(中觀派)와 유가파(瑜伽派) 각각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반야경(般若經)』과 『해심밀경(解深密經)』을 삼승통교에 나란히 배당한 것은 주3 역사상 원효가 처음으로, 자신이 추구한 공유화쟁을 반영한다. 또한 불교의 실천적 인식과 관련하여 대승보살계를 설하는 『범망경(梵網經)』과 『영락경(瓔珞經)』을 일승분교에 나란히 배당하였는데, 이 역시 교판 역사상 원효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일승만교에는 『화엄경』만을 배당하였는데, 이는 원효의 불교 사상이 화엄사상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원효 사상은 일심(一心), 화쟁(和諍), 무애(無碍)의 3대 핵심어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체이다.
일심은 원효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핵심어이다. 즉, '우주 만물의 궁극적 근원은 일심이고 우주 만물은 일심의 유전(流轉)'이라는 점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동시에 '모든 인간의 마음은 하나[또는 같다]'라는 점에서 평등한 인간관을 보여준다. 일심사상의 경전적 근거는 『대승기신론』이다. 다만, 일본 학계는 일심=여래장(如來藏)이라는 법장의 견해를 따라서 『대승기신론』의 일심사상을 여래장사상과 동일시 하고, 그것을 원효의 일심사상에까지 소급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 세대가량 후학인 법장의 해석을 원효에 소급 적용하는 것은 방법론상 타당하지 않다. 원효는 법장과 달리 여래장을 일심의 하위 개념인 생멸문(生滅門)에 배당하였는데, 이는 일심을 여래장보다 상위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설정하였음을 의미한다.
화쟁은 원효의 사상과 관련하여 한국 학계가 가장 주목해 온 개념이다. 원효가 화쟁을 역설한 것은 역으로 그의 시대가 분열과 갈등의 시대였음을 반증한다. 그는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으로 되돌아가서 동시대의 신 · 구역 불교 사이의 갈등, 그중에서도 대승불교의 양대 학파인 중관파와 유가파의 공유쟁론(空有諍論)을 화회(和會)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공유화쟁은 동아시아 불교계가 공유쟁론을 극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원효에게 있어서 화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인 보살의 이타행, 즉 중생 제도를 위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원효의 화쟁사상을 집대성한 저서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2권]인데, 20세기 전반 해인사 잡판고에서 판목 2장이 발견되었다.
원효가 동시대의 교리 논쟁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를 실천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환속 이후 거사로서 천촌만락을 떠돌며 중생 제도행에 전념하게 되는바, 『화엄경』의 “일체(一切)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一道]로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구절을 따서 자신의 대중 교화행을 ‘무애(無碍)’라 이름하였다. 그는 중생 제도를 위한 새로운 생활 규범으로 『범망경』에서 설하는 대승보살계를 주목하였다. 그리고 화전 경작민, 분황사 노비, 푸줏간 주인 등과 같은 하층민들을 불교로 유인하고자 정토신앙(淨土信仰)을 권장하였는데, 모든 중생이 칭명염불(稱名念佛)을 통하여 극락정토로 왕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고려 후기의 불교사가 일연(一然)은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조차 모두 부처님의 명호를 알고 염불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원효의 공이 크도다."라고 크게 찬탄하였다.
원효는 7세기 동아시아 교학 불교를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그런 만큼 생전에 이미 명성이 널리 퍼졌으며, 사후에도 위대한 불교 사상가로 칭송받았다. 사실 그는 환속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승려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8세기 말~9세기 초 흥륜사 교단은 그를 10대 성인의 하나로 추앙하였고, 고려 중기에는 해동보살로 불렸다. 그리고 12세기에는 그를 교조로 하는 해동종[일명 분황종]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불교계에서도 7세기에 이미 '진나보살(陳那菩薩)'로 불렸고, 일본에서도 나라시대에 '구룡대사(丘龍大師)'로 널리 알려졌다.
원효가 입적하고 120년가량 지나 세워진 추모비이다. 그의 후손인 설중업(薛仲業)이 8세기 말 일본 사행을 다녀와서 비 건립을 발의하였으며, 애장왕 대[800~809]에 실권자인 각간 김언승(金彦昇)[헌덕왕]이 후원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에 있던 고선사(高仙寺)에 세웠다. 한국 불교사상 환속한 거사를 위하여 국가 차원에서 고승비를 건립한 유일한 사례이다. 일찍 파괴되어 역사상 잊혔다가, 20세기에 비의 하부와 상부에 해당하는 비편 4개가 발견되었다. 일부만 전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현존하는 전기 자료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송나라의 불교사가 찬녕이 10세기 중반에 편찬한 원효의 전기이다. 당시 오월(吳越) 지방에 알려진 원효의 일화를 채록하였다. 특히 원효가 『금강삼매경』을 최초로 강경하게 된 전말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고려 중기 화엄종 승려 의천이 잊혔던 원효를 재발견하고 숙종에게 건의하여 그를 '화쟁국사'로 추봉한 것을 계기로, 원효를 교조로 하는 해동종이 출현하였다. 이 비는 해동종이 원효를 현창하고자 1190년 경주 분황사에 세운 것이다. 정유재란 때 완전히 파괴되어 현재는 비 음기에 해당하는 비편 일부만 탁본으로 전한다. 원효의 저술 목록을 전하고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13세기의 선종 승려 일연이 찬술한 『삼국유사』에 입전된 원효의 전기이다. 일연은 원효의 수행 과정 및 대중 교화 활동에 대해서는 당시까지 남아있던 『송고승전』 원효전 및 원효 행장에 대폭 양보하는 대신, 당시 지역 사회에 떠돌던 원효의 특이한 일화를 한두 가지 채록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아들 설총을 얻은 것을 계기로 환속하여 거사로서 중생 제도행에 전념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 일화는 전기 가운데 오직 『삼국유사』에만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