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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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무량수경
불설무량수경
불교
개념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불교신앙. 보살신앙.
내용 요약

미타신앙은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불교 신앙이다. 보살신앙, 정토신앙, 아미타불신앙이라고도 한다. 미타신앙은 사후에 서쪽에 위치한 청정불국토의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신앙이다. 달달박박 설화는 아미타불이 신라 땅에서 성불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신라 땅이 극락정토라고 신라인의 인식을 보여준다. 고려는 신라의 미타신앙을 계승하고, 법회행사 위주의 의례적인 면을 발달시켰다. 조선 시대 미타신앙은 염불당과 만일염불회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는 미래의 미타신앙보다는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는 관음신앙이 성행하고 있다.

목차
정의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불교신앙. 보살신앙.
내용

정토신앙(淨土信仰) 또는 아미타불신앙이라고도 하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서쪽에 위치하는 청정불국토(淸淨佛國土)의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신앙이라고 한다.

10겁(劫) 이전에 국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法藏比丘)가 가장 완전무결한 이상세계를 이룩하고자 48원(願)을 세우고 가지가지 보살행(菩薩行)을 닦은 뒤 48원을 모두 이루어 아미타불이 되었으며, 48원이 모두 성취된 세계가 곧 극락정토이다. 이 극락세계는 아무런 괴로움이 없고 기쁨과 즐거움과 편안함만이 있다. 모든 것이 풍부하고 마음 속의 뜻대로 이루어지며, 온 세계가 가지가지 보배와 화초와 연꽃과 천악(天樂)과 향기로 가득하다. 그 나라에 살게 되면 다시는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없으므로 일체의 윤회가 없다고 한다.

그러한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미타불을 기쁜 마음으로 믿어 한 생각으로 지성껏 발원(發願)하고 진심으로 귀의하면, 그 목숨이 다하는 날 서쪽 극락에서 아미타불을 비롯한 성중(聖衆)들이 와서 그 사람을 맞이하여 가기 때문에 곧 왕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타신앙은 예로부터 인도중국에서도 매우 성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전하는 대승경전 중 아미타불과 극락을 언급한 것은 무려 200여 종이나 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경전은 『무량수경(無量壽經)』 2권과 『아미타경(阿彌陀經)』 1권,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1권이다. 이들 세 개의 경은 미타신앙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흔히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또는 미타삼부경이라고 한다. 이들 경전을 중심으로 하여 정토의 교학을 체계화하고, 염불의 실천을 정립시킨 것이 중국의 정토교(淨土敎)이다.

우리 나라에는 삼국시대 이미 미타신앙에 관한 경교(經敎)와 실천수행법이 전래되었지만 정토교나 정토종이 성립된 일은 없었다. 비록, 종파와 교학 계통은 성립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미타신앙은 우리 나라 불교신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특히, 신라 때는 현저한 특수성을 보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불교신앙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무량수경』이 중국의 위나라 때 번역되고 『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이 남북조시대 초기에 번역되었으므로, 고구려백제에도 일찍부터 이들 경전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미타정토신앙이 행해진 구체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미타신앙에 관하여는 많은 자료가 전하고 있으므로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선덕여왕 때의 고승 자장(慈藏)『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과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을 저술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찍부터 미타신앙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저서는 현존하지 않고 또 다른 자료들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삼국통일 이전의 미타신앙은 알 수 없다.

삼국통일 이후의 미타신앙에 관한 자료는 『삼국유사』에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왕생영응설화(往生靈應說話)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하여 신라 미타신앙의 특수성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라 위주의 현실적인 신앙이다. 문무왕 때의 승려 광덕(廣德)은 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하고 엄장(嚴莊)은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십육관법(十六觀法)을 닦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그때의 미타신앙이 현실 생활에 깊이 밀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경덕왕 때는 포천산(布川山)의 다섯 비구와 아간 귀진(貴珍)의 여종 욱면(郁面)이 극락세계에서 온 성중의 마중을 받아 왕생하였다. 그들은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천악(天樂)과 광명에 둘러싸여 공중으로 떠올랐는데, 중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설법하고는 육신을 남기고 영혼인 진신(眞身)만이 극락으로 갔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 또한 신라를 강하게 의식하는 신라 위주의 왕생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정토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죽은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에 그 영혼이 왕생하는 모습은 누구도 볼 수 없고 또 알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에서 천악소리가 울리고 큰 광명이 이 땅을 비추었으며, 왕생인들은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고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천천히 가다가 공중에서 육신을 떨어뜨리고 진신만 서쪽으로 갔다는 것은 현신왕생(現身往生)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이다. 이러한 신라 중심의 현신왕생신앙은 신라 정토신앙의 창의적인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신라의 미타신앙이 귀천 평등에 기초를 둔 인과신앙(因果信仰)이라는 점이다. 앞의 이야기에서 현신왕생한 욱면은 여종의 신분이었다. 그 때 수십 명의 신도들이 뜻을 모아 1만 일 동안을 함께 염불하는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를 결성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진을 계속하였는데, 욱면의 상전인 귀진(貴珍)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욱면도 그 상전을 따라 절에 갔으나, 신분 때문에 법당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마당에서 염불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마저 못마땅하게 여기는 상전의 눈을 피해 벅찬 집안일을 마친 뒤 힘겹게 염불정진을 닦아 끝내는 뜻을 이루어 왕생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귀족적인 면이 많이 엿보였던 신라 불교에서 가장 천한 종의 신분으로 현신왕생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므로, 미타신앙의 평등성과 착한 노력에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사상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셋째 신라 특유의 아미타불 성불신앙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 권3에 수록되어 있는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는 염불수행승이었던 달달박박(怛怛朴朴)이 성도하여 아미타불이 된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부처보살이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몸을 나타내어 사람들의 눈에 보이거나 같이 생활하는 응화(應化)나 화현(化現)신상(身相)의 경우는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달달박박의 성불은 화현이나 응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신라의 백성으로 태어나 성장하여 출가하고, 수도하여 도를 이루어서 아미타불이 되었다는 것이므로 화현이나 응화처럼 임시방편으로 몸을 나타낸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미타불은 10겁 전에 성불하여 서방극락세계의 교주로 있는 아미타불과는 전혀 다른 신라의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

신라에서 아미타불이 현신성불(現身成佛)하였다면 신라가 곧 극락정토가 되는 셈이다. 이를 통하여 신라인들은 서쪽의 멀고 먼 극락세계가 바로 신라에 있음을 주장하려 하였던 것이다. 신라 국토가 곧 극락정토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신라인이 아미타불로 성불하였다는 신앙을 낳기에 이르렀다.

또한, 신라의 고승들이 남긴 미타신앙과 관련된 많은 저술이 있으며, 그 밖에도 원효(元曉)의 「미타증성게(彌陀證性偈)」와 의상(義湘)「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과 같은 짤막한 글들이 전하고 있다. 이상의 저술들 중에서 자장(慈藏)의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삼국통일 직후 전승기 때의 신라 고승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이와 같은 활발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앞서 본 바와 같은 신라의 특징을 보여주는 미타신앙이 크게 성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는 미타신앙 관계의 연구서는 물론, 그 신행의 특수성에 관한 기록은 전연 찾아보기 어렵다.

고려시대는 신라시대의 뒤를 이어 불교를 신봉하였으므로 미타신앙 역시 신라시대의 것을 답습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불교는 신라시대와는 달리 지나치게 법회행사 위주의 의식적인 면이 짙었다. 따라서, 미타신앙도 신라시대처럼 창의적이지는 못하였고 다분히 의례적인 데가 있었다. 고려시대 미타신앙의 특징은 불교의 각 종파별 특색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화엄종(華嚴宗)의 경우는 화엄사상에 입각한 정토신앙보다 아미타불의 정토신앙을 높이 신봉하고 있었다는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고려 화엄종이 초조(初祖)로 받들었던 의상은 『아미타경의기』를 저술하여 화엄종과 미타신앙을 깊이 연계시켰다. 특히, 의상이 창건하여 고려 때까지도 화엄종의 총본산이 되었던 부석사(浮石寺) 법당에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시지 않고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모셨다는 것은 이를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그리고 부석사의 법당에는 다른 사찰의 경우와는 달리 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이 안치되어 있지 않은데, 이것은 화엄사상에 입각한 독특한 미타신앙의 표출이라고 보고 있다. 고려 초기의 국사 결응(決凝)도 부석사에 머무르며 그 불상에 예배하였고, 그 뒤의 화엄종 승려 역시 아미타불을 신봉하고 염불왕생을 희구하였다.

천태종(天台宗)에서의 정토신앙은 고려 후기 백련사(白蓮社) 결사(結社)를 조직하였던 요세(了世)에 의해서 널리 유포되었다. 요세는 매일 『법화경』 한 번과 준제주(准提呪) 1,000번, 아미타불 명호 1만 번을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입으로 외면서 마음으로 새기는 방법으로 염불했으며, 이와 같은 미타신앙의 경향은 요세의 제자와 법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그의 제자 천인(天因)천책(天頙)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천인은 「미타찬(彌陀讚)」과 「법화경찬(法華經讚)」 등의 글을 통하여 정토왕생 및 『법화경』과 아미타불의 관련성 등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천책은 「권송미타경원문(權誦彌陀經願文)」 등에서 정토와 예토(穢土)를 비교하였고,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을 권하고 있다. 특히, 그는 자성미타(自性彌陀)와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고승들과는 다른 큰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천책의 제자 무기(無寄)는 20여 년 동안 『법화경』을 독송하고 아미타불을 염송하면서 불화를 그리고 불경을 썼으며, 말법시대(末法時代)는 오직 염불의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등 미타신앙 전파에 큰 힘을 쏟았다.

참선 수행하는 조계종(曹溪宗) 등의 선종 승려들도 극락정토를 희구하는 경향이 많았다. 지눌(知訥) · 보우(普愚) · 혜근(惠勤)은 미타신앙을 중요시한 대표적인 고승들이다.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선종을 크게 중흥시킨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염불요문(念佛要門)』 등을 통하여 선정쌍수(禪淨雙修)의 정토신앙을 천명하였다. 이 선정쌍수는 참선과 염불을 함께 닦는 수행법으로서 지눌 이후 우리 나라 선종 승려들 사이에 한 전통처럼 전승되었다.

또, 보우의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에는 미타신앙에 관한 몇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사람마다 본성에 있는 큰 영각(靈覺)은 본래 생사가 없고, 예나 지금이나 신령하고 밝으며, 깨끗하고 묘하고 안락하고 자재(自在)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하여 보우의 선사다운 자성미타관(自性彌陀觀)을 엿볼 수가 있다.

혜근 또한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에서,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계시는가? 언제나 마음 속에 간절히 새겨 마음 길이 다하여 생각이 없어진 곳에 이르면, 바로 거기에 아미타불의 광명이 비친다.”고 하였고, 또 “아미타불이 다른 국토에 있지 않고 이 몸이 앉고 눕는 거기에 있으며, 가는 곳마다 극락세계 아닌 곳이 없다.”고 하여, 자성미타와 유심정토관을 보이고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선사들이 미타신앙에 관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나 거의 모두가 이상의 선사들이 보여준 형태와 비슷하다. 진언가(眞言家)에서도 미타신앙은 성행하였다. 충렬왕 때의 고승 원참(元참)이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집록한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에 따르면,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수행자는 아미타불본심미묘진언(阿彌陀佛本心徵妙眞言)을 1만 번 이상 염송하면서, 팔재계(八齋戒)를 지키고 사대원(四大願)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곧 밀교적인 미타정토왕생의 수행방법이다. 아미타불의 이름보다는 아미타불의 본심미묘 진언을 주로 외우는 이 신앙 수행법은 당시의 밀교계통 수행자들 사이에서 많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의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불교는 억압당하고 승려들은 산속에 숨어 살아야 했지만, 미타신앙은 산중 불교인들 사이에서 깊이 신봉되고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선가에서도 미타신앙에 관한 적지않은 글들을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승려는 휴정(休靜)이다. 그는 『선가귀감(禪家龜鑑)』『심법요초(心法要抄)』 등에서 미타정토에 관한 글을 많이 싣고 있으며, 「염불문(念佛文)」이라는 단편의 글도 남기고 있다. 그는 또 스스로 아미타불을 그린 다음, “원하옵건대 제가 임종할 때 죄업의 장애를 없애고 아미타불의 금색 광명 속으로 나아가서 수기(授記)를 얻사옵고,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중생을 건지겠나이다.”라는 발문(跋文)을 짓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참선이 곧 염불이며 염불이 곧 참선이라고 하여 염선일치사상(念禪一致思想)을 주장하고 있다.

선사이면서 화엄강사(華嚴講師)였던 성총(性聰)은 미타 관계의 여러 서적에서 중요한 부분을 가려 뽑아 『정토보서(淨土寶書)』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인지(因地)와 정토기신(淨土起信)을 비롯하여 염불법문과 염불공덕, 왕생응험전(往生應驗傳) 등을 수록하고 있는 이 책은 이름 그대로 정토신앙의 보서라고 할 수 있다.

영조 때의 고승 팔관(捌關)이 저술한 『삼문직지(三門直指)』에는 가장 먼저 염불문의 수행법을 들고 있다. 당시 선가의 수행 요체(要諦)를 염불문 · 원돈문(圓頓門) · 경절문(經截門)의 삼문으로 나누어 편록한 이 책에서 염불문을 첫 부분에 둔 것으로 보아 불교 수행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 조선 말기의 치조(治兆)는 정원사(淨願社)를 결사하여 신도 수십 명과 함께 30여 년 동안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수행하였다. 그의 문집 『청주집(淸珠集)』은 정토요결(淨土要訣) 120칙(則)이 본문 전체를 이루고 있는데, 이 글을 통하여 조선 말기의 정토신앙과 그 신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미타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염불당과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에서 찾을 수 있다. 염불당은 불경을 공부하는 강당(講堂)이나 참선을 수련하는 선방(禪房)과 같이 염불 수행인들이 정진하는 도량이다. 이와 같이, 사찰 안에 염불당이 따로 설치되었다는 것은 조선 후기 불교계에 염불이 얼마나 보편화되었는가를 입증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미타신앙이 보편화됨에 따라서 만일회라는 염불법회도 성행하게 되었다. 1만 일의 기간을 정하여 뜻을 같이하는 불자들이 염불당에 모여서 염불하는 법회이기 때문에 만일회 또는 만일염불회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만일염불회는 신라시대부터 보이고 있으나, 특히 조선 후기에 와서 성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건봉사(乾鳳寺)망월사(望月寺)에서 행해졌던 만일회가 가장 유명하다. 건봉사에서는 세 번에 걸쳐 염불만일대법회를 열었는데, 처음은 순조 때 용허(聳虛)가 시작하여 마쳤고, 두 번째는 철종 때 벽오(碧悟)가 시작하여 마쳤으며, 세 번째는 만화(萬化)가 1881년(고종 18)에 시작하여 1908년에 마쳤다.

그러나 만일염불회도 불교가 조선총독부사찰령에 묶이면서 염불당과 함께 차차 자취를 감추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도 크고 오래된 절에서는 간혹 염불당으로 쓰였던 건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나, 거기에서 들려왔던 염불소리와 만일염불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극락왕생을 바라는 미타신앙보다는 현세의 실질적인 이익을 기원하는 관음신앙이 더 크게 성행하고 있다. 다만, 사람이 죽었을 때나 명복을 비는 재의식(齋儀式)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아미타경』을 독송하는 의식이 행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염불요문(念佛要門)』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
『청허집(淸虛集)』
『정토보서(淨土寶書)』
『삼문직지(三門直指)』(팔관)
『청주집(淸珠集)』
「신라정토사상의 전개와 원왕생가」(김동욱, 『중앙대학교논문집』 2, 1957)
「원효의 미타정토왕생사상」(안계현, 『역사학보』 16, 1961)
「신라백월산이성설화의 연구」(김영태, 『조명기박사화갑기념 불교사학논총』, 1965)
「신라의 미타사상」(김영태, 『불교학보』 12, 1975)
「고려의 밀교와 정토신앙」(서윤길, 『동국사상』 14, 1981)
「新羅社會と淨土敎」(八百谷孝保, 『史潮』 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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