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은 인디아공화국(Republic of India)이며, 수도는 뉴델리(New Delhi)이다. 면적은 328만 7263㎢ 로 세계 제7위이고, 인구는 1989년에 8억743만 명으로 세계 제2위였으며, 2015년 현재는 12억 5169만 5584명(2015년 현재)이다. 인구의 대부분은 북방의 아리안족(70%)과 남방의 드라비다족(25%)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힌디어(연방공용어)(32%)와 영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종교는 힌두교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회교(11.4%)·기독교·시크교(2%)·불교 등을 믿고 있다. 기후는 전체적으로 열대몬순기후를 나타내며, 3월에서 5월에 이르는 건조혹서기(乾燥酷暑期), 6월에서 10월 상순에 이르는 습윤고온기(濕潤高溫期), 그리고 10월에서 2월에 이르는 건조한랭기(乾燥寒冷期) 등의 삼계(三季)로 되어 있다.
인도는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일찍이 발달한 나라 중 하나로, 서기전 2500년 무렵에 이미 인더스(Indus)강 유역에 청동기 도시문명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 무렵에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흥기하는 등 인도의 특색 있는 문화와 사회형태가 만들어졌다. 그 뒤 마우리아(Maurya)제국이 인도의 통일제국을 이룩하였다.
마우리아제국은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 의해서 기원전 317년에 건설되었는데, 3대 1세기에 걸쳐 강대한 상비군과 관료제도를 주축으로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마이소르(지금의 카르나타카) 북부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 제국이 쇠퇴한 뒤 약 5세기 동안 통일 지배는 무너지고 분열된 상태가 되었다.
이어 4세기 전반에 출현한 굽타(Gupta)제국이 북인도 일대를 지배하고 마우리아제국 이후의 지배체제와 사회구조를 재편하게 되었다. 8∼12세기에 걸쳐 무슬림(Muslim) 세력이 서북부지방을 침입하게 되었고, 이들에 의한 무슬림왕조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인도의 정치적 통일과정은 1526년 무굴(Mughal)제국 성립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무굴제국의 건설은 제3대 악바르(Akbar, 재위 1542∼1605)에 의해서 행해졌다. 그는 주위의 세력들을 무찌르고 무굴 세력을 확립하는 동시에 황제의 지위와 권력을 구축하였다. 무굴제국은 그 뒤 약 150년 동안 번영을 누렸으나, 18세기가 되면서 모든 지방의 세력들이 독립해서 분립하거나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분립된 상황 속에서 영국의 식민지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네덜란드·프랑스·영국의 상인들이 연이어 인도에 건너와서 각지에 상관(商館)을 설치하고 면직물·향료 등의 무역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무역의 패권을 둘러싸고 서로 각축을 벌였는데, 영국이 다른 나라를 제압하고 마침내 프랑스를 격파하여 패권을 장악하였다.
1765년 영국은 벵골(Bengal)의 영유권을 획득해서 인도 식민지 지배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600년에 설립된 동인도회사가 벵골을 영유하게 되자 인도를 통치할 기관으로 인도 총독을 두었다.
그 무렵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인도의 모든 왕국들을 상대로 한 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빼앗거나 복속시켜서 북서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인도는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늘어난 상품 시장, 원료 공급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1857년 영국군의 인도용병(印度傭兵) 반란이 있었으며, 이는 농민에서 구 지배계급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이 참가한 대반란이어서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영국은 1858년 동인도회사에 의한 통치를 마치고 직접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인도인들은 인도인들대로 힌두교의 종교와 사회를 반성, 개혁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마침내 1885년 인도 국민의회파(Indian National Congress)가 창설되었다. 국민의회파는 인도 경제가 빈곤한 것은 부(富)가 영국으로 유출되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인도인들의 정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힌두교도의 종교와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인도의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운동도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국민의회파는 스와라지(Swaraj:자치·독립)·스와데시(Swadeshi:국산품 사용)·민족교육의 강령을 내걸고 반항하였다. 독립을 위한 투쟁방법을 둘러싼 급진파와 온건파의 대립도 있었으며,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대립도 깊어져 1906년에는 무슬림연맹(Muslim league)이 발족하였다.
새로운 민족운동이 전개된 것은 제1차세계대전 후 간디(Gandhi,M.)의 지도하에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이 퍼져 나갔으며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도 활발해졌다. 대공황 후의 제2차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에 의해서 독립을 요구하는 열기가 높아졌으며, 마침내 인도 민중의 힘이 결집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회의파는 전쟁비협력을 선언하고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동안 1906년에 창설된 무슬림연맹은 파키스탄지역의 분리를 결의하였고, 전후에는 각지에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싸움이 일어나 결국 1947년 8월 15일 인디아공화국과 파키스탄공화국으로 분리해서 각각 독립하였다.
오늘날의 정부형태는 의회민주주의체제하의 연방국가로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연방은 22개 주와 9개의 연방 직할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부는 22개의 성(省)으로 구성되고,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상·하 양원 및 주의회 의원으로 구성되는 선거인단에 의해서 선출되며, 상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실권을 가진 수상은 하원의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지도자로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인도는 비동맹운동 창설을 주도한 이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아울러 인도, 아시아대륙에서의 안정 유지 및 대미·소관계에서 균형주의를 취하고 있다.
인도의 경제는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한 자급자족적인 경제구조, 국민경제의 농업 의존성, 격심한 빈부 격차 등을 특징으로 한다. 독립 이래로 사회주의적인 혼합경제체제를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인종·종교·언어의 다원성과 이질적 문화의 공존, 카스트제도 등으로 인하여 경제발전은 침체되어 있다.
1987년 국민총생산은 2413억500만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300달러이었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2조 900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1617 달러이다. 무역은 1988년의 경우 대인도 수출은 153억1240만 달러(홍차·의류·공업제품)이고, 수입은 243억1000만 달러(석유·철강·기계류)이던 것이 2015년에는 2015 년의 경우 대인도 수출은 2876억 달러(홍차·의류·공업제품)이고, 수입은 4323억 달러(석유·철강·기계류)이다.
인도는 풍토조건이 상이한 광대한 지역, 지방에 따라 다양한 인종과 180여 종의 복잡한 언어, 종교간의 갈등, 격심한 빈부 격차와 68%의 높은 문맹률, 생활 저변에까지 깔려 있는 사회적인 신분제도(카스트제도) 등의 많은 이질성·다양성, 그리고 갈등요소를 가진 복합사회이다.
인도는 외교적으로 한국이나 북한 어느 한쪽을 지지하거나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한국의 국력 신장, 국제적인 지위 상승을 높이 평가해서 한국과의 관계 증진이 실질적으로 유리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1962년 4월 총영사관을 설치했으며, 1973년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과는 무역협정·문화협정(1974.8.), 과학기술협력협정(1976.3.), 이중과세방지협정(1985.7.), 항공협정(1992.3.), 관광협정(1993.9.), 투자보장협정(1996.5.) 등을 체결하였다.
인도와 한국의 교역은 점차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인도는 철강·시멘트 등 중간재를 주로 수입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 내의 중간재 생산 침체와 공업화 추진에 따른 수요 증가에 의한 것이다. 최근에는 인도의 석유개발 장비·전자부품·제강시설·선박 등 고도기술산업 분야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어서 한국의 주요 수출시장이 되고 있다.
한국은 인도에서 주로 철광석·원면·원피·피혁제품 등을 수입하고 있다. 인도는 한국과의 무역적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철광석·원면·농산물·기계류의 더 많은 수입을 바라고 있다. 1988년 인도의 대한 수출은 1억5400만 달러이고, 수입은 5억1200만 달러로 큰 적자를 나타냈으나, 2015년의 대한 수출은 128억 달러이고, 수입은 53억 달러로 1988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출이 증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74년 8월 문화협정이 체결된 이래 두 나라 사이에는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1978년·1981년·1983년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인도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다. 1976년 이래 인도 네루대학 한국어과에 담당 교수를 파견해 왔으며, 예술단 교류도 활발해서 한국 민속무용단이 1980년과 1982년 두 차례 인도를 방문했으며, 인도측에서도 1975년·1981년·1983년에 예술단을 파견하였다.
한국은 1971∼1982년 인도 트리에날국제미술전 4회, 1977년 제6회 인도국제영화제, 1982년 제5회 세계도서전에 참가했으며, 인도는 1976년 제22회 서울아세아영화제에 참석하였다. 또, 한국은 1975년 이래 매년 인도에서 개최되는 DCM축구대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1981년에는 여자 농구단이 인도를 방문, 친선경기를 갖기도 하였다.
인도측은 1977∼1982년 대통령컵국제축구대회, 1982년 아시아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남자초청 국제농구대회 및 국제배구대회 등에 참가하였다. 이 외에도 각종 국제대회를 통한 두 나라 사이의 교류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도는 원칙적으로 외국 이민이나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장기 체류 외국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제도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우리 교민은 겨우 3세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6·25전쟁 이후 제3국을 선택한 반공포로 출신으로 인도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근 두 나라 사이의 경제협력관계가 증진됨에 따라 상사 주재원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인데, 1988년에는 교민이 17명, 체류자가 270명이었으나 1997년에는 교민은 42명이고, 체류자는 1,072명으로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였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73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인도와 북한과의 관계는 인도 대외정책의 기조인 모든 국가와의 우호관계 유지 및 남북 등거리외교정책 추구라는 차원에서 유지되고 있다. 1962년 3월 1일 영사관계가 수립된 이후, 1962년 7월 21일 주뉴델리 총영사관 개설, 1968년 10월 주평양 인도 총영사관 개설을 거쳐 1973년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두 나라 사이에는 해운협정(1974.11.)·항공운반협정(1976.6.)·무역협정(1978.2.)·문화협정(1979.2.) 등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문화교류협정(1974.8.)에 의거 1978년부터 1989년까지 5차에 걸쳐 한·인문화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북한은 1980년 1월 간디 수상이 재집권한 이후 간디 수상의 친소정책에 편승하여 관계를 긴밀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주재국에서의 이미지 하락으로 정상적인 외교관계의 위축은 물론, 경제·통상면에서도 발전 징후가 보이지 않고 있다.
(1) 문화사적 관계
우리나라와 인도와의 관계는 선사시대(신석기·청동기)의 바위 조각에서 어떤 관련성이 인정될 수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문화관계를 맺은 것은 불교문화가 전래되면서부터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공식적인 《삼국유사》의 연대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이지만, 이를 전후해서 삼국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당시의 인도 문화는 굽타 문화 초기단계 내지 그 이전 단계인 쿠샨왕조의 문화로 여겨지고 있다. 고구려에는 처음에 순도(順道)가 들어오고 그 다음에 아도(阿道)가 들어왔다. 이들은 간단한 문맥으로 보아 인도 내지 서역 승려일 가능성이 짙다. 순도의 경우 중국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다가 고구려로 온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에는 인도의 쿠샨 문화가 직접적으로 전해졌거나 또는 중국을 거쳐 간접적으로 전해졌거나 간에, 어떤 형태로든 4세기에는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
백제에는 384년(침류왕 2)에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교를 전파했는데, 마라난타는 인도 승려 아니면 서역 승려가 분명하다. 그가 인도 승려였다면 인도 문화를 직접적으로 백제에 전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 뒤 겸익(謙益)이라는 백제 승려가 바다를 통해 인도에 다녀오면서 불경을 가져와 72권을 역경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바 우리나라 승려가 인도를 직접 순례하고 인도 문화를 전래해 왔던 것으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승려가 인도에 간 최초의 예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을 모시고 왔으므로 인도 문화를 직접 전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백제나 고구려와는 달리 훨씬 뒷날인 527년(법흥왕 14)에 불교를 공식적으로 공인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약 1세기 앞서 5세기 초에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래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아도 또는 묵호자(墨胡子) 등으로 불리던 인도 승려 또는 서역 승려를 전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인의 특징인 묵호자로 이해했다는 것은 분명히 인도인 승려가 신라에 전도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 전래 초기에는 인도 승려들이 압도적으로 우리나라에 전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인도의 불교 문화, 특히 쿠샨왕조 말 내지 굽타 문화가 직접적으로 전해진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후 인도의 불교 문화는 계속 전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요동성에 아육왕(阿育王) 탑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은 인도의 아소카(Asoka)왕이 직접 만든 탑으로 이해했고, 그 모양도 인도탑 형식인 복발형이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인도 양식의 불탑을 직접 받아들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가야에도 인도의 불교 문화가 직접적으로 전래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왕후(許王后)가 인연의 나라로 탑을 싣고 오다가 가야에 도착해서 불교를 믿게 했다는 것이다. 인도의 공주가 가야까지 와서 왕후가 되면서 파사석탑 같은 인도의 불교 문화를 전파한 사실을 극적으로 묘사한 《삼국유사》의 이 전설은 인도 문화의 직접적인 전파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사람은 오지 않고 아소카왕이 보낸 불교 문화를 수용한 사실을 알려 주는 예는 신라에도 있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보낸 불상 모형과 동 및 황금으로 황룡사의 금동장륙상(金銅丈六像)을 조성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인도 문화의 전파 사실을 분명히 시사하는 예라고 하겠다.
초기의 불교 문화는 삼국시대에 주로 전파되었는데, 그 뒤 굽타의 난숙(爛熟)한 인도 문화는 600년을 전후해서 어느 정도 수용되었지만, 통일신라 초기 이른바 7세기 후반에 대거 받아들여진다. 난숙한 사실주의의 조각이나 불화양식이 전파되어 새로운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인도나 서역 승려들이 오기도 했고, 우리의 신라 승려들이 유학하기도 했으며, 또 중국을 통해서 인도 굽타의 불교 문화가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이러한 문화 전파는 650년을 전후해서 인도에 순례 온 신라 승려를 무려 8명이나 보았다는 의정(義淨)의 기록인 《대당서역구법고승전 大唐西域求法高僧傳》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특히 다년간 인도에 유학을 다녀온 뒤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이라는 세계 3대 기행문을 저술한 혜초(慧超)의 예는 인도와 우리나라의 문화 교섭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극히 단편적인 몇 가지 예만 보아도 우리나라와 인도의 문화사적 관계가 매우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인 4세기부터 고려시대인 14세기까지 불교 문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인도의 불교 문화는 우리 나라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2) 인도에 있는 한국 문화의 유적·유물
인도와 우리나라의 문화사적 관계는 인도 문화가 우리나라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인도에 한국 문화의 흔적인 유적·유물이 있을 가능성은 극히 드문 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승려들이 상당 기간 머물면서 불사에 참여했거나 살펴보고 예배한 유적·유물은 상당수 있다. 이 가운데 확실한 것은 혜초가 본 유적·유물이라고 하겠다.
알다시피 혜초는 704년(성덕왕 3)에 신라에서 태어났으며, 719년에 중국 광주로 유학갔다가 밀교의 조사, 금강지(金剛智)와 불공(不空)을 사사했는데, 금강지의 권유로 723년에 바닷길을 통해 인도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5년 동안 인도 천하를 순례하다가 727년 11월에 서역의 쿠처에 도착했고, 그 뒤 장안에 머물면서 금강지를 도와서 역경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금강지가 열반한 뒤 불공의 제2제자가 되어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경전을 연구했으며, 780년부터 오대산에 들어가 787년 입적할 때까지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그가 인도에 도착한 것은 동부 인도였다. 곧 석가가 입멸한 쿠시나국을 보았는데, 여기서 열반탑이나 열반지 기념사원 등을 참배하게 되었다. 이후 남쪽의 바라나시국을 방문했는데, 여기에서는 최초의 설법지인 녹야원에 들러 사원과 탑을 둘러보게 된다.
녹야원에는 유명한 사원이 있고 다메크탑 등 거대한 탑이 있었으며, 아소카왕 석주 등 난숙한 불교 문화의 정수들이 있었다. 혜초는 이러한 불교 문화의 진수에 진심으로 환희했고 경건하게 참배했다고 한다.
이 녹야원을 지나 부처가 가장 많이 머물렀고, 최초로 절을 세워 대중 포교에 나섰던 왕사성(王舍城)으로 갔다. 여기에는 인도 문화의 정수가 모여 있었으므로, 죽림정사(竹林精舍)·망고원·법화경 설법처 등 수많은 사찰과 사찰터를 둘러보았다.
그 다음 중천축국으로 가서 4대 영탑(四大靈塔)에 참배했는데, 4대 영탑은 당시 인도에서는 가장 유명한 불탑으로 이름나 있었으므로 불교 문화의 진면목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곳을 지나 부처의 탄생지인 룸비니동산에 가서 그곳 유적을 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발길을 남쪽으로 돌려 남천축국으로 갔으며, 현재의 아잔타·엘로라 등 유명한 석굴에 들러 수많은 석굴을 참관하고 수도에도 정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서북쪽으로 나아가 탁실라국에 도착했는데, 여기에서 혜초는 탁실라의 도시 유적과 죠우리안 등 수많은 사원과 불탑의 위용에 감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이곳의 유적과 유물은 상당히 잘 보존되고 있는데, 8세기 당시에는 더욱 정연하게 남아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간다라 문화의 정수이기 때문에 혜초는 의미심장하게 느꼈을 것이다.
또한, 현재의 카슈미르지방인 가시미라국에 들어가 수많은 사원과 도성들을 둘러보고 인도 문화에 심취한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비단길의 험로를 간신히 넘어 대발률국·소발률국의 여러 사원과 도성을 방문하였다.
이 나라는 고구려 유장(遺將) 고선지(高仙芝)가 정복하여 불교 문화를 직접 접했던 곳이기도 하였다. 탑상이 새겨진 수많은 바위 조각과 범본(梵本) 《법화경》이 발견된 사원을 자세히 참배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카슈미르를 지나 간다라 문화의 중심지 간다라국에 들어가 동서문화가 잘 조화된 간다라 문화의 여러 유적지를 방문하였다. 카니슈카(Kaniska)왕이 건립한 카니슈카사원 등에 참배하면서 간다라 불교 문화를 마음껏 보고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혜초는 8세기 당시 불교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유적과 유물 그리고 수많은 사원과 도시들을 살펴보았고, 이들을 경건하게 참배했으므로 이들은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유적과 유물이 될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순례승들이 이들을 참배했으므로 우리 선인들의 손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3) 인도에서의 한국학 연구현황
인도의 네루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있어서 한국의 언어와 한국학 등이 광범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동국대학교의 서경수(徐景洙) 교수(작고)가 기초를 다졌고, 같은 학교 정병조(鄭柄朝) 교수가 이어서 발전시켰다.
이 밖에 네루대학에는 국제정치학과에서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외교 등을 연구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한국 유학생들이 수십 명 유학하고 있으며, 교민들도 많아져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동국대학교에 인도철학과가 있고, 외국어대학교에 인도어과가 있어서 인도학 연구에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학자 및 학생들이 상당수 되며, 불교학·불교미술·불교음악 등을 연구하는 간접적인 연구도 매우 활발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