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년(중종 15)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完山)이고,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이었다. 자는 현응(玄應)이며, 법호는 청허(淸虛)이다.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조계퇴은(曹溪退隱), 서산대사(西山大師) 등 다수이다. 아버지는 향관(鄕官)을 지낸 최세창(崔世昌), 어머니는 한남 김씨(漢南 金氏)이다. 고려 말 태고보우(太古普愚)가 원에서 전수해 온 임제종(臨濟宗)의 정통 법맥을 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12세에 고을 수령인 이사증(李思曾)의 도움으로 서울로 옮겨가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지리산에 유람 갔을 때 불교를 처음 접하였다. 헛된 이름을 멀리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라는 숭인(崇仁)의 권유를 받아 출가하였고,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1571)의 제자가 되었다. 수학 과정에서 『능엄경(楞嚴經)』 · 『원각경(圓覺經)』 · 『법화경(法華經)』, 그리고 『전등록(傳燈錄)』 · 『선문염송(禪門拈頌)』 · 『화엄경(華嚴經)』 등을 공부하였는데, 이는 승과의 시험 교재이거나 승려 교육 과정에 들어간 경전 및 선서였다. 1550년(명종 5)에 문정대비에 의해 선교양종이 재건되자 1552년 승과에 합격하였고, 선종과 교종의 판사를 겸직하였다. 1566년에 선교양종이 다시 폐지되었는데, 그 전에 그만두고 금강산에 가서 수행과 교육에 매진하였다. 그 뒤에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옮겨 주석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 16종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으로 임명되었다. 앞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 때 휴정이 거짓 고발을 당해 옥에 갇히자, 선조가 그의 글을 읽고 무혐의로 풀어주며 대나무 그림을 그려준 인연이 있었다. 휴정은 평안도 의주로 선조를 찾아가 “나라 안의 승려 가운데 늙고 병들어 나설 수 없는 자들은 각자 있는 곳에서 수행하고 신령의 도움을 기원하게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소집하여 종군하게 하려 합니다. 신 등이 비록 군역을 지는 부류는 아니지만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의 은혜와 훈육을 입었는데 어찌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목숨을 바쳐서 충심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며 평안도 법흥사(法興寺)에서 전국의 의승군 5,000명을 일으켰다.
이때 황해도의 의엄(義嚴), 강원도의 사명유정(四溟惟政), 전라도의 뇌묵처영(雷默處英) 등 각지의 승장들이 승군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의승군은 평양성과 행주산성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이순신(李舜臣)의 수군에도 참여하였다. 또 산성의 축조와 방비, 군량 조달 등 후방 지원 사업을 담당하였다. 1593년 선조가 서울로 돌아올 때도 승군이 호위하였는데, 휴정은 그 직후 도총섭을 그만두고 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고 읊은 후 세수 85세, 법랍 67세로 입적하였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탑이 세워졌다.
휴정의 문하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는데, 대표적 제자로는 청허계의 4대 문파를 이룬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 사명유정(泗溟惟政, 1544∼1610),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를 들 수 있다. 이들 외에도 문집을 남긴 영허해일(暎虛海日, 1541~1609), 제월경헌(霽月敬軒, 1544∼1633),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기암법견(奇巖法堅, 1552∼1634), 중관해안(中觀海眼, 1567∼?), 영월청학(詠月淸學, 1570∼1654), 운곡충휘(雲谷沖徽, ?~1613)가 이름난 문도였다. 휴정의 법맥을 이은 청허계는 조선 후기 최대의 계파였다.
휴정의 수행 기풍 및 사상의 핵심은 간화선을 우위에 두면서도 선과 교를 아우르는 단계적 수행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는 『선가귀감』에 나오는 ‘방하교의(放下敎義) 참상선지(參詳禪旨)’라는 말에 압축되어 있다. 그는 “먼저 진실된 가르침에 의해 변하지 않는 불변(不變)과 인연에 따르는 주1의 두 뜻이 곧 마음의 성(性)과 상(相)이고 주2와 주3의 두 문이 수행의 처음과 끝임을 판별한 뒤에 교의 뜻을 내려놓고 오직 마음에 드러난 한 생각으로 선의 요지를 참구(參究)하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출신활로(出身活路)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이것은 교학을 수행의 입문으로 삼되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알음알이의 지해(知解)에 얽매이지 말고 간화선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취지로서, 선과 교를 아우르는 단계적 수행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선과 교로 나뉘어 대립하던 당시 현실에서 양자의 화해를 통해 두 갈래의 전통을 다 계승하려 한 것이다.
휴정의 조사인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34) 또한 “연희교사(衍熙敎師)로부터 원돈(圓頓)의 교의를, 정심선사(正心禪師)로부터 서쪽에서 온 밀지를 배우고 깨쳤다.”는 기록에서 보듯 선과 교를 함께 닦았다. 지엄은 『대혜어록(大慧語錄)』과 『고봉어록(高峯語錄)』을 보다가,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구자무불성(拘子無佛性)’ 화두, 찾아야 할 주4는 따로 있다는 '양재타방(颺在他方)'이라는 문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종밀(宗密)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종밀의 책을 요약하여 해설한 『법집별행록절요사기(法集別行錄節要私記)』로 후학을 지도하여 지견(知見)을 깨치게 하고, 고봉과 대혜의 『어록』으로 지해의 병을 제거하여 활로를 열게 하였다. 이 책들은 조선 후기 강학 교재인 사집과(四集科)의 구성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지엄은 “도를 배우려면 먼저 경전을 궁구해야 하지만 경전은 오직 내 마음속에 있다.”라고 하여 교학을 학습한 뒤 조사선(祖師禪)의 빠른 문으로 들어가야 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수행법이 휴정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휴정의 저술로는 시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과 주저 『선가귀감(禪家龜鑑)』을 비롯하여, 『삼가귀감(三家龜鑑)』, 불교 의식집인 『운수단(雲水壇)』 등이 있다. 그 외 짧은 기문으로 「선교결(禪敎訣)」, 「선교석(禪敎釋)」, 「심법요초(心法要抄)」 등도 전한다. 먼저 『청허당집』은 휴정의 행적과 교류, 현실 인식과 사유의 궤적을 볼 수 있는 시문집으로, 충의를 실천한 고승이자 선승으로서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시에는 개인적 서정, 자연 경관의 찬미, 선적 해탈의 경지 등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상퇴계상국서(上退溪相國書)」, 「상남명처사서(上南冥處士書)」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이황(李滉), 조식(曺植)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자전적 성격의 「상완산노부윤서(上完山盧府尹書)」는 제자 편양언기가 쓴 행장과 함께 그의 삶을 추적해 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청허당집』은 1630년 경기도 삭녕 용복사(龍腹寺)에서 편양언기가 주관하여 간행한 이식(李植)의 서문이 있는 7권 2책 본, 정조의 「서산대사화상당명(西山大師畫像堂銘)」과 「수충사사제문(酬忠祠賜祭文)」[1794]이 수록된 묘향산 장판(藏板) 4권 2책 본이 주로 유통되었다.
『선가귀감』에서는 조선 불교 법통과 간화선 수행법의 연원인 임제종을 선양하면서 선과 교를 함께 닦는 수행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선과 교의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 조화를 추구하기 위한 선종 중심의 종합적 불교 이해 지침서이다. 여기에는 임제종 · 조동종(曹洞宗) · 운문종(雲門宗) · 위앙종(潙仰宗) · 법안종(法眼宗)의 선종 5가의 기풍, 간화선 수행법, 선교겸수의 방식, 염불과 계율, 진언다라니 등 다채로운 내용이 들어가 있다. 휴정은 부처의 마음을 전한 것이 선, 말로 드러낸 것이 교임을 전제로 하면서도, 임제종을 높이고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의 우월성을 내비쳤다. 『선가귀감』은 1569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금화도인(金華道人) 의천(義天)에 의해 언해본이 먼저 나왔고, 10년이 지난 1579년에 지리산 신흥사(新興寺)에서 의천이 교정에 참여하여 한문본이 간행되었다. 『선가귀감』은 일본에 전해져 1630년대와 1670년대에 5회 간행되었고, 17세기 말에 고린젠이[虎林全威]가 『선가귀감오가변(禪家龜鑑五家辯)』이라는 주석서를 쓰기도 하였다.
『삼가귀감』은 유교 · 도교 · 불교의 사상적 특성을 개관하고 삼교의 조화와 일치를 주장한 책이다. 유교는 여러 경서의 핵심 개념을 뽑고 그에 대한 주석을 인용하였는데, 『논어』의 천(天), 『서경』의 중도(中道), 『중용』의 성(性) · 도(道) · 교(敎) 등이 나오고, 천과 심의 관계, 마음공부와 실천법 등이 다루어졌다. 도교는 『도덕경』과 『장자』를 대상으로 천지인(天地人)의 본체인 도와 그 작용인 덕(德), 진인(眞人)과 안빈낙도(安貧樂道) 등을 기술하였다. 불교는 『선가귀감』의 내용을 간추려 간화선 우위의 선교겸수 방안을 제시하였다. 결론에서는 유가의 천리(天理), 현묘한 도를 비유하는 도가의 곡신(谷神)을 불교의 일심(一心)에 회통시켜 3교를 아우르고자 하였다.
「선교결」은 선과 교의 요체를 정리하고 선의 우위를 내세운 글이다. 휴정은 선과 교를 닦는 이들이 자신의 것에 매몰되어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며, 종밀이 주창한 선과 교의 일치를 내세웠다. 다만 교는 선에 들어가는 입문으로서 소승(小乘), 연각(緣覺), 대승(大乘)을 건지는 것이고, 선은 교 밖에 따로 전하는 조사의 기풍이라고 보았다. 글의 끝에서는 “지금 팔방의 승려들을 대하는 데 있어 본분사인 경절문(徑截門)의 활구(活句)로 각자 깨우침을 얻게 함이 종사로서 모범이 되는 것이다. 정맥(正脈)을 택하고 종안(宗眼)을 분명히 하여 부처와 조사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고 경계의 말을 하였다.
「선교석」은 사명유정 등 제자들이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들고 와 선의 종취를 물어보자, 선과 교의 차이를 설명하고 선의 우위를 강조한 글이다. 정혜(定慧)와 견성(見性), 정법안장(正法眼藏)과 교외별전(敎外別傳) 등의 내용을 질의응답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휴정은 교는 방편이자 입문이라서 알음알이의 이해가 있으며, 선은 한 생각조차 없는 교외별전의 가르침으로 문자나 대상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을 직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편, 여기에는 진귀조사(眞歸祖師)가 부처에게 선을 전수해 주었다는 진귀조사설도 인용되어 있다.
휴정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의승군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였다. 이후 승군 활동의 공적이 인정되면서 승려의 윤리적 흠결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고, 불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환되었다. 18세기에는 의승장에 대한 제향이 중요 문제로 부각되면서 휴정과 유정 등을 향사하는 사당이 국가 공인 사액사로 지정되었다. 1738년 밀양의 표충사(表忠祠)를 시작으로 1789년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표충사, 1794년 묘향산 보현사의 수충사(酬忠祠)가 사액되었고, 공식 제향이 이루어졌다. 해남과 묘향산에서의 공식 향사를 명한 정조는 “불교는 자비가 중요한데 휴정은 그에 부끄럽지 않아 인천(人天)의 안목이 되었다. 종풍을 발현하고 국난을 널리 구제하니 근왕(勤王)의 원훈이며 상승(上乘)의 교주이다. 속세를 구제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의 자비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