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 ()

수계의식
수계의식
불교
개념
몸[身]과 입[口]과 뜻[意]에 의한 일체의 악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규범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계(戒).
이칭
이칭
계(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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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몸[身]과 입[口]과 뜻[意]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일체의 악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규범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이다. 원래 계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조정하는 종교적·도덕적 규범이고, 율은 단체생활을 영위하는 출가교단을 통제하는 규범을 말하는, 서로 다른 용어이다. 그러나 계와 율이 동일한 뜻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고 일상어로 사용할 때에도 완전히 구별지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중국·우리나라·일본에서는 합성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계를 설정하고 있으나 율을 내세우는 경우는 드물다.

정의
몸[身]과 입[口]과 뜻[意]에 의한 일체의 악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규범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계(戒).
개설

계율은 계와 율의 복합어이다. 원래 범어에서는 계(Sila)와 율(Vinaya)을 별개의 뜻으로 사용하여 붙여 쓰지 않았으나, 중국 · 우리 나라 · 일본 등에서만 합성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계와 율이 동일한 뜻으로 표현되었고, 일상어로 사용할 때도 완전히 구별 지을 수 없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히 살펴보면 계와 율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계는 습관 · 습성 · 관행 등의 의미가 있으며, ‘좋은 습관’, ‘도덕적 행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인간의 몸과 마음을 조정하는 종교적 · 도덕적인 규범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도덕이나 법률 · 의례 등도 여기에 포함되며, 규정된 조문뿐만 아니라 일체의 수양덕목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불교도이면 남녀나 출가 · 재가의 구별 없이 모두가 지켜야 할 행위규범이다.

이에 대하여 율은 조복(調伏), 즉 훈련을 뜻하며, 모든 그릇됨을 여의고 이상적인 세계로 선도해야 할 출가교단을 통제하는 규범이다. 따라서 단체생활을 영위하는 출가자를 통제하는 규범으로, 재가신자들이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크게 관계되지 않는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 교단이 형성되었을 때는 정치권력으로부터 교단이 독립된 생활을 영위했으므로, 국왕을 비롯하여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교단은 자치적 통제가 강화되어야 했으므로 불교 규범으로서의 율이 제정된 것이다. 결국, 계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불교 도덕이요, 율은 출가자만을 위한 통제규칙으로 정의된다.

대부분의 종교는 계를 설정하고 있으나 율을 내세우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대부분의 종교가 전문적인 출가교단을 위한 조직보다는 신앙만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하여, 불교는 그 출발부터 출가자들은 물론, 재가자들을 학습시켜 전문지도자로서 그 인격을 고매하게 해야 할 의무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계율의 분류

『사분율행사초(四分律行事鈔)』에서는 계율을 계법(戒法) · 계체(戒體) · 계행(戒行) · 계상(戒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계법은 불타가 정한 법이고, 계체는 법을 짓는 주체로서 항상 비행을 막고 악을 그치는 것을 말한다. 계행은 계체를 낱낱이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계상은 그 계행에 따른 여러 가지 차별상을 말한다.

계의 분류는 경전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개 소승(小乘)에서는 불살생(不殺生) · 불투도(不偸盜) · 불사음(不邪婬) · 불망어(不妄語) · 불음주(不飮酒)의 5계를 중심으로, 8계 · 10계 및 삼귀의계(三歸依戒) 등의 재가계(在家戒), 그리고 출가승의 비구(比丘) 250계 비구니(比丘尼) 348계 등의 구족계(具足戒)를 중심으로 하는 금계(禁戒)로 나뉜다.

그러나 대승(大乘)의 계는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布施 · 持戒 · 忍辱 · 精進 · 禪定 · 般若의 여섯 가지 수행법)의 하나로서 적극적인 수행덕목을 말한다.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에서는 일체의 계를 삼취정계(三聚淨戒)라고 하여 섭률의계(攝律儀戒) · 섭선법계(攝善法戒) · 섭중생계(攝衆生戒)로 분류하고 있다. 섭률의계는 율의를 지킴으로써 자신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며, 섭선법계는 금계로써 만족하지 않고 봉사정신으로 이타적인 선행을 닦아 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섭중생계는 궁극적으로 중생보살로, 그리고 부처로 성취시켜 불국토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또한, 계는 삼학(三學)의 하나로서 선정(禪定) · 지혜와 함께 번뇌의 원인이 되는 탐(貪) · 진(瞋) · 치(痴)의 3독(三毒)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도 설명되고 있다.

계율사상

고구려의 계율사상

고구려의 계율사상을 알게 하는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372년(소수림왕 2)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한 지 25년 뒤, 담시(曇始)가 삼귀의(三歸依)와 5계를 세워 교화했다는 것이 계율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리고 평원왕중국 정국사의 법상(法上)을 찾아가 불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연(義淵)으로부터 약간의 계율에 관한 기사를 살필 수 있다.

법상은 계와 혜(慧)가 높은 승려였으며, 의연이 법상에게 배운 대승 논서들 중에는 『보살지지경론』이 들어 있다. 이 경론은 대승의 보살계로서 계율의 의미, 삼취정계, 4중(重), 42범사(犯事) 등의 계목이 수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는 일찍부터 『지지경』의 계율이 신봉되었고, 의연 이후에는 널리 전승되었으리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의 계율사상

백제에 계율이 전래된 것은 마라난타(摩羅難陀)가 384년 불교를 전파할 때의 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백제의 율학이 본격화된 것은 겸익(謙益)에 의해서이다. 겸익은 526년(성왕 4) 인도에서 돌아와 율종(律宗)을 세웠다. 그는 중앙인도의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범어를 배우고, 율부(律部)를 전공한 뒤,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할 때 범문으로 된 율문을 가지고 귀국하여 72권으로 번역, 편찬하였다.

흥륜사(興輪寺)에서 그가 범본을 번역할 때 국내의 고승들이 그를 도와 윤문 및 증의(證義)를 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그 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이 율에 대한 소(疏) 36권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이 율문을 기록에는 『범본아비담장오부율문(梵本阿毘曇藏五部律文)』 또는 『비담신율(毘曇新律)』이라고 하고 있다. 왕은 이 『신역율본』을 태요전(台耀殿)에 보관하고 장차 널리 보급시키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인도로부터 직접 원전을 가져와 백제 사람의 손으로 번역을 했다는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중국 및 우리 나라에서 널리 채택되었던 『오분율(五分律)』은 424년경에 중국 양도(楊都)에서 번역되었고, 408년경 『마하승기율(摩詞僧衹律)』과 『사분율』은 장안(長安)에서, 『십송률(十誦律)』 역시 404년경 장안에서 번역되었다. 『살바다비니(薩婆多毘尼)』는 350년에서 431년 사이 번역된 역자 미상의 율전이다. 겸익이 가져온 것이 이 다섯 가지 율전의 다른 이름이었다면, 중국에서 번역된 것을 들여와 쓰지 않고 왜 이와 같이 큰 수고를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겸익의 이와 같은 노력에 의해서 백제불교는 율종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백제의 계율사상은 한편으로 일본에서 꽃피게 되었다. 554년(성왕 1) 16명의 승려를 최초로 일본에 보냈고, 577년(위덕왕 24) 불경과 함께 율사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588년(위덕왕 35) 일본 최초의 비구니 선신(善信) 등 여러 명이 백제로 건너와서 3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돌아가서 일본 계학의 후원자가 되었다. 또한, 백제의 승려들은 일본인들에게 직접 계를 주고 승려로 만들기도 하였다. 구족계를 받지 않고는 승려가 될 수 없다는 불교의 계율에 따라 백제 승려들이 수계함으로써 일본의 승려들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계율 신봉적인 경향은 점차 백제불교를 극단적으로 형식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599년(법왕 1) 전국에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어획과 수렵 등에 사용되는 도구들을 모두 없애게 하였으며, 심지어는 민가에서 기르는 조류까지도 놓아 주게 하였다.

왕은 불살생의 도를 전국민에게 요구했지만, 짐승을 죽이지 않는 것보다는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 정치를 하는 것이 보다 불도의 참뜻을 살리는 것이라고 본 신라의 자유로운 계율관과는 대조적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계율사상

신라불교의 계율이 정립된 것은 자장(慈藏)통도사(通度寺)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고 난 뒤이다. 그러나 신라에서도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계율이 함께 유입되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551년(진흥왕 12) 고구려에서 귀화한 혜량(惠亮)팔관회(八關會)를 베푼 것은 팔관재계에 근거한 것이며, 원광(圓光)세속오계는 계율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이 가미된 것이다.

원광은 화랑도였던 귀산(貴山) 등의 젊은이가 일생 지켜야 할 종신지계(終身之誡)를 청하였을 때, 불교에는 보살십계가 있으나 세속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세속을 위한 오계를 따로 지어 주었다. 즉, 임금은 충성으로 섬겨야 하고, 어버이는 효도로써 섬겨야 하며, 벗은 신의로써 사귀고, 싸움터에 나가면 물러서지 말아야 하며, 목숨이 있는 것을 가려서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살생유택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불살생의 시기로 정한 육재일(六齋日) · 여름에는 산 것을 죽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때는 · · · 등에서부터 아주 작은 생물까지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쓰임에 따라 죽이더라도 많이 죽이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은 불교의 제일계인 불살생과는 크게 내용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열반경(涅槃經)』을 탐독했던 원광으로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칼과 활을 들고 비구를 수호해야 한다.”, “국왕과 대신, 그리고 신자들이 불법을 지키기 위해서 칼과 창을 갖는 것은 결코 파계가 아니다.”라고 한 『열반경』의 정신을 계승하여, 삼국의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지킬 수 있는 생활의 규범을 제시하였다.

한편, 신라 왕실과 민중들 사이에는 고구려의 사문 혜량이 귀순한 뒤부터 삼국통일 전까지 팔관지법(八關之法)이 크게 유행한 듯하다. 팔관지법이란 팔관회에 앞서 실시된 불교의식으로 추정된다. 원래의 팔관은 아함경전(阿含經典)에 나오는 초기 계율로서의 8계를 뜻하며, 8계는 모두 발달된 계율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 계율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해탈(解脫) · 성도(成道)의 열쇠가 되는 것이며, 열반성(涅槃城)에 도달하는 관문인 까닭이다.

인도에서는 매월 7일과 15일의 월 2회에 걸쳐 설계(設戒) 또는 포살(布薩)이라고 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는 8계의 준수 여부를 반성하고 설법을 들으며 다시는 계를 범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의식으로 진행되었다. 중국 양나라의 무제(武帝)는 이 포살을 하나의 국가적 행사로 중요시하고 팔관재회라고 하였다.

신라의 팔관회도 처음에는 근본 계율을 준수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팔관지계와 같은 뜻으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나중에는 전사자를 위한 위령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결국 하나의 민족 축제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원광의 세속오계도 이 팔관지계와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상은 일반 세속인과 관련된 신라 계율의 일면이며, 불교 승단(僧團)의 계율에 관한 내용은 자장 이전의 시기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643년(선덕왕 12)에 귀국하여 대국통(大國統)이 된 자장은 확립되지 못한 불교 교단 자체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매달 보름과 그믐에 승려들이 함께 모여서 지난 보름 동안의 생활을 반성하고 죄가 있을 때는 여러 대중 앞에서 고백하여 참회하게 하는 포살의식을 철저히 실천하였다.

또, 모든 승려에게 불경을 공부하게 하여 봄과 가을에 시험을 보았다. 그 밖에도 사람을 전국으로 보내어 지방의 여러 절들을 살펴 승려들의 생활이 계율에 어긋남이 없도록 감찰하였으며, 불경과 불상을 모시는 것도 율을 따라 봉안하게 하여 승단의 기풍을 세우는 데 진력하였다. 당시 불교를 믿는 사람들 중 열의 아홉은 자장으로부터 계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당나라 계율종의 시조 도선율사(道宣律師)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자장은 수계의식을 집전하는 장소인 계단을 만들었다. 그는 중국에 있는 동안 도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신라에 계단을 만들어 불교 교단의 기풍을 법에 맞게 엄격히 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자장은 646년(선덕왕 15) 경상도 양산에 통도사를 세우고 당나라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아 온 불사리를 봉안하여 금강계단을 만들었다. 이것이 신라 최초의 계단이다. 이때부터 통도사에는 이미 출가한 사람이나 재가자 할 것 없이 자장에게 계를 받으려고 금강계단을 찾아드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자장은 계율종을 열고 계율을 중심으로 하여 승려나 재가자들이 모두 바른 윤리를 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사분율』과 『십송률(十誦律)』의 주석서인 『사분율갈마기(四分律羯磨記)』와 『십송률목차기(十誦律木叉記)』를 저술하였는데, 우리 나라 승단에서 소승의 『사분율』을 기초로 하여 대승의 『범망경(梵網經)』을 신봉하게 된 연원은 자장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계단의 설립은 중국 도선의 남산종(南山宗)과도 맥을 같이한다. 도선은 자장이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 뒤인 667년 장안 시외의 정업사(淨業寺)에 계단을 만들고, 또 『관중창립계단도경(關中創立戒壇圖經)』을 지어 계단의 기원과 명칭, 모양 등을 자상하게 적어 놓음으로써 당나라의 계율종을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에 접어들면서부터 금산사(金山寺) · 불일사(佛日寺) · 영통사(靈通寺) · 복흥사(福興寺) · 용흥사(龍興寺) 등에 계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통도사 · 금산사 · 불일사지 등이다.

자장과 같은 시대의 승려 원승(圓勝)도 정관(貞觀) 초년에 당나라로 가서 구법하고 자장과 함께 귀국하여 율부를 개강, 크게 교화하였다. 그는 『범망경기(梵網經記)』 1권과 『사분율갈마기』 2권, 『사분율목차기』 1권 등을 저술하였으나 현존하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의 계율사상

계율연구서

현존하는 사료상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만큼 계율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였던 시대는 없었다.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래 조선 말까지 율전을 연구한 문헌은 총 27종에 이르는데, 이 중 26종이 신라 승려가 찬술한 문헌이다. 585년 진(陳)으로 들어가 602년(진평왕 24)에 귀국한 지명(智明)이 『사분율갈마기』 1권을 저술한 것에 자장과 원승의 것을 더하면 모두 6종에 이르지만, 이들은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계율이 사상적으로 크게 연구된 것은 삼국통일 이후의 일이다. 이때의 계율관계 찬술 문헌으로는 원효(元曉)『범망경종요(梵網經宗要)』 1권, 『범망경소』 2권, 『범망경약소』 1권,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 2권,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1권,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3권, 『사분율갈마소』 4권, 경흥(憬興)의 『사분율갈마기』 1권, 『사분율십비니요(四分律拾毘尼要)』 3권이 있다.

그리고 승장(勝莊)『범망경보살계본술기』, 현일(玄一)의 『범망경소』 3권, 의적(義寂)『범망경문기』 2권, 『범망경보살계본소』 3권, 『본업영락경소』 2권, 둔륜(遁倫)의 『사분율결문』 2권, 태현(太賢)의 『범망경고적기』 3권, 『범망경보살계본종요』 1권, 『유가계본종요(瑜伽戒本宗要)』 1권, 단목(端目)의 『범망경기』 2권 등 모두 19종이 있다. 이 가운데 원효의 『범망경보살계본사기』 상권과 『보살계본지범요기』, 『보살영락본업경소』 서문 및 하권, 승장의 『범망경보살계본술기』 제2권, 의적의 『범망경보살계본소』, 태현의 『범망경고적기』와 『범망경보살계본종요』만이 현존한다.

원효의 계율사상

한국불교 전체를 통틀어 계율을 가장 깊이 있게 연구한 인물은 원효이다. 원효는 통일 전기의 원광과 자장 두 선배보다 훨씬 뛰어난 보살계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보살계본지범요기』와 『범망경보살계본사기』를 보면 ‘ 사자 몸뚱이 속의 벌레’라고 하여 불도를 닦는 체하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과 명예와 존경만을 탐하는 무리들이 자기만을 추켜올리고 남을 헐뜯는 것을 통탄하면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많은 절들이 세워지고 산속에서 제법 오랫동안 수행하였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왔으며,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승려들이 늘어나서 승려들의 지위는 높아졌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이에 원효는 불교계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참다운 가르침을 대승의 보살계라고 보고, 보살계의 참뜻을 밝히고 실천하는 데 몰두하였다.

원효는 죄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뒤 자신의 신념을 토로한 『보살계본지범요기』 첫머리에서 ‘대승의 보살계는 삶과 죽음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 맑고 깨끗한 그 원천으로 돌아가게 하는 큰 나루와 같은 것이며, 그릇됨을 버리고 올바른 것에 들게 하는 요긴한 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무엇이 바른 것이고 어떤 일이 죄되는 일이며, 어떤 일이 복되는지조차 분간하기 힘들 뿐 아니라, 속마음은 그릇된 것임에도 바깥 모양이 올바른 것같이 보일 때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좋지 않은 행위를 한 것 같지만, 속마음은 순박하여 판단이 힘든 경우가 많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효는 자기 자신을 깨치기 위한 수행으로서 자리행(自利行)을 힘쓰는 한편, 남의 접혀진 마음을 펴주고 아픈 데를 쓰다듬어 주는 이타행(利他行)을 아울러 갖춘 보살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계를 지키는 근본 정신임을 강조하였다. 처음에는 원효도 널리 유통되고 있던 『범망경』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범망경』이 갖는 부족함을 간파한 뒤 『보살영락본업경』을 깊이 연구하여 소를 남겼다.

이 경은 역경승(譯經僧) 축불념(竺佛念)이 번역한 것이나 육조시대에는 널리 유통되지 않다가, 수나라 천태(天台)가 주목함으로써 알려졌다. 이에 대한 주석서도 전무했으나 원효가 최초로 저술하였으며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 경은 대승계율사상의 조직에서 『범망경』의 부족한 것을 충분히 보완하고 있으며, 원효도 이 점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였다. 그는 소를 저술하면서 계율을 통한 이제중도(二諦中道)의 해탈을 천명하였고, 화쟁(和諍)의 논리를 전개시키기도 하였다.

범망경 10중계(十重戒)

원효를 비롯하여 의적 · 태현 · 승장 등의 승려들은 『범망경』에서 설하는 대승 계율을 연구하고 『범망경보살계본사기』 · 『범망경보살계본소』 · 『범망경고적기』 · 『범망경술기』를 저술하면서 모든 사람이 이 계를 지켜 서로 돕고 평화로운 신라사회를 건설할 것을 당부하였다. 『범망경』에서는 바라이죄(波羅夷罪)에 저촉되는 10개의 무거운 계(십중계)를 설하였으나, 그 계마다의 구체적인 내용만을 설할 뿐, 표제가 되는 계명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다. 그 10중계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 보살은 방자한 마음으로 중생을 자기 손으로 죽이거나 또한 그렇게 시켜서는 안 된다.

㉡ 한 개의 바늘이나 한 포기 풀이라도 자기 자신이 훔치거나 또는 남에게 훔치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

㉢ 스스로 음탕하거나 또는 음탕할 것을 남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 거짓말을 스스로 하거나 또는 남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켜서는 안 된다.

㉤ 술을 자기 스스로 팔거나, 또는 남에게 팔도록 가르쳐 이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음주로 해서 그 마음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 모든 사람들의 죄과를 발설하거나 또는 그렇게 하기를 남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 부당하게 자기 자신을 높이고 남의 훌륭한 일은 숨겨 깎아내리며 헐뜯기를 자기 스스로 하거나 남에게 시켜서는 안 된다.

㉧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빈곤한 사람이 찾아와 무엇을 얻으려고 할 때 보살은 그 소원에 따라 자기 것을 아낌없이 다 주어야 하거늘, 오히려 업신여기고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붓기를 자기 스스로 하거나 또는 그렇게 남에게 시켜서는 안 된다.

㉨ 보살은 마땅히 자비심을 가지고 서로 시비가 없어야 하거늘, 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여 찾아오는 사람을 미워하고 끝까지 화를 내며 스스로 용서하지 않거나 또는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

㉩ 자기 스스로 불 · · 승 삼보를 비방하거나 또는 남에게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

이상의 10중계의 계명에 대해서는 중국의 지의(智顗) · 법장(法藏)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승려들도 그들 나름대로 계명을 붙였다. 특히, 신라의 태현은 독특한 계명을 붙이고 있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이름을 달리 짓게 되는 까닭은 계의 핵심을 어디에 두고 이해하였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현의 경우 10중계 중 뒤의 제7 · 제8 · 제9 · 제10의 4계를 근본계로 지적하여, 의적이 앞의 제1 · 제2 · 제3 · 제4의 4계를 지적한 것과는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원효와 태현은 10중계 중 어느 1계만 범하였을 경우, 범한 계만 상실되는 것이라 하여, 1계만 범하여도 나머지 9계가 자동적으로 모두 상실하게 된다고 본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설을 반박하였다.

살생계관(殺生戒觀)

불교의 제1계는 살생계이며, 신라 승려들은 원광 이래 독특한 살생계관을 전개시켜 왔다. 10중계 가운데 제1계를 태현은 쾌의살생계(快意殺生戒)라 하였다. 그러므로 태현의 설에 따르면 행위로 나타나지 않아도 죽이려는 마음만 가져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원효나 의적도 탐내고 미워하고 어리석은 3독의 마음으로 인하여 살생의 마음이 생긴다고 하여 마음을 중요시하고는 있지만, 미수로 끝난 경우 그 죄를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

그들은 또 살해당한 자의 종류를 셋으로 나누어, 사람이 아닌 하품(下品) 중생을 죽인 경우 그 죄가 가벼운 것으로 보았고, 보통 사람인 중품(中品) 중생을 죽인 경우 그 죄가 무겁지만, 그래도 어버이나 고승대덕 등 상품(上品) 중생을 죽인 경우보다는 가볍다고 하였다. 대개 소승불교에서는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살생을 금하지만, 대승에서는 우연히 던진 쇠붙이에 맞아 죽게 되거나, 병을 고치려던 의사가 잘못하여 병자를 죽게 하든지, 또는 미쳐서 날뛰는 사람을 죽인 경우 죄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는 많은 중생에게 무궁한 이익을 가져오게 하는 자비살생(慈悲殺生)은 오히려 을 짓는 일이라고 하여 살생을 허용하고 있다.

신라의 고승들은 이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각기 그들의 살생관을 확립시켰으며, 여기에서 삼국통일의 전쟁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저질렀던 살생에 대한 불교윤리와 국민윤리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꾀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스스로 자살하는 것과 한 집단의 질서를 파괴하여 평화와 화합을 깨뜨리는 행위마저 살생으로 규정한 승장의 살생관에서는 신라가 사회질서와 평화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알게 한다.

원효와 그 뒤를 따른 신라 승려들은 다 같이 살생을 유복비죄(唯福非罪) · 비복비죄(非福非罪) · 유경비중(唯輕非重) · 유중비경(唯重非輕) 등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 평가하고 있다. 첫째 자비살생은 오직 복뿐이며, 둘째 미쳐서 날뛰는 마음에서 살생한 것은 죄도 아니고 복도 아니며, 셋째 하품 중생을 죽인 것은 그 죄가 경할 뿐이지만, 넷째 상품 중생을 죽인 것은 그 죄가 중할 뿐이라고 하였다.

한편, 같은 중죄라 할지라도 그 마음가짐의 정도에 따라 상품인 · 중품인 · 하품인 등 셋으로 죄의 경중을 논하고 있다. 살생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자랑으로 삼는 상품인은 도저히 구제할 수 없으나, 살생을 부끄러워하면서 뉘우치는 하품인, 또는 뉘우치지는 않아도 자랑으로는 여기지 않는 중품인의 경우는 구제의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살생에 대한 이와 같은 네 가지 평가기준과 범죄자의 구제에 관한 문제는 다른 모든 계율에도 적용되고 있다.

자찬훼타계관(自讚毁他戒觀)

10중계 가운데서 원효가 가장 힘을 기울인 대목은 자기를 높이고[自讚] 남을 헐뜯지[毁他] 말라는 제7계 자찬훼타계이다. 이 계는 『보살영락본업경』의 4바라이계 중 제1계에 해당한다. 원효는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를 높이거나 남을 헐뜯는 경우와, 바라는 마음에서 그 같은 행위를 하여도 그 바라는 욕심이 5전(錢) 이하의 경우라면 그 죄가 가벼운 것이라고 하였으나, 5전 이상의 소득을 바라고 저지른 것이라면 중죄가 된다고 하였다. 승장도 원효처럼 탐심 · 진심 · 치심 등 3독에서 범한 자찬훼타가 아니면 그 죄를 가볍게 보았다.

태현과 의적도 탐심을 버리는 것을 이 계의 근본정신으로 삼고 있다. 특히, 의적은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설하는 5악(惡)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5악을 살생(殺生) · 투도(偸盜) · 사음(邪淫) · 망어(忘語) · 음주(飮酒) 등 5계로 다루는 한편, 제5악을 음주 대신 3독으로 하는 또 하나의 견해를 아울러 내세움으로써 윤리생활에서의 3독의 허물을 강조하였다. 모두가 자찬훼타의 허물을 경계했지만, 원효는 5전 이상을 바라는 탐심이 있다면 자찬이든 훼타든 그 어느 하나에 의해서도 중죄가 된다고 보았고, 의적과 태현은 자찬과 훼타가 동시에 갖추어졌을 때에 한해서만 중죄가 된다고 보고 있는 점이 서로 다를 뿐이다.

그들은 살생의 경우처럼 자찬훼타의 행위를 네 가지 기준으로 판단하였다.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신념을 일으키게 하려고 자찬훼타하면 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이 되는 것이며, 5전 이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저지른 것은 그 죄가 무겁다고 하였다. 겉으로 나타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들은 인간의 행동규범을 설하면서도 마음의 정화를 기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의 계망계학(戒網戒學)은 이들 신라 승려의 저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특히, 태현의 『범망경고적기』는 당시 일본불교계의 정식 교과서로도 채택되었으며, 예존(叡尊)과 청산(淸算)을 비롯한 일본의 승려들이 다투어서 『범망경고적기』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점찰계법(占察戒法)

신라에서 범망계(梵網戒)와 함께 크게 유행한 것은 점찰계법이다. 이는 『점찰경(占察經)』의 신앙을 근거한 것이며, 진표(眞表)에 의해서 크게 부각되었으나, 진표 이전의 신라에서도 상당히 유행하고 있었다. 진평왕 때의 원광은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써 우매한 중생을 깨우치고자 하여 그가 머물던 가슬갑사(嘉瑟岬寺)점찰보를 설치하여 언제나 점찰법의 실천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진평왕 때의 비구니 지혜(智惠)도 매년 봄과 가을로 안흥사(安興寺)에 선남선녀를 모아 10일 동안 점찰법회를 열었다. 이와 같이 일찍부터 신라사회에 유포되기 시작한 점찰계법은 통일신라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죽은 사복(蛇福)과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세웠던 도량사(道場寺)에서는 매년 3월 14일 점찰회를 열었고, 흥륜사에서는 육륜회(六輪會)라 하여 점찰법회를 열었다.

그러나 신라사회에서의 점찰신앙이 민간에 널리 확대되고 사상적으로 심화된 것은 진표에 의해서이다. 진표는 그의 전 생애를 『점찰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에 따라 수행하고 교화하였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계승된 점찰신앙은 금산사(金山寺) · 법주사(法住寺) · 동화사(桐華寺) 등지에서 널리 전파되었다. 이 때문에 진표를 점찰교법의 확립자이며 참회불교(懺悔佛敎)의 집대성자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진표의 행적을 통해서 볼 때 그는 매우 계법을 중요시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진표가 『점찰경』의 계법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그의 스승 순제(順濟)로부터 점찰계법을 지니고, 미륵(彌勒)과 지장(地藏) 두 보살에게 참회하고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할 것을 당부받은 것에서 비롯된다. 신명을 돌보지 않고 참회, 정진한 진표의 수행은 청정계법(淸淨戒法)을 얻고자 함이었고, 이것은 『점찰경』의 교설을 따른 것이었다.

『점찰경』에는 미래세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청정계법, 즉 보살계와 삼취정계(三聚淨戒:攝律儀戒 · 攝善法戒 · 攝衆生戒)를 구하고자 하나 좋은 계사(戒師)를 만나지 못할 경우, 마땅히 도량 내에서 일심으로 원을 세우고 계상(戒相)을 생각하면 능히 계를 받을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이미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참회법을 먼저 수행해야 한다고 덧붙여 설하고 있다.

이러한 『점찰경』에 따라 참회법을 닦은 진표는 마침내 지장보살로부터 정계를 받고, 미륵보살로부터 제8간자(簡子)와 제9간자를 전해받았다. 제8 및 제9의 간자란 육륜상(六輪相)의 점찰법에 의하여 관찰할 수 있는 189종의 선악과보차별지상(善惡果報差別之相) 중의 제8 소욕수득묘계(所欲受得妙戒)와 제9 소회수득계구(所會受得戒具)를 의미하고, 이것 역시 미륵보살로부터의 수계를 의미한다.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계법을 얻은 뒤, 진표의 중생교화는 모두 설계(說戒)에 의한 것이었다. 금산사에서 개단설법(開壇說法)을 한 그는 뒷날 경덕왕에게 보살계를 수계하였다. 바다의 고기들까지도 그의 계를 받았다는 등, 진표의 전기 기록들이 한결같이 그를 율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진표의 계법 중시사상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진표의 점찰계법은 영심(永深) · 융종(融宗) · 불타(佛陀) · 보종(寶宗) · 신방(信芳) · 체진(體珍) · 진해(珍海) · 진선(眞善) · 석충(釋忠) 등이 다시 산문을 개창함으로써 널리 전파되었고, 또 영심의 뒤를 이은 심지(心地)가 팔공산 동화사를 중심으로 설계함으로써 널리 보급되었으나, 심지 이후 계맥(戒脈)의 전승은 뚜렷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의 계율사상

고려에서 계율을 어떻게 전개시키고 발전시켰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중국 도선이 창립한 남산종(南山宗)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율종이 존재했던 것은 확실하나, 신라처럼 독특한 계율사상을 남기거나 전개시킨 일은 없었다. 현존하는 사료로서 알 수 있는 고려의 계율은 왕실을 중심으로 전개된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지눌(知訥)수선사(修禪社) 1세가 된 뒤 청규(淸規)의 일종으로 마련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다.

보살계도량

고려 왕실에서는 매년 6월 15일 궁중에서 보살계도량을 열었다. 이때 국사왕사를 비롯한 고승대덕들이 주재하는 가운데 국왕이 보살계를 받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보살계는 대승의 보살, 즉 승려나 속인을 가리지 않고 불도 수행에 뜻을 두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같이 지켜야 할 계율이다. 보살계 가운데서도 10중계와 10선계(十善戒)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범망경』에 설해 놓은 10중계는 가장 근본적인 보살계로서, 만약에 이것을 어기게 되면 바라이죄(波羅夷罪, Pa-rajika)를 지어 불문으로부터 파문되고 추방당하게 된다. 그리고 십선계는 『지도론(智度論)』에서 설한 보살계로서 몸가짐과 말씨와 마음씨를 올바르게 유지할 것을 규제해 놓은 계목이다. 이와 같은 보살계를 국왕이 받는다는 것은 국왕이 보살의 자격을 새로 얻거나 또는 보살의 자격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보살계도량은 대대로 역대의 국왕이 그 스스로 불제자임을 다짐하고 널리 선언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보살계도량이 어찌하여 6월 15일에 열리게 되어 있었는지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일찍부터 6월 15일을 유두(流頭)라고 하여 제각기 동쪽 냇물에서 머리와 몸을 씻고 깨끗한 마음으로 잔치하며 즐기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와 같이 뜻있는 날을 택해서 마음과 몸가짐을 바르게 가다듬을 것을 다짐하는 보살계도량을 열기로 정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종 때는 보살계를 재위 13년 동안 오직 1044년 6월에만 받았으나, 문종 때는 재위 37년 중 5회를, 예종 때는 재위 18년 동안 7회를 받았다. 또, 인종 때도 재위 25년간에 모두 16회에 걸쳐서 왕이 보살계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살계도량은 6월 15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선종의 경우처럼 때로는 하루 앞당겨서 6월 14일에 열기도 하였고, 1172년(명종 2)의 경우처럼 훨씬 늦추어 6월 25일에 열었던 경우도 있었다.

한편, 『고려사』에는 1095년(헌종 1) 6월 15일 왕이 궁중에서 목차계(木叉戒)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를 통해서 왕이 6월 15일 목차계를 받았다고 기록한 것은 이때 한 번 있었을 뿐이다. 목차라 함은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의 약칭으로 계율의 조목을 일컫는 말이지만, 보살계인 10중계는 ‘십중바라제목차’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헌종이 6월 15일 목차계를 받았다는 것도 항례적인 6월 15일의 보살계도량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눌의 계율사상

지눌은 혼탁과 광란의 분위기를 정화하고, 바르고 참된 불교의 뜻을 선양하여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재현하기 위하여 생애를 바친 승려이다. 그는 삼학(三學)을 존중하여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 경절문(徑截門) 등을 천명함으로써 선문을 융성하게 하는 한편, 『계초심학인문』을 저술하여 수선사의 기강을 세웠고, 초심자의 지침이 되게 하였다.

이는 수선사에 참여한 대중의 일상 행위를 규율화한 것으로, 1397년(태조 6) 상총(尙聰)이 왕명을 받을 때 이를 전국 사원의 청규법(淸規法)으로 시행하게 됨에 따라, 우리 나라 사찰에서 일상생활의 근본 규범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는 사미승의 청규와 비구의 청규, 선방에서의 주의사항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사미승의 청규는 악한 벗을 멀리하고 착한 벗과 친하라, 5계와 10계를 받아 지니되 잘 지키고 범하고 열고 닫을 줄 알라,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라, 항상 부드럽고 착한 생각으로 순종하며 자신을 높여 거만하지 말라, 큰 사람은 형을 삼고 작은 사람은 동생을 삼아라, 다툼이 있으면 두 말을 화합시켜라, 벗을 속이거나 업신여기지 말며 그릇됨을 따지지 말라이다.

이어서 재물과 색(色)을 항상 멀리하라, 일없이 다른 사람의 집이나 방에 들어가지 말라, 숨어서 남의 비밀을 엿듣지 말라, 정한 날짜가 아니면 세탁과 목욕을 하지 말라, 세수할 때 소리 높여 침뱉지 말라, 분배할 때 순서를 지켜라, 옷깃을 헤치고 팔을 걷지 말라, 말할 때 희롱의 웃음을 짓지 말라, 중요한 일이 아니면 문밖에 나가지 말라이다. 그리고 병든 사람을 자비심으로 보호하라, 어른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생활용구는 검소한 것으로 만족하라, 음식을 먹음은 오직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함인 줄 알라,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예불하라, 축원할 때는 뜻을 생각하라, 자신의 죄장(罪障)이 산과 바다와 같은 줄 알고 참회하라는 것 등이다.

비구승의 청규는 서로 사양하며 다투지 말고 보호하라, 승부를 다투지 말라, 한가한 말로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라, 남의 신을 바꾸어 신지 말라, 앉고 눕는 자리의 순서를 지켜라, 타인 앞에서 집안의 나쁜 일을 말하지 말라, 일없이 속인과 사귀어 뜻있는 자를 미워하고 질투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 출행시에는 관리자에게 행선지를 밝혀라, 길가에서 여인을 희롱하는 등 부처님의 계율을 어기지 말라는 등이다.

선방에서의 주의사항으로는 어린아이들과 동행하지 말라, 분주히 인사치레 하지 말라, 남의 좋고 나쁜 점을 보지 말라, 문자를 지나치게 탐하지 말라, 잠을 지나치게 자지 말라,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라, 법문을 들을 때는 생각을 비우고 열심히 들어라, 법사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등이다.

그러나 지눌 등 고승들의 노력과는 달리 고려의 많은 승려들이 계행을 닦지 않고 금욕과 정욕을 가까이 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신망이 땅에 떨어졌고, 조선시대는 배불정책에 의해 큰 퇴화를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계율사상

조선시대에도 불교의 전통적 계율은 교단 속에서 그대로 전승되어 왔지만, 승려들은 불교의 이치와 유교의 것이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회유관(懷儒觀) 아래에서 계율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조선 초기의 기화(己和)이다.

기화는 불교의 불살생 · 불투도 · 불사음 · 불음주 · 불망어 등 5계를 유교의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 · 신(信) 등 5상(常)에 차례로 배합시켜 소개하였다. 신라의 세속오계를 유교덕목과 불교윤리를 서로 조화시킨 것이라고 보려는 이도 없지는 않으나, 유교와 불교와의 윤리덕목이 서로 그 본질면에서 비교 논설되기는 기화에 와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숭상하는 유교윤리가 지배하는 중국사회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지자, 5계라는 불교의 실천윤리를 유교의 오륜이나 5상과 어떻게 일치 조화시키느냐가 불교측의 가장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서 5계를 5상과 일치시켜 중국사상에 합치시키는 일은 불교를 중국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그래서 5계를 설하는 위경(僞經)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북위 때 담정(曇靖)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위파리경(提謂波利經)』은 통일신라 때 태현이 『범망경고적기』를 저술할 때 인용한 일도 있었다. 이때 신라 안에서도 이 『제위파리경』이 널리 유통되고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신라나 고려 때처럼 불교가 사회의 관념체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유교가 사회의 주도적 이념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5상과 5계와의 일치론이 현실적으로 승려들간에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사정은 달라졌다. 그런데 5계를 5상 가운데 어느 것에 배합하였느냐보다, 5계를 5상에 배합하였느냐 또는 5상을 5계에 배합하였느냐가 문제이다. 중국의 종밀(宗密)은 불살생 · 불투도 · 불사음 · 불망어 · 불음주의 순서에 5상을 인 · 의 · 예 · 지 · 신의 차례로 배합하여 유교의 5상을 불교의 5계와 맞추었다.

그러나 조선의 기화는 이와 달리 인 · 의 · 예 · 지 · 신의 순서에 맞추어 불살생 · 불투도 · 불사음 · 불음주 · 불망어의 순으로 오계를 배합하였는데, 이는 불교를 유교에다 맞춘 것이다. 이와 같이 유교에 중심을 두고 불교를 회유하려고 한 것이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흐름이었고,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이 기화의 입장을 널리 채택하였다.

기화 이후 계율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를 피력한 고승은 휴정(休靜)이다. 그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주로 5계를 중심으로 계율의 문제를 널리 취급하고 있다. 그는 “계행(戒行)이 없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 하였거늘, 하물며 깨끗한 부처의 열매를 바랄 수 있을까?” 하고, 계율을 존중하는 것이 부처와 함께하는 길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 소승의 계율이 법을 준수하는 데 그치기 때문에 외형적인 잘못만 치유하는 데 반하여, 대승의 계율은 마음에 허물을 두지 않음으로써 허물의 뿌리를 끊기 때문에, 몸으로뿐만 아니라 생각으로 범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고 하여, 신라 원효 이후 한국 고승들의 계율관을 다시 강조하였다. 그는 음란이 깨끗한 성품을 끊고, 살생이 자비스런 마음을 끊고, 도둑질이 복과 덕을 끊고, 거짓말이 진실한 것을 끊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도를 닦는 자는 지양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아무리 정진하여 깨달음을 이룬다 할지라도 이 근본 계율을 어기면 반드시 악마의 길에 떨어져 결국은 보리(菩提)의 바른 길을 잃게 된다고 하여, 당시 선학자(禪學者)가 범하기 쉬운 허물을 경계하였다. 그는 또 계율을 전통적인 선의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즉, 생각하지 않는 것을 계율이라고 하고, 계율의 그릇이 온전하고 튼튼할 때만 선정(禪定)의 물이 맑게 괴고, 지혜의 달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계율이 수행의 근원이 됨을 밝혔다.

마음의 계율을 한번 깨뜨릴 때 온갖 허물이 함께 일어나게 된다는 그의 계율관은 조선 중기 이후의 불교가 그를 정점으로 하여 전승됨에 따라 널리 신봉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원효 및 태현 등이 『범망경』의 근본 10계 중 제7 · 제8 · 제9 · 제10계를 근본적인 계로써 지적한 데 대하여, 휴정은 제1 · 제2 · 제3 · 제4계를 근본계로 삼았다. 이것은 신라 의적의 주장을 채택했다기보다는 중국의 선종에서 널리 신봉했던 계관(戒觀)을 답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휴정 이후 조선의 승려 중 계율에 대한 독자적인 입장을 천명한 승려들은 극히 드물었고, 선종의 발달에 따라 계율문제는 크게 대두되지 못하였다. 다만, 조선 말기에 해인사 · 백양사 · 통도사 · 범어사 등에서도 새로이 계단을 설치하여 신라 이후로 밝혀지지 않았던 계맥(戒脈)을 부활시켜 오늘날까지 전승하고 있다.

근대 및 현대의 계율사상

일본은 1910년 한국을 강점함과 더불어 종교까지도 일본화하려고 획책하였다. 계율 또한 한국불교의 전통인 독신과 채식 위주의 생활을 파괴하고 대처(帶妻)와 육식을 강요하였다. 우리 나라의 불교는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는 데 그 특성이 있어왔다. 특히, 처첩을 거느리거나 음계(淫戒)를 범하면 사찰에서 퇴거해야 했는데, 일반 사회에서는 그러한 승려는 승려의 표준을 벗어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한국 승려 중 일부는 일본 승려와 접촉이 잦아지면서 계행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승려는 처자를 거느리고 있음에도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지계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가 온 것이다. 그리하여 1910년대 전후의 승려사회에는 숨어서 처첩을 거느린 승려의 수가 상당수에 달하고 있었다.

이무렵 한용운(韓龍雲)중추원통감부에 대처금지를 해제해 달라는 건의서를 냈고, 또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지어 거듭 강조하였기 때문에 승단 안에서 이를 반대하는 이가 많았다. 그는 조선불교를 부흥시키는 중요하고 시급한 대책의 하나로서 승려의 대처화문제를 들고 있다. 혼인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나, 이는 방편으로 사소한 계율을 설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는 혼인금지가 세상의 도리에 어울리지 않는 까닭을 윤리에 해로운 점, 국가에 해로운 점, 포교에 해로운 점, 교화에 해로운 점 등으로 열거한 뒤, 승려의 혼인은 자유의사에 일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취처의 움직임은 1919년 11월 용주사의 주지 강대련(姜大蓮)이 총독 사이토(齋藤實)에게 취처를 공식적으로 허락할 것을 탄원하였고, 1926년 10월 사법(寺法)에서 취처를 금하는 조문이 삭제됨에 따라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결코 승려의 대처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단의 승려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승려가 백용성(白龍城)이다. 그와 127명의 선승들은 1926년 5월 전국 승려의 수도생활과 불교의 장래를 위하여 취처 · 육식을 하는 등의 계를 범하는 생활을 금지해 달라고 조선총독부에 연서하여 진정을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것은 광복 후 비구 · 대처 간의 싸움으로 계속되었고, 결국 불교정화운동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은 그 전통을 회복하였다.

계맥

우리 나라의 계맥(戒脈)은 백제 계율의 시조인 겸익이 526년(성왕 4) 인도에 가서 530년 상가나사에서 율법을 연수하고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과 함께 귀국하여, 흥륜사에서 28명의 유명한 승려들과 72권의 율서를 번역한 다음, 담욱 · 혜인 두 승려가 36권의 율서를 지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신라에서는 자장이 636년 당나라에 들어가 율을 배운 뒤 643년(선덕여왕 12)에 귀국하여 대국통이 됨과 동시에 양산 통도사를 건립하고 금강계단을 창립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경덕왕 때 진표는 점찰계를 홍포하여 그 맥을 전개시켜 갔다.

그러나 그 뒤로는 계맥이 거의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내려오다가 1780년에서 1814년 사이에 생존한 대은(大隱)이 경상남도 하동 칠불암(七佛庵)에서 은사 금담(錦潭)과 함께 기도하여 서광을 얻고, 청창(淸昌) · 진하(震河) 등에게 전하여 오늘날의 새로운 계맥을 잇게 하였다. 금담은 해인사와 백양사의 율조(律祖)로, 해인사에서는 초의(草衣)-범해(梵海)-제산(霽山)-용성(龍城)-경하(景霞)-자운(慈雲) 등의 순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양사에서는 초의-범해-재산-호은(虎隱)-금해(錦海)-만암(曼庵)-묵담(默潭)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또, 청창의 계맥이 범어사에서는 한파(漢波)-만하(萬下)-성월(惺月)-일봉(一峰)에게로 내려오다가, 일봉으로부터 운봉(雲峰)과 자운으로 갈라졌고, 운봉 밑에는 동산(東山)-석암(昔巖)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통도사의 계맥은 청창 밑에 한파-만하-해담(海潭)-회당(晦堂)-고경(古鏡)-월하(月下)로 이어지고 있고, 법주사의 계맥은 진하 밑에 벽암-석교(石橋)-석상(石霜) 등의 율사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운허(耘虛)의 『불교사전』에서는 근대 한국의 계맥을 구암사백파(白坡)로부터 전수되는 1파와, 월출산 대은이 칠불암에서 서은을 얻은 1파, 중국 답자산 수운사 혜관으로부터 계맥을 이은 팔공산의 보담파, 중국 난징(南京)에서 전수한 능허(凌虛)가 성월에게 전한 구월산파, 자장의 맥을 이은 해담파, 오대산 연파(連波)의 1파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 창도사(昌濤師)로부터 받은 용연사 만하의 1파, 장안사의 한파를 중심으로 한 1파, 북경(北京) 염화사 덕명으로부터 전수한 유점사 영봉파(靈峰派), 중국 천돈사 기선(奇禪)으로부터 전수한 진하파(震河派), 북경 원광선사의 경연(慶然)으로부터 전수한 보계산 월운파(月雲派)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현재 그 계맥을 모두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부 수지자(受持者)만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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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목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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